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금칙어 게임. 주로 술 게임으로 각광받았지만 어떤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금칙어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각 사람의 금칙어를 그 사람의 왼쪽에 있는 사람이 정한다.
그다음에 각자 정해진 금칙어를 본인이 볼 수 없게 이마 위에 써 붙인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면, 먼저 금칙어를 말한 사람이 탈락하는 방식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오랜만에 팀의 친목 도모를 위해 이 게임을 우리 비원더에 추천했다.
-어디 보자… 그래도 좀 벌칙이 있어야겠죠? 1등은 내일 아침에 정리 면제. 2위는 하고 싶은 일정하기, 3위는 가장 힘든 정리 하기 어때요?
배영웅의 제안이 맘에 들었던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벌칙과 포상이 정해지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 게임의 핵심은 저 사람이 '말할 수밖에 없는' 말을 금칙어로 정하는 데 있었다.
평소 그 사람의 패턴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겨루는 게임인 셈이었다.
내가 금칙어를 골라야 할 상대는 재호였다. 재호는 보통 '라구'나 '거덩~'같은 말투가 특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어미를 금칙어로 정하는 것은 하수나 쓰는 방식이었다.
재호는 머리가 좋았다. 분명 게임을 할 때는 그가 쓰는 어미를 자제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재호의 '성격'을 노리는 게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재호는 특히, 환희가 이상한 짓을 하면 그걸 지적하고는 했다.
‘그렇다면 재호가 지적하는 말 중 가장 흔한 말을 넣어보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 재호에게 넘겨준 금칙어는 '에이'였다.
우리는 각자의 금칙어를 넘겨받아 이마에 붙였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금칙어가 무엇인지 몰래 보는 반칙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마에 붙어있는 금칙어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피식 웃었다.
환희의 키워드 때문이었다.
'화이팅'.
환희가 툭하면 시작 전에 외치는 말이었다. 그는 자꾸 뭐든지 화이팅 넘치게 시작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게임 전에 화이팅을 외칠 것으로 보였… 다.
환희가 주먹을 꼭 쥐더니 자신을 응원했다.
"화이또!"
평소와는 다른 환희의 외침에 순간 재호와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말을 따라 했다.
“화이... 또?"
재호랑 내가 서로를 쳐다보고 나서 동시에 환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지금… 환희는 일본어로 말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내게 환희가 놀리듯이 말했다.
"왜 그러는 거야. 노을 쿤. 그렇게 나를 빤히 보면, 나, 조금 당황스럽다구~."
환희는 뭔가… 그… 좀 일본스러우면서 여성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약간 수줍어하는 듯이 몸까지 배배 꼬며 말하니 더 가관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참지 못하고 말을 날렸다.
"그 말투는 뭐야 너!"
이에 질세라 환희가 한 손을 쭉 뻗어 집게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금칙어 게임에서 평소 말투를 쓰면 너무 불리하잖아? 내 실력을 보여주겠어! 각오해! 노을 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환희에게 답했다.
"그 '쿤'이라는 말투 좀 뺄 수 없냐..."
이상하게 열 받는 말투였다.
'제길, 이러면 '화이팅'이라는 말을 환희가 할 리가 없어. 그 대신 '화이또'라고 할 테니까. 그럼 우선 재호를 노려볼까?'
나는 이번엔 표적을 재호로 변경하여 은근슬쩍 그에게 말을 걸어 봤다.
그러고 보니 재호는 게임 시작 후 지금껏 말이 없었다.
그런 재호를 재촉이라도 하듯 내가 물었다.
"재호 너는 어떠냐? 왜 말이 없어? 게임이 진행될 정도 말은 해야지."
이번에는 재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군, 노을 공자. 과인이 잘못했소. 대화를 시작해 보지 않겠소?”
아니, 이건 또 무슨…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재호에게 소리쳤다.
"너는 또 뭐야 그 말투는!"
재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사극 톤이지만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인은… 감탄했소! 환희 공자의 아이디어에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외다! 그래서 과인도 한 번 말투를 바꿔 보기로 했소. 이래 봬도 과인이 전 세계 사극 팬 아니겠소…”
그런 재호를 보며 환희가 한 손을 관자놀이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의 새끼손가락은 마치 여자가 머그잔을 들 때 그러하듯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재호 상 제법 총명하잖아? 나, 조금, 골치 아파졌다구."
"둘 다 말 좀 정상적으로 못 하냐..."
이상한 말투를 내뱉는 놈들 둘 사이에 있으니,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말투를 급하게 바꾼다는 것이 꼭 장점은 아니었다.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말투라 불리할 수 있었다.
조금 주제가 깊어지면 다시 무심코 예전 말투가 나올 수 있었다.
평소 말투를 쓰는 내가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어 가려면, 우선 대화를 조금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주제로 끌고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슬쩍 재호와 환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좀 축하해야 할 일 없냐? 다들 수익 정산도 받았을 거고. 음악방송 1위도 해냈는데."
물론 이것은 환희의 '화이팅'이란 키워드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기 위한 함정 질문이었다.
다행히 현재 우리 상황을 반영한 질문이라 그런지, 재호와 환희 모두 긴장을 좀 풀었다.
재호가 먼저 대답했다.
“과인은 딱히 달라진 건 없소. 이문이 남은 것은 모두 부모님에게 드렸소만. 과인은 돈보다는 최고의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이오."
환희가 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호 상도 그래? 우치(일본어로 '너'라는 표현. 여성 전용 표현)도 그런데. 내 가사로 어떤 감정을 표현할까? 어떤 감동을 전달할까? 어떤 작사가로 남아야 할까? 같은 고민을 더 하는 편이랄까?"
나는 가까스로 저 둘의 말투를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기회도 더 많이 열렸잖아?"
재호도 내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렇소. 과인도 조촐하게나마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 같소.”
“무슨 기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재호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새로 나온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에게 고정 출연 제안이 왔소. 주말 지상파 황금 시간대요. 영광이지."
"오… 굉장한데?"
나도 이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환희도 어느새 장난 같은 말투를 멈추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효, 횽. 그거 대단한 거잖아여!"
환희와는 다르게 재호는 말투를 흩뜨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맞소. 가문의 영광이지. 하지만 고사할 생각이오.”
환희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약간 흥분한 듯했다.
"왜여! 일단 자신을 알려야져."
나는 우선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재호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어 보였다.
재호가 한쪽 눈을 감은 채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맞소. 하지만 알리는 건 우선 '내가 무엇을 알릴지'가 정해진 다음이오."
재호의 말이 잘 이해되질 않아 내가 되물었다.
"무엇을 알릴지?"
"그렇소. 과인… 아니, 소인이라고 해야겠군. 소인은 아직, 프로듀서로서 부족하오. 아직 어떤 방향으로 갈지, 그 방향과 개성이 잡히지 않은 상태이오. 이런 상태에서 나를 알려서 무엇 하겠소? 소모만 될 뿐이오. 우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음악을 할지부터 자리를 잡아야 하오."
"제법 멋있는 소리를 하네."
'말투는 여전히 열 받는 말투지만.'
재호를 향한 존경을 표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환희도 감탄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
"머시써여 횽. 응원할게여. 화이팅."
"땡!"
재호가 이때다 싶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환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런 재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와... 설마… 저거 지금까지 전략이었던 거냐?'
환희가 자기 금칙어가 '화이팅'인걸 확인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는 억울한 아이처럼 재호에게 항의했다.
"아, 횽! 지금까지 다 구라였던 거에여? 실망이에여!"
"허허. 구라라니. 전략이라는 걸세. 전략. 작전을 구사하는 게 사람 아니겠나?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게."
계속해서 사극 말투를 고수하고 있는 재호가 얄밉다는 듯이 환희가 외쳤다.
"아오! 개인적으로 안 받아들일 수가 있어여?"
아무튼, 이제 대결은 나와 재호의 1대1 대결이 되었다.
일단 상황은 내게 불리했다. 여전히 재호는 이상한 사극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호는 어릴 때부터 사극의 광팬이었다. 좌우지간 사극이라면 한국 사극은 물론 일본, 중국, 심지어 유럽의 사극까지 가리지 않고 외울 때까지 봤다.
그래서 그런지 재호의 사극 말투는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았다.
환희의 애니 여주인공 말투와는 차원이 다른 안정감이 있었다.
'게다가 저 녀석, 분명히 약간 진심을 섞었어.'
사람이 100%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진실에 살짝 거짓말을 더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재호의 말이 그랬다. 정말로 재호는 예능을 고사했을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프로듀서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진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기에, 나와 환희가 의심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었다.
그의 진실성 덕분에 재호의 말속에는 매일같이 숙식을 해결한 동료까지 속겠다 싶은 리얼리티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재호에 대한 내 생각 중에 진짜 리얼한 생각을 던져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래야 승산이 있었다.
'어디 보자… 솔직히 재호에 대해서 내가 했던 생각이 뭐가 있을까? 공부 잘한다? 재수 없다? 느끼하다? 아… 하나 더 있네.'
여러 생각을 끝내고 나는 말을 꺼냈다.
"재호야."
이상한 사극 톤을 끝까지 고수하며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근데 진짜, 나는 개 부러운 게 하나 있어."
"무엇이 부럽단 말인가?"
그를 흔들고 말리라 다짐하며 나는 다짐하며 말했다.
"니 외모 말이야 외모."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재호가 깜짝 놀랐다.
"무, 무슨 말인가?"
"살을 빼면 다 잘생겨지는 줄 알았지. 실제로 좀 그랬어. 나는 지금 내 외모에 만족해. 근데 아무리 살을 빼도, 너 정도는 안 되더라."
역시 나를 낮추며 상대방을 높이는 전략이 먹힌 것 같았다.
할 말을 잃은 재호는 입을 다물었다.
"으… 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호는 외모 칭찬에 약했다.
정확히는 외모 칭찬을 부끄러워했다. 분명히 그는 내 칭찬에 동요하고 있었다.
"외모 신동 원재호라니. 그런 별명 한번 받아보고 싶다. 나는 매번 둔재야 둔재. 공부도 둔재. 외모도 둔재."
"그, 그만하시게."
손사래를 치며 말리는 재호를 무시하고 나는 계속 그의 외모를 칭찬했다.
"외.모.신.동. 원재호 부럽다."
"에이~씨 그만하라구!”
걸렸구나! 싶어 내가 재호를 가리키며 외쳤다.
"땡!”
"뭣!"
나의 ‘땡!’에 재호는 순간 몸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아하하하하 금칙어 정답은 '에이'였습니다~."
"아! 아깝다구~"
나는 만족스럽게 재호를 놀린 뒤, 내 금칙어를 확인했다.
[솔직히]
"헉!"
내 금칙어를 보자마자 한 1분쯤 전에 내가 속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디 보자… 솔직히 재호에 대해서 내가 했던 생각이 뭐가 있을까?]
'와… 이거 나 운 좋아서 이기긴 했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운도 실력이었다.
그렇게, 제1회 금칙어 게임은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그 후에 우리는 새벽까지 보드게임을 하다 느지막이 오전에 일어났다.
재호는 이미 일어나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는 아침형 인간이 됐는데. 아무리 그래도 재호는 못 이기겠단 말이야.'
환희만 태평하게 소파에 대자로 누워 편히 자고 있었다.
내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보니 재호가 벌써 씻고는 키보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재호는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며 물었다.
"벌써 일어났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다.
"네가 더 빨리 일어났지 뭐. 환희는 어쩌냐? 쟤가 정리해야 하는데 제일 늦네.”
재호가 싱긋 웃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환희는 평소 수면 패턴으로 볼 때… 어디 보자… 1시간에서 2시간은 지나야 일어날 거 같은데?”
“너는 네 시간이 아니라 남들 시간도 계산하냐?”
잔소리하듯 묻는 내게 재호는 씨익 웃으며 설명해줬다.
“맨날 같이 있었잖아. 그 정도는 기본이라구. 참고로 노을이 너는 9시 30분에서 10시 30분 사이에 일어날 거라 했는데 딱 10시 7분경에 일어나더라구.”
‘...변태 새끼 진짜.’
이런 속마음은 대충 넘기고, 나는 2시간 후가 몇 시인지 보기 위해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간 후면 12시도 넘는데?”
“머 우리가 깨우면 되잖아. 시키면 되구. 노을이 너는 1등이니까 가만히 있어.”
“그래.”
재호는 내 대답을 끝으로 다시 키보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재호의 연주를 감상했다. 새소리 외에는 재호의 피아노 연주밖엔 들리지 않았다.
재호가 키보드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듯 연주하고 있었다.
"키보드 좋다. 연주할 때 감촉이 매끄럽고 좋네."
재호가 키보드를 슥슥 두드리며 말했다. 하우스 밴드 사람들 추천을 받아 산 제품이니 좋을 만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답했다.
"뭐 그렇지."
재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매일 이걸로 연습하는 거야?"
내가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 발성 연습도 하고. 부를 노래도 연습하고."
"대단하네."
재호가 연주를 멈추고는 여기저기 키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 키보드의 여러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 녹음 기능도 있네. 한번 들어 볼까? 이건 뭐야, 일본 쇼케이스 연습?"
살짝 들뜬 듯한 재호의 물음에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일본어로 곧 노래 불러야 하니까. 연습해 본 거야. 근데 녹음물을 들어본 적은 없어."
"들어보자구~."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재호가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데뷔곡인 '음식남녀' 일본어 버전이었다. 어제 파티 전 열심히 연습했던, 바로 그 버전이었다.
그런데 녹음물을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노래 자체는 완벽했는데… 뭔가가 부족했다.
"뭐지? 왜 이러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