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45화 (145/280)

제145화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공주님이 나가신다'는 1주일 이내에 곡 작업이 완료되어야 했다.

나와 재호는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환희,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곡 작업 이야기를 했다.

우선 재호가 곡 작업 현황을 이야기했다.

내용을 다 들은 환희가 황당해하며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다음 주까지 곡 녹음까지 끝내야 하는 거예여?"

재호는 환희에게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나를 살펴봤다.

아무래도 '공주님이 나가신다'를 포함한 OST를 두 곡 의뢰를 다 받자고 밀어붙인 게 나였으니 말이다.

내가 당당하게 재호와 환희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래."

"너무 급한 거 아니에여? 이 공주님이 나가신다'까지 꼭 할 필요는..."

난감해하는 환희에게 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확신하며 말했다.

"꼭 하고 싶어. 비원더에 엄청나게 도움이 될 거야."

여전히 환희는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에 차 있었다.

"그럴까여...?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시놉시스인데. 북유럽 공주역은 외국인 여자가 하는 거잖아여? 그게 잘 되게써여?"

"그게… 말이지. 그게 되는 사람이 있더라."

"누구여?"

환희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설마…"

말끝을 흐리는 환희를 보며 내가 씰룩대던 입꼬리를 올리며 씨이익 웃고는 말했다.

"그래. 젤다야."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싶었다.

젤다는 2006년 현재, 단순히 '한국어 잘하는 신기한 백인 여성'으로서 방송 패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소울 메이트'에 출연해서 젤다를 봤을 때 뭔가 익숙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는 젤다는 배우였다. 그것도 매우 성공한 배우였다.

그녀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활동한 후, 2020년대에 마흔이 되자마자 은퇴하고 잠적해서 더욱 전설이 된 여배우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출세작이 다름 아닌 '공주님이 나가신다'였다.

여기서 젤다는 사극에 빠져 한국에 무작정 놀러 온 북유럽 공주역을 기가 막히게 해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연예인 '젤다'는 여배우 '젤다'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환희와 ‘지옥의 케미(?)'를 자랑하는 악연이기도 했다.

"하필 그런 애가 주연인 드라마를... 투덜투덜."

인상을 팍 찌푸리고 고개를 젓는 환희에게 내가 물었다.

"배우 때문에 하냐? 작품 때문에 하는 거지."

"아 돼써요. 어쨌든 하기로 해쓰니까. 자료 주세여."

나와 재호는 여전히 투덜대는 환희에게 자료를 줬다.

'봄의 제전'은 어마어마하게 자료가 많았다.

대본도 충분했고, 상세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었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가사의 흐름이 나오면 좋겠다는 간단한 에세이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이건 대본 수정이니 추가 사항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쓰면 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OST 준비 기간까지 넉넉했다.

그에 반해 '공주님이 나가신다'는 갑갑한 의뢰였다.

1주일 이내에 녹음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본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트리트먼트만 가지고 OST 작업을 해야 했다.

'공주님이 나가신다'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던 환희가 혀를 끌끌하고 차며 불평했다.

"자료가 너무 없자나여. 영감이 안 떠올라여."

재호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거들었다.

"뭐라도 더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뭐 더 자료 받을 수 있는 거 없을까요?"

이건 아무래도 이번 OST 작업을 참여하게 만든 내가 책임져야 할 일로 보였다.

내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재호와 환희에게 말했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내가 '공주님이 나가신다'에 대한 정보를 배영웅 매니저에게 부탁하자, 다행히 그는 순순히 알아봐 주었다.

국제 통화로 OST를 담당하는 드라마 제작사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하더니 몇몇 자료를 전달받았다.

몇 시간 후, 배영웅 실장이 공수해 온 '공주님이 나가신다'의 자료를 몇 장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배영웅 실장에게 그 자료를 받아 온 건 나였다.

나는 재호와 환희에게 가져다주면서 슬쩍 자료를 확인해봤다.

시트콤 촬영장 스냅 사진 몇 개가 전부였다.

유럽의 성에서 찍은 게 하나, 그 외에는 모두 한국의 재래시장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거기에 북유럽 공주가 공주 차림으로 찍었던 사진이 하나, 그 외에는 모두 정체를 숨긴 공주가 한국에서 친구를 만나며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를 통해 받은 자료를 들여다보며 나는 '공주님이 나가신다'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그것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게 효과가 있으려나?’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사진을 본 재호와 환희 생각은 좀 달랐다.

자료를 보더니 환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환희가 먼저 코멘트를 남겼다.

"이 사진 좋은데여."

재호도 다시 생기가 도는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러게. 디즈니 영화 같구 좋네. 공주라고 해서 뭔가 했는데, '아 이런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이 딱 들었거덩."

나는 그 둘의 반응에 다소 얼떨떨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그래? 솔직히 난 잘 모르겠는데. 하긴 뭐 내가 곡 쓸 건 아니니까."

창작을 하는 두 사람으로서는 이런 사소한 자료도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둘에게 없는 재산이 있었다.

나는 이미 '공주님이 나가신다'를 이전 생에서 다 보고 왔다.

둘보다 이 시트콤에 대한 지식은 내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도 있었다.

"이 곡 작업 말인데. 생각해놓은 아이디어가 있어. 들어봐."

내가 적극적으로 나가자 환희자 물었다.

"뭔데여?"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환희를 보며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공주, 어디인지 모르지만, 북유럽 어디인가에 있는 작은 섬나라에 공주라는 설정이잖아?"

"그져?"

환희가 계속 맞장구를 쳤다. 재호는 눈을 감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보이밴드 음악 중에 유로 팝, 북유럽 음악이 많잖아. 그걸 써먹는 거야. 북유럽 음악에 경쾌한 느낌으로. 북유럽과 한국에 만남, 딱 이 드라마랑 똑같잖아? 어때?"

내 말은 잠자코 듣고 있던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곡,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환희는 아직 멀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토를 달았다.

"멜로디랑 가사를 붙이기엔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한데여."

'걱정하지 마라, 이 형은 다 생각이 있단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환희에게 말했다.

"네 감정에서 그대로 가져오면 어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제 감정이여? 무슨 감정이여?"

나는 환희가 잘 해낼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격려했다.

"방금 네가 말했잖아. 성이 꼭 감옥 같아 보인다고. 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거 되게 독특한 관점이야. 그걸 살려보면 어때?”

“그럴까여..."

사실 나도 확신만 있었지,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니 술술 살이 붙었다.

마치 원래 이렇게 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처럼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 이 작품을 얼핏 보면, 공주가 가난한 척 서울에서 사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반대인 거지. 감옥에서 죄수처럼 갇혀 있던 공주가, 지구 반대편에서 일반인이 돼서, 모두가 누리고 있던 자유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인 거야. 그렇게 보면 어떤 노래를 해야 하는지가 좀 보이지 않을까?"

환희가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여. 마치 갇혀 있던 짐승이 비로소 자유를 얻고 자연 속에서 뛰노는 그런 느낌의 이미지를… 뻔한 공주 이미지보다는 훨 낫네여."

우리 둘의 말을 듣던 재호도 말을 덧붙였다.

"약간 스웨덴 팝 작곡가들 느낌 나게, 멜로디를 많이 넣어서 쓰면 좋겠네. 나도 좀 북유럽 음악 느낌 나게 편곡 방향을 잡아볼게."

내가 재호에게 좀 뜬금없다고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북유럽 느낌 나는 편곡은 대체 뭐냐?"

내 물음에 재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부터 연구해봐야지? 일단은 좀 민속 음악이나… 유로팝 같은 데서 가져와 보면 될 거 같구. 일단 레퍼런스가 나왔으니까, 1주일이면 녹음까지 충분해. 걱정 마."

다행히 정리가 잘 되어갔다.

나는 이번에는 넌지시 환희를 봤다.

환희는 빤히 뭔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젤다가 공주 차림으로 성에서 사극을 몰입해서 보고 있는 장면 스틸컷 사진이었다.

내가 그런 환희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뭐하냐?"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는 환희를 흥미롭다는 듯이 보며 말했다.

"뭘 자꾸 빤히 보길래."

“아무것도 아니에여!”

빼액! 하고 소리 지르는 환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쭈 이놈 봐라?'

뭔가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듯했다.

* * *

이후 곡 작업은 순조로웠다.

재호와 환희는 ‘악!' 소리 날 정도로 어려운 고음을 잔뜩 넣은 곡을 가져왔다.

내가 말려도 봤지만, 그 둘은 북유럽 느낌을 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막무가내였다.

"이걸… 부르라고?"

기가 막혀 하는 나를 보며 환희가 실실 웃었다.

"횽이 하자고 한 거잖아여. 횽이 책임져야 져."

"아니, 고음이랑 북유럽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계속해서 따지려 들자, 환희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상관이써여, 횽. 암튼. 오늘이 녹음 데드라인인 거 알져? 재녹음할 시간도 별로 없써여."

"최대한 빨리해봐야지."

나는 환희가 얄미웠지만 바로 수긍하기로 했다.

후반 작업 등을 생각하면 1분 1초가 아쉬운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환희가 내게 준 가사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이 부분은 스웨덴어로 '만나서 반가워'라는 뜻이에요. 적당히 잘 발음해 주세여."

"그래.”

말은 그렇게 해도, 환희는 개인 활동으로 바쁜데도 상당히 좋은 곡을 뽑아 주었다.

재호도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왠지 북유럽에서 울려 퍼질 것만 같은' 밝은 유로팝 신스 반주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왔다.

미도리와 박찬용 또한 순식간에 재호의 주문대로 전혀 평소와 다른, 북유럽 느낌 나는 연주를 녹음해주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됐다. 근데… 이번 거는 진짜 높아도 더럽게 높았다.

"자 녹음 갈게여.”

단호한 환희의 말에 나는 투덜투덜하면서 녹음실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났어

너에게로 갈 거야

다시 뛰어볼래

너의 곁으로

만나서 반가워(스웨덴어)

'이 곡은 이다음이 문제란 말이야.’

후렴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후렴을 부르기 전 클라이맥스 브리지 부분이 엄청난 고음이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또 다른 세상

낯선 곳의 공기

다시 태어나는 거야

새로 시작해~애~~~~애~~~

도대체 고음이 북유럽 느낌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더럽게 높고 긴 고음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음을 마무리한 후, 후렴을 다시 한번 부르고 마무리했다.

녹음 부스 너머로 환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요, 횽.

내가 녹음을 끝내고 녹음실 바깥으로 나오자 재호와 환희, 그리고 배영웅 매니저가 벙찐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내가 '뭐죠, 이 반응은?'이라는 듯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묻자, 환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게 될 줄 몰랐네여."

"그럼 뭐야. 안 될 줄 알고 썼다는 거냐?"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묻자 환희가 쭈뼛거리며 답했다.

“기계의 도움을 좀 받으려 했죠."

"아서라."

재호는 만족스럽다는 듯 우리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날렸다.

"이번 곡 마음에 들어. 알앤비 보컬이라고 꼭 알앤비만 할 필요는 없거덩? 이런 포크 느낌 곡도 가끔 하면 좋을 거 같네. 콘서트 때 사랑받을 레퍼토리야."

배영웅 매니저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드라마가 설사 잘 안 되더라도. 이 곡은 팬들 사이에서 오래 남을 거 같네요. 자, 이대로 곡은 후반 작업 끝내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배영웅 매니저가 녹음 파일을 본사 작곡팀에 보냈다.

그제야 환희는 후련해진 듯,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야, 횽들. 이게 일주일 만에 되긴 되네요?"

재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안될 줄 알았거덩..."

배영웅 매니저가 어딘가에서 샴페인과 과일, 치즈 안주를 가져왔다.

보아하니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축하 겸, 같이 방송이나 볼까요?"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 배영웅 매니저에게 내가 되물었다.

"방송이요?"

* * *

배영웅이 가져온 건 비원더가 출연한 일본 방송 자료들이었다.

그 자료들은 DVD 혹은 비디오테이프로 녹음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환희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들부터 확인했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한국과는 사뭇 다른 연출에 조금 놀랐다.

'좀 수위가 세네.'

문화가 달라서 환희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알기 어려웠다.

다만 환희가 자주 예능에 출연한다는 점에 미루어, 환희가 잘하고 있구나 싶을 뿐이었다.

곧이어, 이번에는 비원더 3인의 음악 방송을 확인했다.

영상 속의 비원더는 일본어 버전의 '음식 남녀'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이 보인 멤버별로 너무 다른 색깔의 반응 때문이었다.

나는 평범하게, 절대다수의 환호를 중간 데시벨로 받았다.

재호가 노래를 부를 때는 젊은 여성 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희가 노래를 부를 때면, 뭔가 음습한 분위기의 환호성이 들렸다.

환희에게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딥한 덕후 팬들이 잔뜩 붙었다는 느낌이었다.

숫자는 내게 환호하는 사람과 비슷할 수 있어도, 개개인이 보이는 열정이 달랐다.

내가 팔꿈치로 환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환희 너는 팬 많아서 좋겠다 야."

환희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가끔 무서울 때도 이써여, 횽."

영상 속 우리 무대가 끝났다. 배영웅 매니저가 다음 비디오테이프로 바꾸려 했다.

"잠깐만요. 이거 조금만 더 보죠."

내가 다음 테이프를 집어 올리는 배영웅 매니저를 제지했다.

우리 바로 다음 무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는 얼굴이 무대에 등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