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그날 밤은 일찍 잠에 들어야 했다.
일본 아침 뉴스 생방송 인터뷰 스케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하면서 우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일본은 아침 뉴스 시청률이 엄청나게 높아요. 큰 기회입니다. 이 인터뷰에서 우리를 잘 보여줘야 해요."
"네에~."
환희가 눈을 끔뻑거리며 적당히 대답했다.
사실 멤버 3인 모두 회사가 준 자료를 다시 읽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자 받은 자료에는 어떤 식으로 일본 대중에게 어필할 것인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내 자료에는 '노래 천재', '만 년 만에 나오는 가수' 같은 느끼한 수식어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자료를 읽어 내려가며 이게 일본 감성인가 싶었다.
재호는 깔끔하게 잘생긴 인텔리, 환희는 운동을 즐기는 아이비리그 느낌의 쿨가이로 설정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해 이것들이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행위 중, 일본 대중에게 먹히는 부분이 이런 것이라는 기획사의 의견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런 캐릭터만 가지고 인터뷰가 제대로 될까 걱정스러웠다.
심지어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하는 인터뷰였다.
내가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배영웅 실장에게 말했다.
"대본도 없는 프리 토킹이네요. 뭐 한 5분밖에 안 된다고는 하지만요."
배영웅 실장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대본이 있는 게 더 어렵죠. 세 분은 배우가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재호는 걱정 없었다.
하기야 재호는 워낙 깔끔한 녀석이었으니까.
문제는 환희였다. 한국말로 활동할 때는 그나마 연기가 잘 먹혔다.
하지만 서투른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본인의 '주환희'라는 캐릭터가 점점 깨지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주환희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나는 그런 환희를 생각하니 뭔가 좀 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환희의 폭탄 발언 덕에 오히려 비원더의 인기가 치솟을 거란 사실을.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배영웅 매니저의 말대로 일찍 일어났다.
조금 너무 일찍이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4시에 일어났으니까.
5시부터 준비해서 스탠 바이 하면 되니,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조깅이나 해볼까?'
나는 긴장을 풀 겸, 체력 유지도 할 겸 가벼운 차림으로 바깥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불쑥 무언가가 내 팔뚝을 잡았다.
"뭐야!"
깜짝 놀란 나의 외마디 비명에 그 누군가가 물었다.
"새벽 스케줄 있는 게 어딜 나가냐?"
나를 잡은 손의 정체는 재호였다.
"아 놀랬잖아. 뭐 이리 일찍 일어났어."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하자 재호가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아 좀 일찍 잠이 깨서. 조깅이나 잠깐 하려고. 너도 가볼래?”
"조깅?"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재호에게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한국에서는 이제 누가 알아볼까 봐 조깅도 못 하잖아."
"일본에서도 뜨면 못한다구. 이번에 뉴스 나오면 못 할 수도 있거덩?"
"그래. 그러니까 지금 조깅이라도 해둬야지."
허를 찌르는 듯한 내 말에 재호가 '앗?' 하며 맞장구쳤다.
"그러네?"
재호는 그렇게 내 말에 설득된 듯, 캔버스화에 아디다스 츄리닝 차림으로 바깥에 나왔다.
그런 재호를 보고 웃으며 내가 말했다.
"그럼, 한 번 달려볼까?"
* * *
우리는 먼저 슬렁슬렁 달리면서 일본 동네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동네를 살펴보기에는 조깅이 제일 적당하다 생각이 들었다.
걸으면 너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차를 타고 가면 너무 빨라서 뭐가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달리다 보니 비로소 일본의 풍경이 보였다.
얼핏 한국과 비슷하지만 뭔가 조금 더 정돈되었고, 뭐든지 한국보다 조금 더 작았다.
약간 올망졸망한 귀여운 느낌이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내가 재호에게 말했다.
"자 이제 슬슬 돌아갈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돌아가려는 찰나, 무언가가 재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뭘 보냐?"
나의 물음에 재호가 돌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계단 봐.”
그것은 사찰로 이어지는 돌계단이었다. 얼핏 봐도 제법 높았다.
"이게 왜?"
"저거 보라구."
재호의 손이 가리키는 곳, 계단 옆에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간판을 읽어보니 대충 ‘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집니다' 유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간판을 읽고 실소가 나왔다.
"야, 너 이런 거 믿냐?"
"혹시 모르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재호에게 내가 물었다.
"올라가게?"
"응. 너는 안 갈래?"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난 됐다."
재호가 투덜대며 계단을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예전에 성당에서 기도하던 문루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긴 뭐… 스스로에게라도 위안이 된다면 상관없지 않나."
묵묵히, 간절한 마음으로 돌계단을 올라가는 재호를 바라봤다.
워낙 몸을 잘 관리하는 재호라서인지,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빨리 왔네?"
이런 내 질문에 재호는 너무나도 '원재호다운'답을 했다.
“이미 시간을 다 계산해뒀지. 어디 보자... 4시 48분 15초. 정확하게 내 계산 안에 들어온 거거덩?"
나는 말 없이 그런 재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변태 새끼.'
일본에 오니 재호의 변태적인 시간에 대한 집착이 한층 두드러졌다.
하긴 해외 활동을 하니 시간이 빠듯해서 재호처럼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는 게 도움이 좀 되기도 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나 한 1초 정도 고민해 봤지만, 그런 고민 할 필요가 없었다.
'저렇게 사느니 죽고 말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주제를 돌리려 재호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냐?"
"환희가 오늘 인터뷰 사고 치지 않게 해달라구."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구나 싶어 내가 재호에게 맞장구치듯 물었다.
"...너도 그게 걱정이었냐?"
"야, 너두?"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바로 파하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내가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했다.
“주환희 이 자식…. 우리가 이렇게 걱정하는 거 알고는 있을는지..."
* * *
이런 걱정을 알고 있기는 개뿔, 5시까지 침 질질 흘리며 자는 하늘이를 등짝 스매싱으로 깨워서 서둘러 방을 나섰다.
우리는 메이크업을 받고 부랴부랴 인터뷰 현장에 나왔다.
젊은 여성 아나운서가 인터뷰어로 나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인터뷰를 서둘러 시작했다.
아나운서가 먼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요새 한류가 거센데요.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아의 달' 문루아 등의 가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TYB의 신예! 비원더입니다. 안녕하세요~."
우리 셋은 신인의 기분으로 돌아가 한목소리로 팀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Be Wonder! 비원더입니다."
아나운서가 싱긋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멤버분들 자기소개해주세요."
멤버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메인보컬 권노을입니다."
"안녕하세요. 메인 프로듀싱과 서브 보컬, 코러스를 담당하는 원재호입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안녕? 리드보컬을 맡고 있고 작사와 작곡을 하는 주환희에요. 와썹!"
철딱서니 없게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환희를 보며 나는 벌써부터 이 인터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환희 임마! 벌써 불안하잖아!'
완전히 인터뷰의 정석으로 유려하게 말하는 재호 다음에 환희가 이야기하니, 더욱 환희의 엉뚱함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게 아슬아슬, 살얼음 위를 걷는 것만 같은 인터뷰가 시작됐다.
아나운서가 준비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비원더 여러분들은 직접 자기 곡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와아~, 정말 재능이 대단하세요."
재호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더욱 음악의 배움을 위해 정진할 따름입니다."
재호의 대답에 이어 자연스럽게 아나운서가 질문을 시작했다.
"일상생활이 세 분의 음악의 자양분이 될 것 같은데요, 혹시 세 분, 평소 취미생활은 어떤 걸 하세요?"
이미 예상하던 질문이었다.
미리 생각해놓은 대답을 내가 먼저 시작했다.
"저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음악 감상입니다."
아나운서가 흥미롭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호오. 음악을 직업으로 가지고 계신 데도 음악을 취미로 삼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역시 음악을 많이 들어야 음악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듣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나운서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방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떤 음악을 즐겨 들으시나요?"
"주로 알앤비 위주로 듣고요. 그 외에도 경음악… 팝 음악… 가리지 않고 듣습니다."
거침없는 나의 대답에 아나운서가 소리치듯 물었다.
"일본 음악은 듣지 않으시나요!"
나 또한 그녀에게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을 짝! 하고 마주치며 답했다.
"설마요! 시부야 계라던가… 퓨전 재즈도 많이 듣고요. 특히 밴드 음악을 많이 참고합니다. 일본은 연주가 워낙 훌륭해서 참고가 많이 됩니다."
"오오~ 스고이(멋지네요)! 재호 상은 어떤 취미생활을 하시나요?"
그녀는 나의 대답에 흡족해하는 반응을 보이며 이번에는 재호에게 물었다.
재호가 말하기 시작했다.
"아 네 저는…"
나는 질문의 화살이 재호에게 넘어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대답을 잘한 것 같았다. 오하라 기자의 귀띔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인은 말이지.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야'라는 말이 입버릇이야.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금 일본을 띄워주는 게 도움 될 거야.]
오하라 기자 말대로 일본 음악을 조금 띄워주니 금방 인터뷰 분위기가 밝아졌다.
실제로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자기 문화 좋다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지 않겠나 싶었다.
한국인도 외국인이 한국 노래 좋아하면 기분 좋아지고 그러지 않던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재호도 능숙하게 잘 대답하고 있었다.
요리, 영어신문 읽기, 그리고 독서가 재호의 실제 취미였다.
재호가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하자 아나운서도 놀랍다는 듯 연신 '스고이!'를 외쳤다.
"대단하네요. 재호 군은 영어도 능통하신가 봐요."
재호는 겸손하게 아나운서의 칭찬을 우리 모두에게로 돌렸다.
"저희 비원더 멤버들은 모두 영어, 일본어도 준비를 했고요. 다른 언어도 더 배울 예정입니다."
"재능이 많은 팀이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환희 군은 어떠세요?"
아나운서는 손뼉을 치며 재호에게 답하고는 환희에게 물었다.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환희야! 평범하게 대답해줘!'
아나운서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환희가 답했다.
"...운동을 좋아합니다. 특히 축구요."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무난한 대답이 나왔다.
"오오! 스포츠맨 멋져요."
아나운서의 호감 어린 반응에 환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시청 좋아해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환희를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야! 야! 야!'
재호도 눈을 부릅뜨며 환희에게 그만하라 손짓했다.
하지만 환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나운서가 계속 질문을 이었다.
“오 애니메이션이요? 토라에몬, 투피스, 구짱은 못 말려 같은 거요?"
환희가 고개를 크게 저으며 답했다.
"그런 건 제 마음을 울리지 못해요. 11시부터 시작하는! 어른을 위한! 심야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제 영혼의 양식이라고요!"
나는 '아이고 머리야' 하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제발 그만해!’
재호가 황급히 환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대답을 계속했다.
"지... 지브루 스튜디오라던가. 뭐 그런 거를 좋아한다는 뜻인 거 같네요. 저도 가끔은 좋거덩요~. 계절감 있는 여름 대형 아니메 보면서 여름나기! 자, 다음 넘어가죠."
아나운서가 재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했다.
“네에..."
'재호 나이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커버였다.
하지만 아나운서의 질문 폭탄은 계속됐다. 그녀의 다음 질문은 더 위험해 보였다.
“세 분 모두 일본어를 잘하시는데 일본어를 배우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우선 나부터 대답을 시작했다.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우선 팝 음악이 제일 궁금했고요. 팝 음악을 일본이 참 잘 정리해 뒀더라고요. 음악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내 대답에 아나운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오! 존경하는 일본 가수도 있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치하 히카루 님의 알앤비 음악 존경합니다."
"전설이시죠~. 훌륭합니다. 재호 군은 어떠세요?"
'휴우, 나는 무난하게 잘 대답한 거 같은데.'
재호도 헛기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저는 굉장한 사극 마니아입니다. 한국 사극은 물론, 어느 나라 사극이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요. 물론 일본 사극도 아주 좋아합니다."
재호의 대답에 한껏 신이 난 아나운서가 하이톤으로 물었다.
"오오. 어떤 시리즈 좋아하세요!"
재호는 턱에 손을 대고 사색하는 듯한 몸짓으로 답했다.
"어디 보자… '맹인검객'시리즈도 좋았고요. 요새 나오는 사극 시리즈도 빠짐없이 보고 있습니다.”
"오오. 저도 잘 못 본 옛날 드라마도 다 보시네요!"
흥미로워하며 기분이 날아갈 듯한 표정을 하는 아나운서의 반응에 재호가 덩달아 신나서 덧붙였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들입니다!”
...재호는 사실 일본 사무라이 영화보다는 중국 사극을 더 좋아했지만, 뭐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의 광팬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었다.
이번에는 환희 차례였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부터 내겐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발 좀 평범한 대답을...!'
환희가 슬며시 말했다.
"한국에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나라고, 다양한 팬이 있는 일본에서 공연하는 것이 언제나 꿈이었습니다. 기획사 연습생 시절부터 일본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아나운서가 양 눈썹을 아치 모양을 만들어 치켜올리며 환희에게 물었다.
"연습생? 그게 뭔가요?"
"일본의 준비생과 비슷한 개념이에요."
차분히 대답하는 환희에게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뜻밖에 인터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네 그럼 이걸로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인터뷰가 끝났다. 나와 재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나름 무난한(?) 인터뷰를 했으니 말이었다.
그때, 아나운서가 쭈뼛쭈뼛하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저… 근데 환희군."
환희가 그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에?"
아나운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왜… 일본어를 하시나요?"
“······.”
갑자기 인터뷰 현장에 정적이 흘렀다.
내가 어떻게든 변명을 해봤다.
"하하, 그럴 리가요. 일본어가 아직 좀 서툴러서 그랬겠죠."
아나운서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기에는… 되게 유창하신데 여고생 느낌이라서요."
환희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우치(‘저'의 일본어. 주로 여중생이 씀)의 일본어가… 어때서요?"
“네에?”
아나운서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환희는 격양된 목소리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애니메이션으로 배운, 뜨거운 일본어라구요! 이거야말로 진짜 살아 숨 쉬는, 혼이 담긴 일본어야. 내 일본어를 얕보지 마!"
“하… 하잇! (네… 네에!)"
환희의 기백에 눌렸는지 아나운서가 순간 차려 자세를 하며 답했다.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환희가 그런 그녀와 우리를 보며 외쳤다.
"애니메이션은 세계 최고의 문화라구! 부끄러워하지만 제군들! 이번 시즌도 '하루카의 우울'이 너무 히트여서 묻힌 작품이 많지만, 다들 훌륭한 작품 투성이라구~."
"야, 그만, 그만해!"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환희는 그동안 참은 애니메이션 드립을 봇물 터지듯 계속했다.
결국 나와 재호가 환희 입을 막으면서 폭풍의 인터뷰가 끝이 났다.
* * *
전화 속 천채왕은 미친 듯이 폭소 중이었다.
-야 환희가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었어? 가리지 않고 다 볼 정도로? 하하하하하하하!
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여자 아나운서 표정을 보셨어야 했어요. 진짜 딱 '그게 뭔데 씹덕아' 표정이었다고요."
심각해진 내 말에 천채왕이 더 크게 웃었다.
재호가 나지막이 천채왕에게 물었다.
“선생님… 걱정 안 되세요?"
수화기 너머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천채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뭐가?
"이미지 걱정이요."
재호의 말에 천채왕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에이. 나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우리가 환희가 이런 사고 칠 거 몰랐겠어?
"네에?"
놀란 우리를 보며 운전 중이던 배영웅 실장도 태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 저희 계산 안에 있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뷰의 파장이 우리에게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좋은 방향으로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