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훌쩍거리고 있는 앤젤에게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뭐 하세요?”
"신경… 꺼… 끄윽..."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일단 나는 말 없이 그의 테이블에 슬쩍 앉았다.
앤젤은 말과는 달리, 누군가 이야기할 상대가 생겨서 기분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하는 말은 대개 투덜댐이었지만 말이었다.
"에휴. 내가 가수 하려고 했지. 배우 하려고 한 거도 아닌데. 무슨 염병할 연기를 하라 그래가지고. 빡 돌았잖아.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센 걸루!"
'앤젤이 원래 성격이 이랬나?'
그는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입은 평소에 내게 말했을 때보다 더 거칠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얄밉지 않았다.
내가 슬며시 앤젤에게 물었다.
"무슨 연기를 시키는데요?"
"야야, 동갑이잖아 말 놔. 나만 반말 까니까 나만 버릇 나쁜 새끼 같잖아?"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앤젤에게 답했다.
"뭐 그렇긴 하죠."
"아아~. 나 삐져버린다? 반말 하라고오~."
시큰둥하게 답하는 내게 앤젤이 늘어지는 말투로 투정 부렸다.
'...술 먹으니까 아예 다른 성격이 나오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하지만 지금의 앤젤의 모습은 딱히 싫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반말 그까짓 거, 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연기를 시켰는데? 립싱크 말이야?"
"어어! 아니, 난 가순데에~. 노래하지 말라는 거야. 노래하는 척만 하라고. 말이 되냐? 아니 그럼 날 왜 데려왔어! 그냥 배우 시키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응석 부리는 것처럼 내게 찡얼대는 앤젤을 보며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러니까. 뭐 다 좋은데… 왜?"
"몰라! 내 노래가 맘에 안 드나 보지. 뭐 요상하게 노래를 바꿔놨어."
한참 푸념을 털어놓은 앤젤이 목을 소주로 축였다.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앤젤의 모습이 왠지 이전보다는 마음이 편해 보였다.
나도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은근히 재미있었다.
내 불행이 아니어서도 그랬지만, 내가 겪을 수도 있는 불행이라서도 그의 불만이 크게 느껴졌다.
소인중은 적극적으로 내게 구애한 제작자였다.
그는 경력도 좋으니 내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앤젤의 자리에 내가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느껴지던데? 너희 신곡. 목소리가 좀 달랐어."
내 말에 앤젤은 이때다 싶었는지 언성을 높이며 하소연했다.
"그지? 아~ 대표 그 양반은 자아꾸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아니! 다른 목소리인데 어떻게 모르냐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노래에 어떤 짓을 한 거지?"
소인중이 뭘 했는지 좀 궁금하긴 했다.
"여자 목소리를 좀 섞었어."
"여자 목소리를...?"
앤젤의 답에 의아해진 내가 말끝을 흐리며 묻자, 그는 말을 이었다.
"어어, 고음에 섞었다고. 아주 사아알짝. 애매하게."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너도 들었잖아? 고음이 조금 더 얇아지지."
나는 '얇아지면 뭐?'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의미가 있나?"
앤젤은 성질이 난 듯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몰라. 난 내 노래가 좋아. 고음이고 나발이고 내 스타일로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게 좋다고.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준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게 해주겠다 해서 왔더니 잔소리만 많고. 비원더 너희들보다 딱히 성적이 크게 좋지도 않고. 완전 코 꿰였어, 그냥! 아~ 내 신세~. 이모! 여기 한 병 더요!"
"하긴 뭐. 나도 내 노래에 남의 노래 섞어서 내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네."
나의 맞장구에 더욱 상기된 목소리로 앤젤이 탁자를 탕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 목소리가 아니면 뭔 소용이야. 근데 더 답답한 게 뭔 줄 알어?"
"뭔데?"
"딴 애들은! 좋다는 거야! 아니, 노래 안 해서 편하고, 인기는 그대로고, 일본 여자애들이 우리 좋다고 막 쫓아다니니까 좋지 않냐네. 아니! 여자 꼬시려고 가수를 하냐? 여자 꼬시려면 부킹을 하라고오~."
눈을 희번덕이며 흥분한 앤젤에게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생각해보면 소인중이 크게 잘못한 건 없을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잇츠쇼타임은 인기와 명예를 얻었다.
우리와 달리 한국 음악방송 1위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그에 근접한 성과를 거뒀다.
그들의 일은 아시아에서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오리콘 차트 성적은 우리보다 근소하게 우위였고, 중화권에서는 제작자 소인중의 인맥으로 비원더보다도 탄탄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 연예인으로서 보면 잇츠쇼타임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다만 그러면서 가수들의 노래에 대한 자존심, 음악에 대한 자존심을 팔아야 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자존심을 쉽게 팔 수 있는 녀석들에게는 좋은 직장일 수도 있었다.
앤젤을 제외한 나머지 잇츠쇼타임 멤버들처럼 연예인의 지위와 인기만 누리고 싶다면 말이었다.
하지만 앤젤처럼 자기 음악에 자부심이 있는 녀석이라면, 지옥이 따로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나도 딱 앤젤과 동류의 인간이었다.
“나, 너 싫지 않아."
살짝 낯 간지러운 내 말에 앤젤이 헛웃음을 날렸다.
"큭, 웃기는 놈일세 이거. 소주 반병 먹고 그런 닭살 돋는 말을 다 하냐? 나 남자 안 좋아해!"
농담이 나올 정도로 기분이 풀린 앤젤에게 내가 핀잔주듯 말했다.
"머릿속에 그런 거만 들었냐? 나도 네 마음에 공감한다, 뭐 그런 거지."
"그래! 가수가 말이야 쫌 쫀심이 있어야지. 여자들이 쫌 좋아한다고 헤벌쭈욱하고, 그건 아니지이~.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 길게 안 하는 건데."
내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자, 앤젤을 더욱 신이 나서 속마음을 털어놨다.
"계약 기간이 기냐?"
"아직 6년도 넘게 남았지이~! 햐 그걸 어찌 지내냐, 진짜."
그렇게 점심 식사로 시작했던 자리가 자연스럽게 낮술로 바뀌면서 해가 질 때쯤에야 자리가 끝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앤젤이 걱정되었다.
"야 근데 앤젤 너. 이렇게 오후부터 술 먹고 그래도 되냐?"
혀 꼬인 소리를 내며 앤젤이 나를 비웃었다.
“지이는~.”
상대적으로 앤젤보다는 멀쩡한 말투로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아, 나는 휴가야. 지금부터 한 달."
"야아~ 휴가도 있어? TYB 참 좋네에. 우리는 그런 거 없어.”
앤젤의 이 말에 의아해진 나는 물었다.
"근데 어떻게 나왔어?"
다시 욱한 그가 고개를 거세게 내저으며 말했다.
"휴가가 따로 있냐 시팔! 일 없으면 그냥 내 맘이지. 슬쩍 매니저 따돌리고 나왔어."
“다른 멤버들은?”
"걔네들은 회사 좋다고 얼씨구야 하고 일 잔뜩 받았지. 무슨 리포터 같은 연예인 일거리들."
“너는 거절했고?"
내가 계속 관심을 보이자 앤젤은 취기에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말했다.
"노래도 못 하게 하는데 입을 털라고? 에에이~. 그냥 안 하고 말어."
아무래도 소인중은 점점 말을 안 듣는 앤젤의 비중을 줄이고 다른 잘 생기고 말 잘 듣는 예스맨 멤버들의 비중을 키우는 듯했다.
다른 멤버들은 예능으로 돌리고, 앤젤은 방치했다.
노래는 어차피 슬쩍 다른 목소리를 덧붙이면 되니까.
립싱크 위주면 앤젤의 비중이 적어도 큰 문제도 없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앤젤에게 물었다.
"일본에 계속 있을 거야?"
"애들 보기 쪽팔려서 한국에는 못 있겠더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는 앤젤을 향해 내가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탁, 튕기며 소리쳤다.
"립싱크하고 그러는 거!”
"그렇지이~."
"그래 뭐. 그럼 계속 도쿄에 있을 거면 메일 주소나 줘라. 다음에 또 밥이나 먹자."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앤젤이 씨익 웃고는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좋지이~. 나는 오전 트레이닝만 빼곤 언제든 도망쳐도 되니까. 연락만 해."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앤젤을 보며 무슨 교사에게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나는 앤젤과 헤어지자 술이 확 깼다. 애초에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지만, 술이 깬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경각심이 생겨서였다.
나는 앤젤과 성격이 비슷했다. 내 노래에 대한 자존심은 팔 수 없었다.
설사 제작자가 나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해도 내 목소리를 건드린다거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도 못 부르게 한다거나 하면 정말 크게 좌절할 것 같았다.
소인중에게서 제작을 받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게다가 앤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소인중의 사업은 사상누각이었다.
앤젤은 앞으로 6년간의 계약을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쨌거나 곧 앤젤은 망할 운명이었으니 말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MP3로 확인해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소인중의 사업은 앞으로 딱 1년 남았다.
그의 사업은 2007년이 지나면 마약 파동에 휩쓸려 무너질 운명이었다.
'이거면… 된 거겠지? 아마도?'
내가 뭔가 개운하지 못한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였다.
이번에는 익숙한 전화가 왔다. 배영웅 매니저였다.
휴대전화의 통화 목록을 보니 배영웅 매니저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4통도 넘게 와있었다.
앤젤과 술 마시다 깜빡 놓친 모양이었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실장님, 죄송합니다. 전화를 놓쳤네요."
수화기 너머 걱정스러운 배영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했잖아요, 노을 아티스트님! 어디세요? 아직 일본이죠?
"네 도쿄입니다."
-평소처럼 숙소에서 잘 거예요?
"아니요. 그건 좀 그래서… 오늘 사실 서울 집으로 갈까 했는데요."
-그럼 조금만 있다가 내일 가요. 오늘 노을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물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요?"
* * *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문루아였다.
그녀는 배영웅과 함께 숙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어쩐 일이세요? 그냥 연락하시지."
내 질문에 문루아는 자리에 앉은 채로 답했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스케줄 있나 검토해 보려고 실장님께 먼저 연락했어요. 앉아요, 앉아요."
맡은 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는 문루아에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네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이 차암, 뭐 투어하고 바쁘죠. 정신없어요. 지금도 술 먹으면 안 돼요. 딱 식단에 맞는 음식만. 그래서 숙소에서 기다렸어요."
조금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문루아 옆에서 배영웅이 무덤덤하게 말을 거들었다.
"노을 아티스트님은 편하신 대로 시켜 드셔도 돼요."
"아 괜찮습니다. 저도 선배랑 같은 거 먹을게요."
사실 앤젤과 함께 점심을 워낙 잘 먹어서 딱히 식사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혼자만 먹지 않고 멀뚱멀뚱 있기가 좀 그래서 나는 두부에 샐러드를 시켜 먹으면서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문루아는 내게 부탁이 있어서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그 부탁이란 게… 좀 독특했다.
"축가 요청이요?"
문루아가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신부가 제 친구인데. 비원더 노래, 그중에도 노을 씨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 팬이에요. 그래서 꼭 노을 씨가 축가를 불러 줬으면 한대요. 비용도 지급할 거예요."
"네. 그런 거야 뭐, 실장님이 알아서 해주실 테니까..."
흔쾌히 문루아의 부탁을 수락하고 배영웅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예의 바른 초승달 모양의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오케이'라는 뜻이었다.
문루아가 또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장소가 좀 멀어요."
"한국이 아니에요?"
내 물음에 문루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구룡도에서 결혼식을 할 거예요."
"어이쿠."
"그래서 부탁이라고 한 거예요."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문루아 대신 배영웅 매니저를 보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실장님?"
배영웅 실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침 휴가 시니까요. 노을 아티스트님 자유죠.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그날 하면 좋지 않냐고 하셨고… 괜찮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저도 사실 구룡도에 다시 가보고 싶긴 했어요. 방송 촬영 때문에 제대로 다 둘러보지 못했으니까요."
문루아가 기뻐하며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와아~ 그럼 된 거예요?"
“근데 선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아니에요?"
뭔가 수상함을 느낀 내가 묻자, 문루아의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졌다.
심지어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왜, 왜요?”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선배 뭔가 숨기는 거 같은데요."
"아… 저… 그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문루아 대신에 음식을 치우며 배영웅 매니저가 말했다.
"신랑이 조금… 특별한 사람이더라고요."
“신랑이요?”
나는 신랑이 누구인지 문루아에게 듣다가 먹던 음식을 도로 뱉을 뻔했다.
...소인중과의 결혼이라고 했다.
일단 당황한 건 나였다. 소인중은 마흔 살 정도는 되지 않았던가?
"그 사람 아직 결혼 안 했어요?"
문루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혼했다고는 들었는데… 지금은 미혼 맞아요."
"그 사람, 소문 안 좋은 거 알잖아요? 선배도 이탈리아에서 본 게 있고! 범죄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인데."
내가 만류하듯 말하자 문루아는 억울해하며 소리쳤다.
"저도 말렸어요! 근데 걔가 좋다는데 어떻게 해요!"
"아이고…”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나는 축가 의뢰를 받았다. 결혼을 축복해줘야 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나는 신랑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1년 안에 쫄딱 망할 거란 것까지 알았다.
'이걸 대체, 어쩌란 말이냐!'
나는 난감해하며 우선 문루아에게는 '생각해보겠다'라고만 말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건 배영웅 실장과도 상의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천채왕과도 안 됐다.
‘제가 미래를 알고 있는 회귀자인데요, 저 신랑이 곧 망해요. 어쩌죠?'라고 상담할 수는 없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고민한 끝에,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일단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서 그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게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