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소인중의 몰락의 계기가 된 사건은 마약 사건이었다.
여기에 탈세 수사가 더해지면서 치명타를 맞았다.
이후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거지꼴로 도산했다 들었다.
일단 내가 소인중을 마약사범으로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탈세 관련 고발도 무리였다. 나는 수사관이 아니었다.
다만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것은 소인중이 몰락하자, 비로소 소인중이 몰래 찍었던 여성들과의 19금 사진들이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던 일이었다.
언론을 막던 소인중의 지배력이 악화되자 바로 사진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19금 사진을 찍은 것은 크나큰 범죄지만, 마약사범이나 천문학적 탈세에 비해 잡기 쉬웠다.
이 사진 유출은 아주 사소한 건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걸… 신부 아버지에게 가져다준다면 그걸로 게임 끝이었다.
최소한 결혼은 파투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루아가 소개해준 소인중의 약혼녀의 아버지는 좀 특수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소인중의 실체에 대해 알려주면 일은 더욱 커질 터였다.
그리고 바로 그게 내가 바라던 바였다.
* * *
1시간 후.
문루아 선배와의 통화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네네, 선배 감사해요. 다음 주에 거기서 봬요. 네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문루아 선배와 통화하며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축가를 하기 전에 신부와 신부 가족을 한번 볼 수 있겠느냐고 넌지시 물어본 것이었다.
다행히 문루아는 큰 의심하지 않고 승낙받아 주었다.
문루아의 친구이자 소인중의 약혼녀의 이름은 채승아였다.
그녀는 당대의 인기 스타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굴지의 건설 재벌가의 따님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침 문루아는 채승아와 함께 다음 주에 채승아 집이 소유하고 있는 프라이빗 비치에서 휴가를 보낼 예정이라 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물어본 덕에 두 사람의 휴가에 껴서 1박 2일을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날, 내 소개만 하고 끝내려는 건 아니었다.
그날은 소인중의 실체를 채승아에게 알려주는 날이 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3일 후, 나는 구룡도에서 볼일을 끝내고 다시 도쿄에 들렀다.
"이거, 뭐, 말이 휴가지, 평소보다 더 바쁘잖아?"
나는 볼멘소리로 투덜댔지만, 내가 하겠다고 먼저 시작한 일이니 이제 그만둘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인 모두를 위한 일이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내가 도쿄에서 할 일은 딱 하나였다. 앤젤을 만나서 미리 경고하는 일이었다.
곧 소인중이 무너질 테니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었다.
'무슨 방주를 만들라고 노아에게 경고하는 하나님이 된 느낌이네.'
나는 그렇게 약간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앤젤과의 약속 장소인 도쿄 디즈니랜드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지하철역부터 디즈니랜드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지하철에서 서서히 걸어오다 보니 입구에 앤젤이 보였다.
나를 알아본 앤젤이 건들거리며 인사했다.
"어어~ 왔어?"
"너 얼굴 안 가리냐? 너 방송도 많이 하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앤젤에게 얼굴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나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철저하게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니네보다 백배는 많이 한다, 야! 뭔, 도마다 하는 지방방송까지 다 훑고 있어."
넌더리를 내는 앤젤에게 내가 되물었다.
"근데 그러고 다녀도 되냐?"
"메이크업 안 하면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나는 뻔뻔하게 말하는 앤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그전까지 남자 놈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 좀 다르긴 하네.”
활동 중에 앤젤은 중성적인 느낌을 줬다.
장발에 길게 내린 머리, 컬러렌즈, 가부키가 연상되는 새하얀 메이크업까지.
모두 인공적이면서 여성스러웠다. 약간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 연상될 정도였다.
평소의 앤젤은 긴 머리를 똥머리로 묶었고 안경을 착용했다.
아무런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피부는 생각보다 탄 상태였다.
과연, 이를 보고 평소에 앤젤을 떠올리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의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내츄럴한 비원더와 달리 잇츠쇼타임은 바로크 의상에 가까운 화려하게 프릴이 달린 옷을 입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평상시의 앤젤은 후줄근한 흰 티에 헐렁한 면바지 차림에 쪼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하긴 모르고 보면 헷갈릴 만했다.
자기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는 내게 앤젤이 비아냥거리듯이 내게 물었다.
"니네들은 거의 메이크업을 안 하더라? 원판 좀 반반하다고 너무 믿는 거 아냐, 니들?"
"아니,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발라드 가수니까 자연스러운 게 좋겠다 싶었던 거지."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앤젤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그거도 편견이야. 잘생기면 좋은 거지. 좀 꾸며."
"너한테나 할 말이다. 지금 몰골이 뭐냐? 티셔츠가 너무 후줄근해서 걸레로 써도 되겠다."
그렇게 나는 앤젤에게 틱틱대면서 꽃밭을 지나 디즈니월드로 향했다.
앤젤이 툴툴거리며 나를 따랐다.
"근데 웬 디즈니랜드야? 애도 아니고오."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무작정 앞장서며 말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디즈니랜드를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왕이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일행이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앤젤을 데려온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지난번 대화를 통해 나는 앤젤의 슬럼프를 느꼈고, 이를 해결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디즈니랜드를 걸으면서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야~ 꽃밭 봐라.”
꽃 하나하나가 화려한 색감으로 디테일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색깔의 꽃이 합쳐지니 마치 파이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뭔 여자애처럼 꽃 보고 우와 거리고 있어.”
앤젤은 여전히 틱틱거리고 있었다.
"야, 모처럼 디즈니랜드에 왔는데 뭐 하는 거야. 분위기를 띄워야지. 안 되겠다, 너. 벌을 내려야지."
지지 않고 그에게 틱틱대는 나를 째려보며 앤젤이 말했다.
"뭔 벌을 내려어~너!"
"너를 디즈니 머리띠형에 처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근처 기념품 상점으로 달려갔다.
나는 귀여운 호랑이 머리띠를 사 와서 앤젤에게 씌웠다.
안경 낀 시커먼 백수 같은 녀석이 디즈니 캐릭터 머리띠를 씌우자 제법… 봐줄 만하지 '않은' 몰골이 됐다.
"얌마, 뭐 하는 거야? 너어?"
눈을 부라리며 위협하는 앤젤을 보고 나는 그만 박장대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야, 어차피 오늘은 디즈니랜드에서 하루 종일 있을 거니까 즐기라고!”
디즈니랜드는 사실 우리가 아는 다른 놀이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이기구가 더 짜릿하다거나, 건물이 더 휘황찬란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종업원들의 옷부터 건물의 색감과 장식, 심지어 식물과 바닥의 벽돌 하나까지 모두 디즈니의 '테마'에 잘 정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디즈니 세상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신까지 우리를 도왔다.
하늘이 너무 맑으면서도 바람이 적당히 불어서 청량하기까지 했다.
딱 야외를 걷기 좋은 날씨였다.
"...좋긴 하네."
급기야 공주가 사는 성 앞에 선 앤젤도 빈정거리는 걸 멈추고 솔직하게 감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디즈니랜드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환상의 나라를 지나 서부 개척지대까지 찬찬히 살펴보고 놀이기구도 몇 개 본 후, 우리는 공주의 연회장과 똑같이 생긴 레스토랑에서 점심까지 먹은 후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앤젤과 나는 벤치에 잠시 앉아서 느긋하게 공기를 만끽했다.
앤젤 또한 '아이고고고' 하고 영감님과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벤치에 앉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토끼 모양 풍선까지 들려있는 상태였다.
내가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앤젤에게 넌지시 물었다.
“막상 오니 좋지?”
"어릴 때 생각도 나고 괜찮긴 하네."
'흠'하며 동의하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여기서 저쪽으로 가면 SF 테마야. 그쪽도 재미있을걸."
"야, 저기 또 팝콘 있네. 저건 또 케이스가 다른데? 와… 지독한 놈들.”
이곳에서 팝콘을 먹으려면 케이스를 사야 했다.
이 케이스에 디즈니 캐릭터가 들어 있어 귀여웠다.
나는 아까 산 팝콘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으며 앤젤에게 물었다.
"야, 게다가 팝콘 맛이 좀 다르지 않냐?"
"그러네? 여기는 파슬리 맛인데? 다 먹으려면 전체를 다 돌아야 하는 거 아냐?"
우리가 산 팝콘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앤젤은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새로운 팝콘 케이스가 있는 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사보자.”
“그래. 야… 이렇게 돈을 갈퀴로 벌어가네. 무서운 놈들…"
"뭐 이렇게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도 다 디즈니의 추억이 묻어 있으니까 기분이 나쁘지 않잖아?"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투덜대던 앤젤이 내 말에 표정을 풀며 끄덕였다.
"그건 그래.”
앤젤과 나는 새로 산 팝콘을 먹으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너, 소인중이 노래 안 시킨 거 아니지?”
"뭐... 뭔소리야! 당연히 걔가 안 시킨 거지."
나는 당황하는 앤젤을 뚫어져라 보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뭔 소리야!"
앤젤은 점점 언성은 높였고, 그에 반해 나는 차분함을 유지하며 응했다.
“'소울메이트' 촬영 때, 너 노래 못했잖아.”
앤젤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아직도 마음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컨디션이 어쩌다 안 좋았던 거지!”
앤젤의 격양된 목소리에 나는 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유미 MC는 가수를 부르면 무조건 노래를 시켜. 댄스 가수도 아니고, 너나 나처럼 가창력으로 알려진 가수면 당연히 더 그렇지. 근데 네가 프로답지 않게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고?”
사실은, MP3의 도움을 슬쩍 받았다.
정말로 앤젤이 컨디션이 노래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으면 살짝 회복을 도와주려 했다.
그런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신체적으로 앤젤은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그런데도 노래를 못 한다면, 어떤 정신적인 슬럼프가 그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어진 앤젤은 입을 닫았다.
“으윽…"
그 사이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바로 옆의 광장이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백인 4인조 밴드가 자리를 잡고, 카피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창 유행하던 팝 펑크 곡을 부르는 카피 밴드였다.
그 밴드의 노래와 연주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유명 팝 펑크 스타들의 노래와 연주를 흉내 내고 있는 전형적인 카피 밴드였다.
그들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에이브릴 라빈 닮았네.”
"내 꼴이 딱 저래."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앤젤을 나는 한쪽 눈을 치켜올리며 뭔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음?"
맨날 남을 비판하던 앤젤이 처음으로 자기 신세 한탄을 내 앞에서 시작했다.
"내 꼴이 딱 저렇다고. 남 따라 하는 꼴이야.”
"네가 모창 가수는 아니잖아?"
"그거나 마찬가지지. 이스트 웨이브 말 못 들었어?"
그렇게 말하고는 앤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앤젤은 나와 함께 가면 오디션 '킹 오브 싱어'에서 경쟁했다.
그때 세계적인 프로듀서 이스트 웨이브가 앤젤에게 냉정한 평가를 했었다.
'누군가를 따라 하는 거 같다'라는 코멘트였다.
“그걸 지금까지 담아두고 있었어?"
앤젤은 내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이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또다시 언성을 높였다.
"평생 가지 그게! 니는 평생 안 가냐? 하여간 가해자는 기억을 못 한다니까."
"내가 왜 가해자야?"
"너는 칭찬 들었으니까 가해자지 인마! 나는 완전히 쩌리가 됐다고오!"
앤젤이 드디어 터놓고 자기 슬럼프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스트 웨이브에게 차가운 피드백을 받은 후에 앤젤은 자신의 노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자신 있게 불렀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됐다.
누군가를 따라 하고 있다는 이스트 웨이브의 말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앤젤이 자기 노래를 부르지 못하자, 소인중은 궁여지책으로 앤젤의 노래를 다른 목소리를 섞어 녹음하고 립싱크를 시킨 셈이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앤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소인중 대표가 너한테 딱히 크게 잘못한 건 아닌 셈이네?"
이번에도 앤젤을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내 쪽으로 쭈욱 내밀며 따지듯 말했다.
"뭔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걔... 아니 사장이 나한테 얼마나 개같이 굴었는데! 이딴 식으로 하면 자르겠다는 협박부터 폭력까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른 놈이면 바로 경찰서야.”
나는 이미 노자경에게서 들어서 소인중이 얼마나 폭력적인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인중의 문제와는 별개로, 앤젤에게 슬럼프가 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매일 깡소주나 깠던 거네. 노래 부심만으로 살았던 놈이 노래를 못 하니."
"그래, 노래 못하는 앤젤이 무슨 앤젤이냐? 그냥 날파리지. 니이미. 아! 또 술 땡기네.”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푹 쉬는 앤젤을 잠깐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술은 도망가는 거지.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게 내 맘대로 되냐? 남의 걸 베끼는 놈이 갑자기 다르게 바뀌겠어?"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묻는 앤젤에게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힌트가 있잖아, 바로 여기에.”
"여기?"
앤젤이 주위를 둘러봤다.
"뒤져봤자 뭐가 나오겠냐. 걍 디즈니랜드지.”
핀잔주듯 말하는 내게 앤젤이 또다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다 이유가 있어서 너를 여기에 데려온 거지.'
대답 없이 나는 마지막 남은 팝콘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사삭.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