제152화
"네에... 뭐어..."
나는 워낙 센 말을 할 예정이라, 그 전에 좀 상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하자면 약간의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했다.
나는 은근슬쩍 채민환 대표의 방을 스캔했다.
그의 방에는 클래식 CD가 가득했다. 오페라부터 조수미 등 유명 성악가의 독집 앨범까지, 주로 성악에 관련된 CD였다.
"대표님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나는 그렇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그렇죠. 성악을 특히 좋아합니다. 지난주에도 오페라 보러 호주까지 다녀왔어요."
채민환이 자랑스럽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채민환과 그 아내가 함께 호주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내가 감탄하며 말하자, 너털웃음을 하며 채민환이 말했다.
"와이프도 성악가잖아요. 그래서 승아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배우가 됐나? 허허."
"성악을 좋아하셨군요… 성악에 매력은 뭐가 있을까요?"
내가 성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약간 상기 된 목소리로 말했다.
"타고난 악기인 몸만 가지고 승부한다는 게 매력이죠. 대중가요는 사실 좀 기술이 있잖아요?"
"맞습니다."
끄덕이며 답하는 나를 보며 채민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성악은 기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가 타고난 목소리, 자기 악기를 잘 쓰는 거예요. 그때 묻지 않은 느낌이 좋달까? 하하, 뭐 그런 거죠."
"그렇군요. 저도 사실 성악곡을 한 번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채민환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며 물었다.
"뭐죠?"
"한번 들려드릴게요."
나는 노트북에 녹음한 내 노래를 들려주었다. 성악가 둘이 함께 부른 클래식 크로스오버 곡이었다.
'슈퍼스타 T’에서, 나는 보컬 트레이너의 제안으로 문루아와 함께 이 곡을 불렀었다.
그 트레이너는 이 곡이 워낙 성공적인 성악 크로스오버 곡이기도 하고, 문루아와 내게 발성 위주로 풍성한 성량을 담아 노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해서 연습했었다.
채민환은 눈을 감고 노래를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다.
* * *
이제 나는 그대와 영원히 함께할게요.
영원히~
채민환의 눈썹이 찌르르~ 하고 꿈틀거렸다.
노래가 끝나고 10초쯤 지났을까?
채민환이 눈을 뜨고 활짝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야~ 노을 씨 노래 자알 하시는데! 성악 하셔도 되겠어요. 타고난 악기가 너무 좋네!"
그것은 성악 팬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감사합니다."
쑥스러워하며 고마움을 전하는 내게 채민환이 물었다.
"함께 노래 부른 건 루아예요? 이렇게 노래 부를 수 있는지는 또 몰랐네."
"네, 성악을 배워보고 싶어서 둘이 같이 연습해본 곡입니다. 보컬 트레이닝을 같이 받은 적이 있거든요."
진지하게 답하는 나를 보고 채민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노래는 함께 부를 때 참 좋아요. 조금 부족한 사람도 있고 조금 튀는 사람도 있는데, 서로 배려하면서 더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 내거든."
"맞습니다, 맞습니다."
채민환은 내가 자신의 취미인 성악 이야기를 하자 그것에 심취한 듯 주먹을 꽉 잡으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 곡도 봐요, 솔직히 루아는 노을 씨만큼 타고난 성량이나 톤이 좋진 않아. 근데 서로 배려하면서 섬세하게 호흡을 맞춰주니까 너무 좋게 들리는 거야. 이게 듀엣인 거죠, 하하. 그래서 성악 좋아하지만 사실 독창보다는 듀엣, 중창, 합창이 참 매력 있는 거 같아요."
"맞습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면 각 사람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서로가 얼마나 선의를 가지고 남을 위해 합을 이루는가가 중요하죠."
내가 그의 말을 거들자, 채민환은 매우 신나 보였다.
그는 잔뜩 흥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맞아. 노을 씨는 아주 젊은데 제대로 알고 있네. 음악에는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니까! 그게 음악의 매력이야."
덩달아 신난 나도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거들었다.
물론 숨은 의도가 있었지만.
"아마 비유하자면 결혼은, 영원히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듀엣이 되는 거 아닐까요? 한 명이 악의에 찬 사람이라면 상대방까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겠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요."
갑자기 채민환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그가 내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야기가 딴 길로 샜네! 소인중 대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죠.”
“맞습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대답한 내게 채민환이 물었다.
"할 말 있어요?"
채민환 대표는 평가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니 나는 몸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돌아온 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는 말 없이 노트북을 열고 미리 다운 받아둔 사진을 보여줬다.
채민환 대표의 눈이 얼어붙은 듯,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다.
노트북 화면에 나오는 사진 속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중화권 배우들이 헐벗은 상태로 찍혀 있었다.
모두 차마 말로 표현하기에도 낯 뜨거운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소인중이 있었다.
"이건…"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민환을 바라보며 차분히 사진에 관해 설명했다.
"소인중 씨는 항상… 문란한 파티를 즐기고 있더군요. 보시면 알겠지만 남녀, 결혼 여부 상관없이 질펀하게 노는 파티입니다."
채민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살짝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매우 침착하게 잘 제어했다. 역시 큰 사업을 일군 인물다웠다.
그가 내게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디서 구했죠?"
그 떨리는 한 마디에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이게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인가, 조작된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런 걸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침착하게 채민환의 질문에 답했다.
"음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친구를 사귀게 되죠. 그러던 중에 어쩌다가 구하게 되었습니다."
채민환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걸 어쩌다 구했다고? 여기에 찍힌 모든 사람의 커리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사진인데."
실제로, 이전 생에서는 채민환의 말대로 되었다.
이 사진이 공개된 후, 이 사진에 나왔던 모든 배우의 경력이 끊겼다.
그럴만한 크기의 추문이었다.
당연히 채민환으로서는 이런 큰 건이 전문 수사관도 아닌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믿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게는 이 의심의 불씨를 꺼뜨릴 수 있는 논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인중은 음악인이니까요. 가까운 사람이 제일 위험하기 마련이죠."
“소인중과 가까웠던 사람이랑 친해졌다?"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채민환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답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걸 알게 됐다?"
"맞습니다. 하필 축가를 승낙한 다음에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건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켜올린 눈썹을 움찔하며 되묻는 그를 응시하며 내가 흔들림 없이 답하자, 채민환은 끙하는 소리는 내며 생각에 잠겼다.
"으음…"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 채민환은 팔짱을 끼고 침묵에 빠졌다.
나도 지금 모든 걸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충분한 파문만 일으키면 됐다.
“대표님은 하모니를 독창보다 좋아한다고 하셨죠?"
정적을 깨는 내 말에 채민환은 차분히 말했다.
"그랬죠."
"하모니는 딱 한 명만 엉터리로 노래를 불러도 망가집니다. 백 명이 불러도 마찬가지죠."
내 비유를 이해한다는 듯이 채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 결혼하면 소인중 씨는 사실상 대표님 회사와 한 식구가 됩니다. 소인중 씨 사업을 '회사'로서 살펴본 적이 있으신가요?"
허를 찌르는 내 질문에 채민환은 말끝을 흐렸다.
"되게 크게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한다고만..."
아무래도 해외고, 예능 쪽이다 보니 채민환 대표에게까지 안 좋은 소문이 크게 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로 소인중은 언론사와 정·재계를 구워삶아 버텨왔으니까.
내년에 있을 예정인 몰락 전까지 이야기지만 말이었다.
"소인중 대표는 그냥 파티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섬을 빌려서 놀죠. 저 사진은 거기서 하는 짓의 아주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여기서 더 간다고? 허어~."
채민환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못 미더우시면 직접 알아보시면 됩니다. 소인중이 어떤 식으로 사업을 했는지. 가는 곳마다 성 상납받고, 마약 파티를 하는 게 일상이라고들 하더군요."
사실 이건 나중에 그가 잡힌 후에야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모두가 쉬쉬했고, 정확한 실체는 실제로 소인중의 파티에 참석했던 자 외에는 잘 몰랐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이미 한 번 겪어본 회귀자였다.
그렇기에 나는 확신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으음..."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긴 채민환에게 내가 말했다.
"뭐,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건데요."
"그런 생각은 했죠. 나름대로 크로스 체크도 했고."
나는 정중하게 그에게 제안하듯 물었다.
"더 자세히, 확신을 가지고 이젠 해보실 수 있겠죠? 이 사진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이제 좀 나가줄래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약간의 살기를 느꼈다.
아무래도,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제대로 소인중을 털어볼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일단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민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좋은 오후 보내세요."
* * *
채민환의 방을 나가니 문루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짐을 다 싼 상태였다.
내가 문루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내일까지 있을 거 아니었어요?"
그녀는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짐 싸요. 나가요."
"왜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인중 대표가 승아 보러 놀러 왔어요."
문루아가 말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인중과 함께 한 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잽싸게 방에 가서 짐을 싸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여어, 권노을 씨."
나는 뒤통수가 심히 가려운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인중이었다.
"소 대표님이군요."
차분히 그를 대하는 나를 보고 소인중이 크큭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왔지?”
“채승아 님이 축가를 부탁해서요. 얼굴이나 뵈러 왔죠."
표정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내게 소인중이 비아냥거렸다.
“지랄하지 말고. 뭐, 내가 부러웠냐?"
"뭐가요?"
소인중이 손을 내밀어 건물을 가리켰다.
"이제 나의 성채가 될 거야."
역시나 소인중은 참 속물이었다.
채승아 본인보다는 그녀의 집안, 그녀의 아버지가 가진 권력과 재산이 더 탐나는 게 티가 났다.
"뭐… 얼마나 갈지 보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내게 소인중이 찡그린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뭐, 인마?"
"내가 축가를 부를 수 있길 기도나 해 두세요. 진심으로 내가 축가를 부를 수 있길 바랍니다."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싱긋 웃으며 나갔다.
뒤통수에 소인중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새끼… 이상한 소리 하고 앉아 있어."
하지만 나는 뒤돌아서기 전에 그의 눈빛을 슬쩍 봤다.
살짝 그의 눈가에 공포가 어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고 다니는 짓이 있으니까.'
소인중도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평소 행실이 채승아의 집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이었다.
채민환이 만약 작정하고 소인중과 연을 끊고, 그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였다.
이제부터는 나 대신 소인중이 '염려'로 고통받을 차례였다.
* * *
나는 문루아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구룡도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문루아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선배가 뭘 사과하시나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묻자, 문루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대로 쉬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못 쉬게 했잖아요. 다음에 제가 리조트 한번 쏠게요. 배영웅 실장님까지. 이번에는 직원 수를 최소한으로 해서 실컷 놀아봐요."
"좋습니다. 그럼 왔다 갔다 하기 편하게… 국내에서 하면 어떨까요?"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좋아요, 좋아요. 더 비싼데 해줘도 되는데, 굳이 국내를 하네요?"
"저는 한국이 편해요."
"그래가지고 글로벌 스타 되겠어요?"
피식 웃는 문루아에게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것을 지켜야 월드 스타가 되죠."
"그래요. 그럼 비원더 3명 다 모일 수 있을 때 연락 줘요. 셋 다 슬슬 휴가 끝나가죠?"
그러고 보니 벌써 휴가가 절반 넘게 지나고 있었다.
일단 활동을 시작하면 느긋하게 여행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서 재호와 환희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 * *
쿠바의 한 호텔 방.
원재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잠을 설치고 있었다.
'벌써 곧 해가 뜰 텐데… 잠이 안 오네.'
그는 항상 11시에 취침했다.
매번 시계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그가 하루 꼬박 잠을 자지 못했다.
그에게는 엄청나게 큰 규칙 위반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를 잘만 잡으면, 비원더는 꿈꾸던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세계... 최고..."
세계라는 말을 곱씹던 그가 갑자기 전화벨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권노을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6시 1분이었다.
평소 원재호의 기상 시각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그와 전화하고 싶었던 권노을이 재호의 기상 시각까지 기다렸다가 일어날 시간이 되자마자 허겁지겁 전화한 것 같았다.
“뭐냐구, 꼭두새벽부터."
-야 재호야. 너 언제 한국 오냐?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권노을의 목소리가 다급해 보였다.
심지어 그는 재호에게 안부 인사도 없었다.
"왜?"
-루아 선배가 우리랑 여행 가고 싶대. 배영웅 매니저랑 같이. 휴가 다음 주면 끝이잖아, 빨리 시간 맞춰보자.
원재호는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밀어붙이는 모습이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노을이답다 싶었다.
여행 같은 걸 즐기지 않는 원재호 입장에서는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야, 뭐 아무 때나 돌아가면 되지. 지금 쿠반데, 여기 악기만 좀 사면 이제 다 끝났어."
-아 그래 잘됐네. 그럼 배 실장님하고 하늘이 시간 알아볼게.
딱 봐도 권노을은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참이었다.
재호가 그런 그를 불러서 막았다.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엄청난 제안이 왔어. 이스트 웨이브의 제안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