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답은 '테마'야."
"테마? 야, 그래. 여기가 테마파크기는 하지. 근데 그게 내 노래랑 뭔 상관이야?"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묻는 앤젤에게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 한국에도 놀이공원 많잖아. 여기가 거기보다 뭐 되게 기술이 좋은 건 아니야. 놀이기구가 더 짜릿한 것도 아니고. 색감도 뭐 되게 다른 건 아니야. 근데 왜 여기가 더 좋은 걸까?"
"아니 그야 여기는 다 디즈니 테마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잖아. 한국 놀이공원은 그에 비하면 잡탱이고."
나는 앤젤의 말에 중지와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탁 소리를 내며 그에게 말했다.
"바로 그거야. 디테일한 모든 조각이 다 디즈니 영화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니까 느낌이 다른 거야. 그게 개성 아니겠어?"
"음..."
“저거 봐."
나는 손가락으로 꽃밭을 가리켰다.
꽃 색깔 하나하나까지 허투루 선택된 것이 없었다.
"꽃밭이네."
심드렁하게 답하는 앤젤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꽃밭이 아니지. 꽃 색깔, 벽돌 하나까지 다 하나의 목표를 향하니까 전체적으로 작품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 뭔지 알겠어. 근데 그게 내 노래랑 무슨 상관이냐고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내 말에 복장이 터졌는지 앤젤이 버럭 소리 질렀다.
"하여간 성격 더럽게 급하네. 봐라, 네 노래도 그런 집요함이 부족한 거야.”
"집요함?”
"확실히 너는 노래를 잘해. 나랑 테크닉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앤젤이 피식 웃고는 나를 한 번 툭 치고 말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네가 훨씬 잘하지. 나도 내 주제는 안다, 인마."
앤젤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좀 겸손한 척하려고 했는데 대번에 들켜 버렸다.
"그래… 뭐… 여튼! 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이거야. 그보다는 방향이야. 네 노래는 뭐랄까,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좋다는 테크닉을 다 잡탕으로 가져다 놓은 거 같아. 그러면 노래를 청자가 듣기에는 그냥 잡탕 같아지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잔뜩 심각해진 앤젤이 물었다.
"음… 그럼 무슨 방향으로 잡아야 하냐?"
"그걸 내가 어떻게 떠먹여 주냐? 그게 되면 내가 그렇게 하지. 그런 건 네가 스스로 찾아야 진짜 아니겠어?”
"그러네. 네 말이 맞다, 야."
나는 의외로 빠르게 수긍하는 앤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웬일로 긍정적인 말을 다 하네."
"짜식이. 나도 눈치는 있어 인마. 이거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거 아니잖아."
"......”
사실이었다. 반년 넘게 올해 내내 앤젤과 티격태격하다 보니 싸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왠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게다가, 저 정도 재능의 가수가 그냥 슬럼프에 무너지는 건 음악 팬으로서 아깝기도 했다.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봐. 빈 백지에서부터."
앤젤은 내 제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봐야겠네.”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듯한 그에게 내가 조언을 해줬다.
“음 하나, 발음 하나, 숨소리 호흡 하나까지도 다 의도가 있어야 해. 네가 표현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보라고. 그럼 노래가 달라질 거야."
앤젤이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내 멋대로 노래 바꿨다가 소 대표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마침 자연스럽게 소인중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화의 흐름에 나는 이때다 싶었다.
"말 한번 잘했다. 소인중 대표 말야."
"어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앤젤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무... 무슨 말이야? 나 아직 계약 하안참 남았어어. 잘해야 해!"
“그 계약, 마무리할 수 있을 거 같어.”
차분히 답하는 나를 앤젤은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뭔 소리야. 너,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그런 거 없어. 그냥 감이야."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나는 알고 있는 게 좀 많았다.
하지만 그걸 앤젤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앤젤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에이씨! 살짝 설렜잖아. 야! 아서라,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잘 된 사람이야. 앞으로라고 안 될 거 같애에?"
“너야말로 여지까지 이렇게 됐다고 앞으로도 잘 될 거 같냐?”
그에게 지지 않고 핀잔주는 내게 앤젤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야, 네가 뭘 안다 그래?"
"노자경 님에게 들었어."
"자경이 형?"
노자경의 이름이 언급되자, 앤젤의 짜증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몰랐냐? 우리 이번 '걔 쩔어' 안무 짜준 거 자경이 형이야."
"연예인 그만두고 안무가 활동 중이었어? 그 형 춤은 잘 추더라. 노래를 좀 못해서 그렇지.”
하여간 말하는 꼬락서니가 꽤 밉상인 녀석이었다.
“그래, 여튼 자경이 형한테 소인중 대표 일에 관해서 더 자세히 들었어. 그런 식으로 오래 갈 리가 없어. 내년 말까지도 못 갈걸?"
이전 생에서 본 바로는 소인중의 몰락은 내년 중순이었다.
내년 말까지는 견딜 수 없을 거라는 내 말은 정확했다.
하지만 앤젤은 내 말이 못 미더운 모양인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에에이… 모르겠다, 난.”
"뭐 만약은 대비하는 게 좋잖아?"
“만약에 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앤젤에게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에 소사장이 내 말대로 곧 망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어?"
"뭘 하긴 뭘 해! 내 살길 찾아야지."
내가 으쓱이는 앤젤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부터 할 말이 사실 제일 중요한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앤젤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바로 그거야. 너 이제부터 그렇게 준비해. 소인중의 때가 묻지 않은, 믿을만한 매니저도 찾아보고. 소속 회사가 없으면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지, 매니징 배운다 생각하고 회사 활동 찬찬히 확인해. 알겠어?"
"그, 그래. 뭐 그런 거도 준비하면 좋겠지."
내가 강하게 나가자 앤젤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나는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계속해서 진지하게 말했다.
"좋겠는 게 아니라, 당장 내일부터 하라고. 내일부터는 회사 말도 좀 잘 듣고. 그래야 회사 일이 보일 거니까."
앤젤은 자꾸 채근하는 내게 넌더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아 짜식 무슨 엄마처럼 잔소리하네."
앤젤이 진짜로 내 말을 들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나는 대홍수 전에 그에게 필요한 예언은 해 줬다.
어찌 됐든 내 몫은 다 한 셈이었다.
"자, 이제 SF 테마나 마저 보러 가자.”
그렇게 말하고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마음 편하게 디즈니랜드를 즐기기만 하면 됐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정확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다.
해외 전화를 해야 해서 미리 시간을 맞춰 둬서 다행이었다.
'어디 보자…'
나는 앞으로 있을 스케줄을 확인했다.
문루아에게 초대받아 프리이빗 비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일정이 어느새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휴가라고는 해도 매일 반나절은 운동, 발성 연습, 외국어 공부 등 항상 하던 루틴을 하다 보니 시간이 술술 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휴가 전에 할 일은 당연히 끝내야 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우선 재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국제전화로 이어졌다.
재호와 통화할 시간을 정하기는 쉬웠다.
재호는 항상 10시면 숙소로 돌아와 11시 전에 잠이 들었으니까.
딱 지금 전화하면 받을 타이밍이었다.
아마도 '따르릉' 4번 안에 말이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역시나 재호는 정확하게 통화음이 4번 울린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변태같이 루틴을 지키는 놈이었다.
"여어, 재호냐?"
수화기 너머에서 재호가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어 노을이 너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구.
"지금 어디냐?"
-아 지금은 잠깐 파나마에 있어.
"파나마? 거긴 또 왜?"
-카리브해 음악이 좀 유명하잖아. 음악 좀 배우러 왔지. 악기도 좀 사구.
프로듀싱 덕후 재호다운 휴가였다.
심지어 휴가답다고 할 수 있는 휴양지에서 지내는 셈이었다.
"그래 뭐 잘 지내는 모양이네."
-나야 늘 그렇지. 노을이 넌 어때? 또 막 남 돕겠다고 설치면서 일 키우고 다니는 거 아니야? 너 중딩 때부터 항상 그랬거덩~.
재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살짝 뜨끔했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너도 내 오지랖 덕에 산 거잖냐.'
하여튼 그런 생각은 마음속에만 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 뭐 최대한 얌전히 지내볼게. 내일부터는 문루아 선배 초대받아서 프라이빗 비치에서 한 2~3일 지내다 올 거야. 사고를 칠래야 칠 수가 없겠지?"
사실은 거기서 일을 벌이려고 하는 거지만 말이었다.
-프라이빗 비치? 문루아 선배님이 그런 거도 갖고 있어?
"아 그건 아니야…”
신기해하는 재호에게 나는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문루아 선배의 연예계 선배이자 친구인 채승아가 내게 축가를 부탁해서 그 겸사겸사해서 채승아의 부모님이 소유한 태평양 남부 섬의 프라이빗 비치에 가보기로 했다는 골자였다.
-와~ 부럽네. 그냥 호텔하고는 또 다를 거 아니야 그지?
부러워하는 재호에게 나는 '뭘 그렇게까지 그러나' 싶어 하며 답했다.
"너도 휴양지잖냐."
-나는 중남미 간다니까 좀 위험하다고 해서 TYB 직원 한 분이 나 도와주고 있어. 아마 너도 대충 어디에 있는지 배영웅 실장님이 계속 체크는 하고 있을걸?
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어. 뭐, 대놓고 하고 있지."
-그래. 나는 치안이 좀 안 좋다구 계속해서 안전 서포팅을 하더라구.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아주 자유롭진 않거덩~.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까 싶기도 했다니까? 근데 프라이빗 비치라니, 부럽지.
"뭐 대신 너는 카리브해 음악도 실컷 듣고 좋잖아.”
-TYB가 현지 음악가도 소개해 주고 하고 있어 사실.
“그래, 잘됐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는지 재호가 서둘러 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제 나 가봐야겠다. 아, 너 환희한테도 전화 할거지?
"그래."
-꼭 전화해라. 나 걔 자꾸 여자들하고 만나다가 걸릴 거 같거덩? 조심해야지… 에휴 진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그래 바로 이거 끝나면 통화해 볼게."
딸깍.
그렇게 재호와의 통화가 끝났다.
* * *
파나마의 한 해수욕장.
원재호가 전화를 끊었다. 파나마의 현지 TYB 직원이 원재호에게 말했다.
"아티스트님, 이스트 웨이브 씨를 만나러 가야 할 때입니다."
재호가 순순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이 운전하는 아우디에 탔다.
갑자기 비싼 차를 타고, 세계적인 프로듀서인 '이스트 웨이브'에게 호출받았다.
마침 그도 파나마에 음악 작업을 위해 잠시 왔는데, 음악 작업에 대해 원재호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세계 최고 히트 작곡가의 초대니, 프로듀서인 원재호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참… 노을이 덕분에 별 경험을 다 하네.'
원재호는 알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잡은 것은 권노을 덕분이었다.
권노을이 이스트 웨이브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한국 오디션 '킹 오브 싱어'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이스트 웨이브는 촬영이 끝나고, 권노을의 모든 노래를 다 들어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곡에 편곡에 참여한 재호에게도 관심이 생긴 것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며 원재호는 피식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노을이 이 녀석. 노래 하나는 진짜 천하무적이란 말이야. 그 노래로 대체 어디까지 기적을 만들지…”
* * *
"휴우..."
숙소에서 환희와 통화를 끝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환희는 허튼짓하지 않고 충실하게 힙합 댄스 페스티벌, 디제잉 페스티벌, 록 페스티벌 등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가수들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투로 보아 생각하건대 환희는 지금 음악에 푹 빠져서, 당장은 여자를 꼬시거나 할 틈은 없어 보였다.
하긴 일본어를 할 때의 환희는 그야말로 애니 덕후였다.
여성이 그에게 붙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환희가 무서운 건 영어로 말할 때였다.
대부분 환희가 여자가 꼬일 때는 영어로 말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일본에 있는 한 환희는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 짜식, 근데 마지막에 그런 느끼한 말을 다 하고.‘
[형, 페스티벌에 별의별 세계적인 가수들이 다 왔는데요. 형보다 딱히 노래 잘하지 않던데요? 형이 최곤거 같아요.]
환희, 아니 하늘이가 빈말이라도 그런 말을 해주니 나는 쑥스럽기도 하면서 뭔가 뿌듯했다.
아무튼 멤버들이 현재, 제대로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이제는 내가 내일 할 일을 확인할 차례였다.
마지막 통화는 노자경과 할 차례였다.
-여보세요.
"네, 자경 님, 권노을입니다."
-아, 그래요, 노을 씨!
노자경에게 이전에 만나서 부탁했던 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 말씀드렸던 건 찾으셨나요?"
-그래. 어제 구룡도 가서 찾아왔어요. 노을 씨 말대로 그대로 있던데.
"됐군요."
노자경은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거, 대체 어디서 찾은 거야, 노을 씨?
"그건, 비밀입니다."
-비밀?
되묻는 노자경에게 나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소인중을 싫어하는 건… 자경 님만이 아니라고만 해두죠. 사진 자료 디지털 파일로 메일로 전달 주세요."
-오케이.
그렇게 나는 노자경과의 통화를 끝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소인중과의 악연을 끝낼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