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다음 무대는 바로 잇츠쇼타임이었다.
그들은 뭔가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긴장한 탓이라 보기에는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환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표정이 엄청 안 좋은데요?"
나도 환희의 말에 동의하며 잇츠쇼타임을 주시했다.
"그러게."
잇츠쇼타임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명불허전, 그들의 테크닉은 기가 막혔다.
여전히 멤버 3명의 호흡은 개판이었지만 그건 큰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각 멤버의 테크닉만 전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전에 내가 알던 잇츠쇼타임의 노래와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계속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슬쩍 쳐다봤다.
다들 나와 같은 느낌을 받지는 못한 듯했다. 재호가 한숨 쉬며 말했다.
"참 저놈들 노래는 기가 막혀. 인정하기는 싫구. 근데 잘하는 건 사실이구."
재호의 말에 환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자여! 사실 우리에게 테크닉 끝판왕 노을 횽이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되게 노래 못해 보이게 느껴졌을 거 같아여. 우리 노래에 워낙 기교를 부려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침 잇츠쇼타임의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고음 애드립의 향연이었다.
그들의 온갖 애드립을 들으며 재호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으 부담스러워. 나는 저런 노래는 별로거덩? 무슨 서커스도 아니고."
"마자여, 횽."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잇츠쇼타임의 노래를 듣고 있는 재호와 환희 사이에 내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저…. 얘들아 좀 이상하지 않아?"
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여?"
"그러니까 노래가 좀, 다르지 않냐? 얘네들 노래가 아닌 거 같은데?"
내 질문에 재호랑 환희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환희가 내게 물었다.
"쟤네 노래잖아여? 근데 뭐 쟤네 노래냐 아니냐 할 게 이써여?"
"아니 근데 목소리가 다르잖아."
내 말을 듣고 재호도 뭔가 이상했는지 눈을 감았다.
집중해서 듣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10초 정도 들은 후 재호가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잇츠쇼타임 맞거덩? 재수 없을 정도로 과시적인 보컬. 우리가 알던 앤젤이잖아.”
나는 이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분명 고음이 좀 더 '쨍' 해졌는데. 미묘하게 음색이 달라지는 거 같은데. 하 참 미치겠네."
하지만 또 끝 음 처리나, 대다수 중저음 부분에서의 목소리는 분명히 잇츠쇼타임의 그것이었다.
'언어가 달라져서인가? 아니 그건 이상해. 언어가 달라지면 분명 발음이 달라지지. 나도 그걸 신경 써서 일본어로 노래 부를 때는 더 각별하게 조심하고 있고.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달라.'
그냥 평소 그들의 것과는 아예 다른 음색이 튀어나왔다.
교묘하게 미디로 만져 놓은 데다가 고음에서만 써서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평소 잇츠쇼타임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 모양도 뭔가 소리랑 안 맞았다. 아주 미세하게 차이가 있었다.
이 점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손을 치켜들어 잇츠쇼타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봐봐. 소리하고 입 모양이 다르잖아?"
"음?"
이번에는 재호와 환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발음이나 박자가 멤버들의 입 모양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 모습을 본 환희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맞네여? 아니 무슨 댄스그룹도 아니고. 발라드 그룹이 라이브를 안 해여?"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노래 실력이 줄었을 리는 없어."
분명 잇츠쇼타임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너를 잊을 수는 없겠지만
영원토록 사랑할게
이별마저 채울게
지워질 순 없겠지만
앤젤의 마지막 화려한 고음이 어째 애처롭게 느껴졌다.
* * *
다음 날, 나는 혼자서 잇츠쇼타임의 노래를 계속 들어봤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MP3를 켜봤다. 왠지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거의 MP3를 안 썼네.’
솔직히, 오디션에서 우승한 뒤로는 MP3를 기피한 게 사실이었다.
가수의 길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이상 내 힘으로도 이제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이런 힘에 중독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남에게 이 MP3를 들키면 안 되니 항상 내 몸에 소지하고 다녔다.
요새는 거의 기사를 살펴보고, 회복하는 용도로만 mp3를 활용했었다.
'빈 서판의 잠재력'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무리 해도 이제는 더는 스탯이 쉬이 오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MP3를 켜야 한다는 느낌이 왔다. 이미 내게는 뭔가 초자연스러운 능력이 들어온 상태였다.
나는 이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반년 만에 화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새로운 특성이 개방되었다.
-무사이의 통찰력-
등급: S
설명
: 누군가의 음악을 듣고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깨달을 수 있다.
: 해당 능력은 노래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연주에 해당한다.
: 어느 수준까지 그 누군가의 마음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지는 시전자의 상태에 달려 있다.
"흠..."
MP3 화면에 나오는 내용을 유심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뭔가 좋다고 생각하면 엄청 좋고, 나쁘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능력이었다.
나는 가수지 프로듀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약간씩은 이런 능력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내게는 그 통찰력이 조금 더 날카로워진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당장 큰 도움이 되느냐를 떠나, 일단 잇츠쇼타임의 상태에 대한 내 직감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 직감을 믿을 것. 그것만으로도 제법 큰 수확이었다.
'이제 다시 MP3 침묵기가 끝나나?'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MP3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 * *
그날 밤.
오랜만에 천채왕이 작지만 제법 멋진 바를 통째로 대관했다.
비원더의 일본 싱글 1집 오리콘 차트 진입 축하 식사였다.
비원더 멤버들과 김나리, 배영웅, 그리고 천채왕이 합석했다.
천채왕이 기분 좋게 건배사를 전하고 모두 축하주를 마셨다.
환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좋은데여… 저희 차트 1위도 못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천채왕이 환희에게 단호히 말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일본에서 깜짝 스타는 거의 없어. 로컬 음악 씬도 강하고. 장르 씬도 강하고. 서서히 달궈지는 곳이야. 대신 한번 잘 되면 쉽게 빠지지도 않지. 차트인 한 정도면 잘한 거야."
나는 일단 순순히 축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천채왕은 그런 나를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루아도 오고 싶어 했는데. 한참 투어 중이라 못 오게 됐어. 다음 기회에 하지 뭐."
"아, 아직도 일본 투어 신가요?"
내 물음에 천채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지금은 동남아 투어야. 너희들 방송 봤어?”
"아, '비원더 식당'이요."
내가 맞장구를 치자, 천채왕은 조금 흥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시청률도 좋았지만, 구룡도에서 루아가 깜짝 공연한 덕분에 루아 공연도 홍보 잘 됐더라? 도움 주려고 했는데 도움을 받은 꼴이 돼버렸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비원더 식당은 예능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특히 재호를 향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연대 스펙으로 주목받던 보컬리스트가 심지어 요리까지 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니 그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나는 살짝 샐쭉해진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뭐 내 인기도 치솟기는 했지. '킹 오브 싱어'랑 비원더 식당 기습 콘서트를 통해서.'
다만, 예능의 인기와는 달리 가수는 콘서트와 음악방송 외에는 딱히 내 활동이 크게 많아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감이 잘 안 왔다.
우리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천채왕은 입이 근질근질한지 자꾸 바 주변을 서성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천채왕이 나를 보며 답했다.
"어, 그래, 노을아."
"뭐 하시고 싶은 말 있으신 거 아니세요? 자꾸 주변을 왔다 갔다 하셔서."
"아, 그게..."
내 물음에 주저하는 천채왕을 보며 환희도 거들었다.
"말해 주쎄여, 쌤."
재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3명이 모두 눈치챈 걸 확인한 천채왕이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사실… 이건 축하지만 진짜 선물은 아니야. 선물이 따로 있다."
갑자기 선물이라고 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와인? 자동차? 집? 아니 집은 좀 오버인가?
우물쭈물하며 천채왕이 입을 열었다.
"바로… 휴가다."
휴가.
그러고 보니, 물건은 그냥 활동을 더 해서 우리가 사도 됐다.
어차피 돈 벌면 그걸로 사면 되는 거니 말이었다.
우리에게 진짜 소중한 건 휴식이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건 기간이었다.
“한 달간 휴식이야."
천채왕의 말에 깜짝 놀란 내가 물었다.
"한 달이나요? 너무 긴 거 아닐까요?"
한 달이나 휴가라니, 거의 학창 시절 방학보다 긴 수준이었다.
천채왕이 좋아하기는커녕 걱정하는 우리를 보고 허허 웃었다.
"휴가를 줘도 무서워하네.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지?”
그의 물음에 우리 셋은 연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죠."
"잊혀질 꺼 가타여."
"돌아왔는데 자리가 없어질 거 같구..."
우리 셋의 의견을 다 들은 천채왕이 싱긋 웃으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이미 재호는 한국의 웬만한 예능에 출연분을 한 달간 비축해 두었다.
환희 또한 일본 예능을 계속 출연 중이었다.
"...게다가 노을이는 킹 오브 싱어 방송 여파로, '킹 오브 싱어' 음원이 계속 큰 인기야. 한 달 정도 활동 안 해도 셋 다 한국 대중으로서는 옆에 있는 느낌이야. 약간 쉬는 게 좋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내가 불안했다. 다른 두 명만큼 예능 출연이 잦지는 않았으니 말이었다.
내가 쭈뼛거리며 천채왕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 달이나 쉬어도 될지..."
내 말을 들은 천채왕이 웃으며 말했다.
"비원더는 창작자잖아. 충전을 해야지. 이제 일본 싱글도 계속 나올 거고. 한국에서도 정규 2집 내야 하는데 그냥 앨범만 내서 되겠어? 좀 쉬어야지."
그 부분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천채왕의 말이 맞았다.
나야 보컬리스트니 노래 연습을 꾸준히 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재호와 환희는 또 상황이 달랐다.
둘은 가사를 쓰고, 곡을 쓰고, 편곡을 하는 사람이었다.
창작을 위해서는 뭔가 계속 인풋이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휴가 기간이 필수라는 천채왕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가 있었다.
"저는요?"
나는 딱히 할 게 없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지 곡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 질문에 천채왕이 웃으며 답했다.
"노을이 너 주변에 축제나… 축가나… 이런 제의 안 들어와?"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엄청나게 오죠. 하나 하면 다 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어요."
심지어 환갑잔치, 돌잔치에서도 부탁이 오는 판이었다.
지금까지는 활동이 너무 바빠서 그걸 명분으로 모두 피하고 있었다.
일단은 가수 생활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채왕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축가 같은 거도 한 번쯤 해보는 것도 좋아. 어찌 됐든 새로운 경험이잖아? 배영웅 매니저 통해서 한두 개 해보는 거도 괜찮을 거 같아. 너로서도 의미 있는 축가 부탁 있으면 배 실장에게 언제든 이야기하고."
"네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천채왕은 일단 무엇이든 경험해보는 게 좋다는 주의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음악계에 경력이 많은 사람이니, 한 번쯤은 그의 의견대로 해보는 것도 좋아 보였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배영웅이 천채왕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천채왕이 내게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루아가 콘서트 게스트 나와달래."
반가운 소식에 나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언제요?"
“이번 투어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타디움 콘서트. 거기만 나와주면 돼. 괜찮지? 휴가 기간이야."
나는 신이 나서 답했다.
"네 가야죠."
내게 일본 스타디움 정도 규모의 공연은 이게 처음이었다.
아마 미국에서 봤던 '글로벌 비전' 대회 정도의 규모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걸 단 한 명의 가수가 채울 수 있다니, 그건 정말 엄청난 파워였다.
천채왕은 온화한 미소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가보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천채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휴가는 평소 활동 기간에 해보지 못한 경험을 위주로 하면 될 것 같았다.
* * *
그렇게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재호는 바람처럼 여행을 떠났다.
벼르고 벼르던 북미-남미 투어를 4주간 하고 오겠다고 했다.
환희는 일본에 남았다. 스트리트 댄스, 디제잉 대회들을 실컷 보러 가겠다고 했다.
'둘 다 폼 나는 계획이 있구먼.'
그에 반해 나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우선 보컬 연습 및 운동 루틴, 그리고 '빈 서판의 잠재력'을 활용하기 위한 공부 루틴까지 모두 끝내면 12시쯤 되었다.
나는 당장 휴가 때 뭘 할지 이전에, 점심 뭐 먹을지부터 갈등이 왔다.
'아, 그러고 보니 평일 점심이네?'
마침 붐비지 않는 시간이니 평소에 가보지 않는 곳으로 가보면 될 것 같았다.
* * *
"안녕하세요."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유명 한식당으로 왔다.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함부로 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 평일 점심때라면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를 쓰고 슬쩍 와볼 수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아~."
먹음직스러운 불고기가 나왔다. 해외 활동이 길어지다 보니 점점 한식이 좋아졌다.
'이렇게 벌써 아저씨가 되면 안 되는데. 이러다 한식 먹고 좋다고 질질 우는 국뽕 아저씨가 되겠어.'
"훌쩍훌쩍… 훌쩍훌쩍..."
'그래, 저렇게 꼴사납게 울겠어… 응?’
불고기를 맛있게 먹다가 내 생각의 흐름에 난데없이 끼어든 곳을 쳐다보니 낯익은 얼굴이 훌쩍거리며 나와 같은 메뉴인 불고기를 먹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내 옆에서 질질 짜며 한식을 먹고 있는 그 녀석은… 잇츠쇼타임의 메인보컬 앤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