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비원더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배영웅 매니저는 오랜만에 휴가를 얻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개인 휴식 시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연예계에서 워라밸은 사치였다. 매니저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는 다른 대다수의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일 중독자였다.
그래서 배영웅 매니저는 휴가 첫날의 마지막을 일로 장식하게 되었건만, 그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건, 그가 자처한 일이었다.
배영웅 매니저는 시장에서 간단히 장을 봤다. 이번 권노을 집들이 요리 담당이 된 주환희가 자신이 원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정한 재료들이었다.
주환희는 '실장님 휴가 첫날인데 어떠케 부탁해여?'라며 자신이 직접 장을 보려 했지만 배영웅은 자신이 해주기로 했다.
가수가 할 필요 없는 잡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매니저가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배영웅과 같은 대형기획사 실장급이 하는 일은 아니었다. 막내가 하면 딱이었다.
그런데 작년 말, 배영웅 실장은 갑자기 좌천되듯 기존 아이돌 팀의 실장 자리에서 비원더의 단독 매니저로 보직이 변경됐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주변 경쟁자와 동료들이 수군댔었다.
[저 녀석, 끈 떨어진 거 아니야?]
[우리랑 술 한 잔 안 마시고 맨날 고고한 척하더니 그럴 줄 알았어.]
[이제 와서 다시 로드를 시키다니 선생님도 잔인하네. 나 같으면 뒈지고 만다.]
하지만 배영웅은 천채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천채왕은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사람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함께 일한 사람을 내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명분과 이유를 가지고, 이를 소상히 설명한 후에 실행했다.
그런 천채왕은 배영웅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작은 좀 초라하지만. 끝은 엄청 좋을 거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잖아?]
그래서 배영웅 매니저는 일단 천채왕을 무턱대고 믿기로 했었다.
배영웅은 다시 20대 후반, 그가 신입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비원더 3인을 차로 태우고 운전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했다.
사실 경력이 어느 정도 찬 실장급이 갑자기 다시 초짜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짜증도 잠시, 배영웅은 천채왕의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말로' 천채왕은 비원더의 매니저 자리가 너무 소중해서 배영웅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애초에 비원더는 TYB가 주로 제작했던 스타일의 아이돌 가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서 아이돌 연습생 출신은 주환희뿐이었다.
더군다나 주환희와 원재호는 비원더의 곡 작업에도 참여했다.
비원더의 모든 부분이 TYB의 기존 가수 제작 방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차피 모든 매니지먼트 노하우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기존 방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비원더는 사실상 TYB 내부에서 새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회사였다. 이런 곳은 신입이 아니라 베테랑이 필요했다.
바로 그게 배영웅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
배영웅 본인이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낸 다음에는 김나리 인턴을 시작으로, 하나하나 자신을 대신할 인원을 늘려나갔다.
그렇게 비원더는 데뷔 후 반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즈음에는 이미 비원더 매니지먼트는 5명이 넘는 훌륭한 팀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제 천채왕은 비원더의 영역을 확장해 해외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
구룡도 쇼케이스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배영웅은 단숨에 신입으로 강등된 '끈 떨어진 매니저'에서, 천채왕 최고의 심복이자, 사실상 '주식회사 비원더'라는 자회사의 대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천채왕의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 배영웅에게는 음식 재료를 사서, 멤버들에게 전달하는 가벼운 심부름 따위는 전혀 짜증 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일상에서 멤버와의 사소한 접점을 직접 만들어 두어야, 위급할 때 가수가 매니저를 신뢰하는 법이었다.
식재료를 모두 산 배영웅은 차를 돌려 권노을의 새 빌라로 향했다.
돌아가는 배영웅의 차 안 카스테레오에서는 그가 선곡한 테빈 캠벨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영웅은 항상, 차에서 자신이 담당하는 가수가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틀었다.
이는 배영웅에겐 단순 매니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음악 교사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대형기획사는 어디까지나 음악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기획사의 본질은 결국 음악이었다.
음악에 대한 이런 약간의 관심과 배려, 지원이 배영웅을 대한민국 최고의 대형기획사 TYB에서도 가장 돋보이고 출세하는 매니저로 만들었다.
하지만 비원더를 담당하면서 배영웅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이 이질감은 뭔가, 그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최근에야 배영웅은 그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노래, 이 정도면 우리 아티스트가 더 잘 부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불러일으킨 감정이었다.
비원더 전에는 그랬던 적이 없었다. 배영웅은 언제나 별다른 고민 없이 장르별로 세계 최고의 가수의 대표곡만 선택해서 차에서 틀어 주었다.
배영웅이 보기에 제아무리 뛰어난 가수라도 TYB의 20대 초 중반 아이돌 가수가 팝가수를 능가하는 가창력을 가진 적은 없었다.
...권노을을 담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권노을은 달랐다. 웬만한 알앤비 가수의 노래를 들어도, 왠지 권노을보다 더 잘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팝 가수의 신곡을 들어도 ‘이 부분은 권노을이 불렀다면 이런 방식으로 불러서 더 좋았을 텐데'라는 식으로 아쉬운 부분이 점점 보였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배영웅은 지금, 세계적인 수준의 가창력을 가진 가수를 처음으로 매니징 하는 것이었다.
그건, 음악을 사랑해서 이 업계에 뛰어든 사람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훈장이었다.
'천채왕 선생님이 정말 내게 엄청난 선물을 해준 건지도 모르겠어.'
침착하게 배영웅은 권노을의 애드립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팝가수의 방식이 아닌 '권노을다운' 방식으로.
* * *
권노을의 새 빌라.
그곳에선 집들이가 한창이었다.
참석자는 주하늘과 원재호가 전부였다. 배영웅 실장의 도착을 기다리던 권노을이 주하늘에게 팍 짜증을 냈다.
"아 뭐 하러 실장님 보고 오라 가라 했어! 그냥 피자 시켜 먹지.”
하늘이가 입을 비죽 내밀며 변명했다.
"아니~ 메뉴 정하고 제가 혼자 시장 보려고 그랬는데. 실장님이 절대 그러는 거 아니라고 자기 시키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부탁했죠."
"실장님 얼마 만의 휴가인데 그걸 못 참고 부탁을 하냐. 그냥 네가 사 오면 됐지..."
내가 계속해서 하늘이에게 잔소리하자, 재호가 와인잔을 닦는 걸 멈추고는 슬쩍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됐어, 노을아. 실장님도 생각이 있어서 오시겠다 하셨겠지. 오기 싫은 데 억지로 오신다고 하셨겠어? 실장님도 집구경 하고 싶으신가 보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이 집을 구매하고, 이사하는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배영웅이었다.
이 집에 대해서는 이미 나보다 더 잘 알았다.
굳이 집을 보고 싶어서 올 리는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문을 열었다. 평소와는 달리 캐쥬얼한 후드티에 면바지 차림의 배영웅이 서 있었다.
그래도 영국 옥스브리지 대학교 학생에서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교 학생 정도로 바뀐 듯, 여전히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배영웅이 씨익 웃으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종이백을 내게 건넸다.
"환희 아티스트가 요청한 식재료 가져왔습니다."
내가 배영웅에게도 먹고 가라 초대했지만, 배영웅은 선약이 있다며 휘이익 가 버렸다.
떠나면서 그는 우리끼리 좀 놀고 있으면 돌아오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에게 약속이 있다니 나도 별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환희에게 부엌을 맡겼다.
"제가 잘해볼게요."
주하늘이 제법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했다.
요리가 취미인 재호가 환희의 움직임을 보고 상당히 놀라 물었다.
"환… 아니 하늘이 너. 하면 잘하잖아? 나는 너 요리 못하는 줄 알았다고."
"못해요. 냉면만 해요."
나는 하늘이가 냉면만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냉면만 하는 거야? 이왕 하나만 한다면 좀 범용적인 거 하면 좋잖아? 김치찌개라던가?"
내 질문에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답했다.
"냉면을 맛있게 하는 데가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제가 배웠어요. 막국수, 비빔냉면, 함흥냉면, 평양냉면… 다 말만 하세요."
재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걸로 줘. 그게 제일 났거덩~"
재호는 아무래도 구룡도에서 쉐프 역할을 좀 해서 그런지, 이제는 요리에 관해서는 당분간 신경을 끊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늘이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재호는 내 새로운 집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거실에는 음악 CD들, 비원더의 다양한 수상 내역 등이 깔끔한 북유럽풍 가구 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구석구석에 동생의 국악 관련 수상 내역, 사진, 국악기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한층 더 멋스러웠다.
재호는 구경을 마치고는 은근슬쩍 내게 물었다.
"집 새로 구한 거야?"
“그래."
"좋다. 이전 집은 너무 좁았거든. 너 혼자 작업하기도 벅차 보이더라."
재호도 확실히 나의 새 보금자리가 더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다행이지. 집을 구할 수 있어서."
내 말에 재호가 자기 얘기까지 하며 거들었다.
"더 좋은 집 사야지.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도 부모님에게 꼬박꼬박 돈 보내드리고 있거든."
그건 의외였다. 재호는 제법 부잣집 아들이었다. 게다가 부모와는 잘은 모르지만, 썩 관계가 좋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부모에게 예의는 깔끔하게 차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점은 재호다웠다.
내가 무심한척하며 재호에게 물었다.
"집 어떠냐?"
"좋네. 사실 말이 바른 말이지, 심지어 여동생이 있는데 방이 하나가 말이 되느냐고. 최소한 각자 방 하나씩은 있었어야지."
"나는 거실에서 자면 되잖아."
재호는 나의 말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짐은? 네 짐하고 동생 짐이 섞일 텐데?"
"아…”
나는 그제야 ‘그래서 동생이 우리 집에 기를 쓰고 짐을 안 옮겨 놓았던 거구나’ 싶었다.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재호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
"그렇게 눈치가 없는데 용케 동생한테 욕 안 먹고 산다?"
'많이 먹거든? 네가 없을 때 할 뿐이야. 게가 얼마나 입이 걸걸... 한데!'
라고 내 동생의 실체를 재호에게 폭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동생 욕을 남 앞에서 할 필요는 없어서 그냥 관뒀다.
“그건… 그렇지. 동생이 착해서 그래. 하하 참 난 동생 운도 좋단 말이야~."
내가 마음에도 없는 동생 칭찬을 하자, 재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라 그래도 너도 좋은 오빠야. 네가 노래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잖아?”
"뭐가?"
내가 되묻자 재호는 나지막이 답했다.
"가족 말야."
정답이었다. 물론 가수가 되고 싶은 건 내 개인의 꿈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큰돈이 없어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굳이 가수로 매우 큰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가 절반 정도는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나의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큰 의미에서 보면 재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재호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재호는 한숨을 한 번 크게 쉬며 말했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잘 돼야 할 텐데."
재호의 푸념에는 나도 놀랐다.
재호도 고민이 있을 수가 있구나 싶어 물었다.
“너도 고민이 다 있구나?"
재호는 명문대학교를 입학한 수재였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거기에다가 직접 프로듀싱까지도 모자라, 매력적인 저음으로 우리 팀 노래의 도입부를 맡은 능력 있는 보컬리스트이기까지 하다.
이 모든 특성 덕에 재호의 인기는 특히 비원더에서도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재호는 딱히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었다. 가족과의 관계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나처럼 누군가를 부양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를 몰락시켰던 사건은 내가 다 해결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재호의 삶은 걱정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 * *
의외로 하늘이 표 냉면은 매우 맛있었다.
"이거 맛있는데? 어떻게 만든 거냐고?"
비원더 공식 쉐프인 재호가 인정하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심지어 만년 다이어터인 나도 다이어트를 잠시 잊고 한 그릇을 싹 비웠을 정도였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하늘이가 말했다.
“구룡도에서 사실 다른 거는 괜찮았는데, 냉면이 그리웠어요! 어디서든 냉면은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해둬야 할 거 같네요."
재호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해외에서는 숙소 생활할 거 같은데 네가 요리 부담을 좀 덜어주면 좋지."
재호의 말에 하늘이가 주춤하며 답했다.
“제가 할게요... 가끔은."
재호가 하늘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고 시늉하며 말했다.
“그럼 보통은 다 내가 해라! 이거냐 이 자식!"
그렇게 하하 호호 깔깔대는 사이, 시간이 꽤 늦어졌다. 그러면서 우리의 대화도 점점 진지해졌다.
"이번 타이틀곡 방향은..."
재호는 비원더의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다음부터 제가 추구하는 가사의 방향은..."
환희는 자기가 쓴 가사에 관한 피드백을 받고 싶어 했다.
"앞으로는 이런 장르도 해보고 싶은데..."
나도 내가 앞으로 우리 밴드 앨범에 담고 싶은 음악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깊이 있는 대화를 깬 건 배영웅 실장의 전화였다.
-뭐 하고 있으세요, 다들?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나는 배영웅에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대충 알려 줬다.
배영웅 매니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계속 이렇게 서로 멀뚱멀뚱 보면서 음악 이야기만 날 샐 때까지 하는 거예요? 술 한 방울도 안 마시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배영웅 매니저에게 답했다.
"저희는 이게 좋아서요."
진지한 얘기만 하는 우리가 답답했는지, 듣다 못 한 배영웅 매니저는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제안을 했다.
-그래도 조금… 집들이인데 분위기를 띄워 보면 좋을 거 같네요. '금칙어 게임'이라도 함께 해보면 어때요?
‘금칙어 게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