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제목: 귀여운 오타쿠 등장이 싫지 않다]
본문:...... (중략)
비원더의 주환희 군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스포츠맨이다.
깔끔하게 아이비 풍으로 다듬은 머리. 단련된 탄탄한 근육.
웨스트 코스트를 연상시키는 패션까지.
그야말로 파티피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섬세한 오타쿠의 영혼이 자리한다.
주환희 군은 매 분기 애니메이션 신작을 꿰고 있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정통하다.
그는 트렌드에만 밝은 것이 아니다.
건담부터 전대 물('파워레인저와 같은 시리즈물)까지, 오타쿠가 필수적으로 가진 교양을 갖췄다.
거기에다 주환희 군은 현재 애니메이션 업계에 미래를 걱정하고 따뜻한 조언을 건넬 정도의 경륜까지 있다.
그야말로 진정한 '한류 오타쿠'의 탄생이다.
이런 그를 욕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오타쿠 문화를 스스로 미워하던 건 아닌지 고민해 보시기를.
우리도 아끼지 않던 문화를 외국인이 아끼고 있었다는 점이 부끄럽다.
나는 환희에 관한 신문 칼럼을 다 읽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부러 틱틱거리며 환희를 놀렸다.
"뭐야 이 느끼한 칼럼은."
"무려 일본 최대 신문의 메인 칼럼이랍니다."
배영웅 실장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재호가 다른 신문, 잡지들을 살펴봤다. 얼핏 봐도 10곳이 넘는 매체들이 환희를 크게 다루고 있었다.
재호가 혀를 내두르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잭폿이네, 잭폿. 대박이 터졌어."
내가 환희를 빤히 쳐다보면 물었다.
"설마… 노린 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여 횽… 그냥 저 자신에게 솔직했던 거에여. 저는 가타카나도! 회화도! 죄다 애니로 배웠단 말예요. 그걸 쏙일 수는 없었어여."
애니메이션만 거론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환희의 말에 나는 뭔가 기운이 빠진 듯이 말했다.
"잘 되니까 할 말이 없네."
확실히, 생각지 못하게 큰 반응이 왔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의 한국 연예인이 알고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의 엄청난 팬이라는 갭(gap)이 일본 대중에게 먹힌 모양이었다.
배영웅이 핸드폰을 가져오며 환희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환희 아티스트와 통화하고 싶어 하세요."
"아 넵."
천채왕과 환희의 통화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채왕은 통화 중 환희에게 '환희야, 네가 해낼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환희를 통해 천채왕과의 통화 내용을 들은 나는 설마 그 정도였을까 싶었다.
'...거짓말!'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에서 환희의 인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퍼져갔다.
우리는 물론, 회사도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질 정도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속도로 인기가 상승하는 건 처음입니다. 각종 쇼 오락 프로그램에서 환희 군 섭외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환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다 계획대로네여."
그런 환희를 보며 나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 인마!'
너무 황당한 이유로 환희는 한 나라의 스타가 되었다.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누군가가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황당한 이유가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들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줄 몰랐던, 오히려 천대했던 오타쿠 문화를 잘생기고 건장한 키 180의 외국인 청년이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환희를 통해 자신들도 몰랐던 자신들 재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건지도 몰랐다.
한껏 들뜬 환희가 배영웅에게 물었다.
"실짱님. 그럼 저 이제 만화 원작자들 싸인 받을 수 있는 거예여?”
"그, 그건 모르겠네요.”
“······.”
저렇게 철딱서니 없는 말을 하는 환희를 보니 나는 '그냥 운수가 좋은 걸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영웅 실장이 이번에는 나와 재호에게 말했다.
"두 분에게도 일이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재호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저도 방송인가요?"
"방송은 아니고요. OST 작업 의뢰가 두 곡 왔습니다. 한국 드라마들입니다. 둘 다 한류 열풍을 노린 드라마들이라 일본 활동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배영웅의 설명에 기분이 좋아진 재호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오오 네. 단순히 부르는 게 아니군요?"
“맞습니다. 싱어송라이터 그룹이니만큼 작사, 작곡, 편곡까지 함께 의뢰받았습니다. 비원더라면 그 정도는 해야죠."
배영웅 매니저의 말을 들은 재호 눈빛이 반짝거렸다.
프로듀서 지망생이니만큼, 이런 제안은 재호가 바라는 바였다.
“노을 군도 함께 가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배영웅 실장은 나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저도요?"
"네, 원래는 작사, 작곡을 맡은 환희 군이 가면 좋은데. 이렇게 일정이 많이 생겨 버렸으니까요. 노을 군이 대신 미팅에 참석하셔서 드라마의 느낌이나, 미팅에서 얻은 정보 등을 알려주시면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리 있는 배영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환희에게 물었다.
"내가 대신 간다? 괜찮겠어?"
환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 상관없어여. 다만..."
"다만?"
"...애니 OST라면 더 좋았을 텐데여."
'아이고, 그럼 그렇지' 하며 나는 환희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재호가 대뜸 소리치는 내 어깨를 잡더니 말했다.
“아니야 노을아. 환희 말이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구."
“너까지 또 왜 그러냐?"
"환희 쟤가 애니 보는 걸 저렇게 사람들이 좋아하잖아? 애니 주제가까지 부르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구.”
재호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에게 말했다.
"...냉수 먹고 정신 차려."
...이제 재호까지 환희에게 물들고 있었다.
* * *
나는 재호와 환희, 그리고 김나리 사원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벼락처럼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혀 쉴 틈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드라마 OST 회의가 잡혀 있었다.
나는 회의실로 가는 차 안에서 김나리가 정리한 자료를 살펴봤다.
회의 자료였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번에 비원더가 의뢰받은 드라마 OST는 총 두 건이었다.
첫 번째는 초대박 한류 드라마 후속작 '봄의 제전'이었다.
영화 주연을 주로 하는 남자 주인공과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여자 주인공이 주연을 맡은 엄청난 기대작이었다.
작가 또한 SS급 대작가였다.
나는 우리가 OST를 맡은 드라마의 초호화 캐스팅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봐도 가장 히트할 거 같은 기대작이지.’
그만큼 회사에서도 '봄의 제전' OST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트리트먼트는 물론, 5화까지 드라마 대본도 모두 적혀 있었다.
이걸 보면 캐릭터의 외형부터 성향, 심정까지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캐릭터의 심정을 정확하게 잡아서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두 번째 의뢰는 더 급한 의뢰였다. 일주일 안에 드라마 삽입곡이 나와야 했다.
드라마의 이름은 '공주님이 나가신다.'
북유럽의 공주가 한국 사극 '고려 태조'에 반해서 한국에 놀러 와, 한국의 사극 극단과 어울리며 생기는 일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한국에서 자주 시도되지는 않는 틴 시트콤이었고, 트리트먼트조차 없었다.
배우들도 모두 신인인 데다 작가도 초짜였다.
누가 봐도 두 번째 작품은 첫 번째 작품에 비해서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한국에서 시트콤은 비인기 장르였고,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 별 볼 일 없었다.
나 같은 사람 아니면, 누구나 기대하지 않을 작품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 시트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 * *
이번 회의 장소는 매번 우리 곡을 녹음했던 양재동 녹음실이었다.
녹음실에 들어가니 키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키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왔어요? 푸훗!"
표정을 보니 키미가 우리를 보며 웃은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방송을 보신 모양이군요.”
내 말에 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연히 봤죠. 푸훗!"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키미에게 착잡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홍차 끓여 놨어요. 먹으면서 회의해요."
그렇게 말하며 키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실컷 웃은 후에 키미는 다시 평소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OST는 빠르게 결과가 나오지 않아요... 드라마 흥행도 중요하죠. 활동 곡과는 다르게 성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요... 대신 한번 잘 되면 그야말로 '불후의 명곡'이 되는 경향이 있어요. 아이돌 가수가 아닌 발라드 가수인 비원더에게는 OST처럼 한 번 성공하면 오래 가는 노래가 중요할 수 있어요.”
재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네요…. 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겠네요. 저도 그러고 보니, 기억에 남는 OST가 많거덩요."
재호의 말에 호응하며 키미가 물었다.
"노래방 애창곡 중 은근히 많아요. 이번 곡도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대본, 읽어 봤어요?"
곡 작업이니만큼, 재호가 주로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재호가 키미의 질문에 대답했다.
"다 읽었습니다."
"어떻던가요?"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는 좋은 드라마던데요? '불치병' 같은 소재가 조금 올드한 거 같긴 하지만요."
재호의 대답에 키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저는 미드밖에 안 봐요. 대중은 좋아한다고 하니까요."
"저두요."
재호의 맞장구에 키미가 의욕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봄의 제전'이라고 하면 곡 쓰기에는 너무 좋아요. 감정도 극적이고. 편곡에도 쓸 아이디어가 많죠. 클래식 악곡을 샘플링하면 어때요?”
재호도 키미 프로듀서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거 좋은데요. 왈츠를 써보면 좋을 거 같구요."
그렇게 둘은 착착 아이디어를 짜냈다.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우아한 클래식 곡 같으면서도 리듬감을 더한 알앤비 발라드곡을 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후 둘은 디테일한 가사 콘셉트부터 편곡 아이디어까지, 온갖 아이디어를 적어내고 정리해 나갔다.
어느덧 회의를 끝내야 할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도 '봄의 제전'에 대한 이야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슬쩍 키미 프로듀서에게 말을 걸었다.
"저 프로듀서님."
"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키미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공주님이 나가신다'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는데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내 말에 키미가 살짝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아 그거요. 뭐, 굳이 저희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안 한다고요?"
안 하면 안 됐다. 이 드라마는…
이런 내 생각이 무색하게 키미가 말을 이었다.
"지상파가 아니라 케이블 드라마던데요. 방영 시간대도 너무 어정쩡하잖아요. 작가도 PD도 심지어 배우도 모르는 사람이고. 굳이 이런 작품까지 다 의뢰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요?"
키미 말을 듣고는 재호도 조심스레 거들었다.
"시간도 너무 촉박하구요. 편곡 아이디어도 하나 없는데 1주일 안에 다 해야 한다는 건 좀 무리거덩요. 굳이 이렇게 성공 가능성이 낮은 드라마에까지 참여해야 하느냐는 생각두 들어요."
'성공 가능성이 작다니… 이건 100% 성공한다고!'
물론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시트콤의 성공은 인생 2회차인 나에게만 보이는 미래였으니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다.
...사실, 누구나 성공할 줄 알았던 '봄의 제전'은 폭삭 망할 운명이었다.
기대작이라고 해서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었다.
한국은 물론, 잘 되리라 기대했던 일본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일본도 전작인 ‘겨울 가곡'의 재방송을 보지, '봄의 제전'은 안 보겠다는 사람이 다수였다.
그에 비해, ‘공주님이 나가신다'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었다.
어이없는 슬랩스틱 위주의 코미디가 오히려 해외 팬들에게 대호평이었다.
게다가 톡톡 튀는 젊은 배우들 대다수가 아이돌이어서 역시나 아시아의 한류 팬들을 끌어모았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프로그램으로 사라졌지만, 정작 아시아 한국 드라마 팬덤 에서는 초대박 프로그램이 되어 엄청난 수익을 냈다.
주연 배우들이 '공주님이 나가신다' 효과로 10년 넘게 광고계 블루칩으로 활동할 정도의 파급력이었다.
게다가, 이 시트콤은, 그 인기를 발판으로 무려 시즌제로 10년간 방영했다.
하지만 주제가는 1시즌의 주제가로 10년을 함께 갔다.
'공주님이 나가신다'의 주제가는 10년 넘게 세상에 울려 퍼질 운명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의뢰, 무조건 받아야 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나는 키미와 재호에게 일침을 날렸다.
"...저희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닌 거 같습니다. 무슨 드라마가 잘 될지 어떻게 미리 압니까? 그게 되면 누구나 스타 되게요?"
사실 나는 알고 있지만.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키미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리 아닐까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태도로 응했다.
"지금 저희는 최대한 씨를 많이 뿌려야 할 때입니다. 땅을 가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요. TYB는 대형 기획사지만, 저희는 아직 이제 신인입니다. 불러주는 곳에서는 다 최선을 다해야죠."
내 말을 들은 재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노을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해보지 뭐. 나나 환희가 킵해놓은 곡 아이디어 몇 개 있으니까. 그중에 해보면 돼."
'아니 재호야. 이 곡이 앞으로 우리 대표곡이 될 거야. 필살기를 써야지. 짬 처리가 말이 되냐.'
물론 내 속마음을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는 재호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래 재호야. 일단 남는 곡 중에 최선을 다해서 해보자.”
아마 몇 달만 지나면, 재호는 이 드라마 OST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고마워서 방방 뛰고 싶어질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