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콘서트 당일, 모든 멤버와 문루아가 회의실에 모였다.
문루아를 본 우리는 흠칫 놀랐다. 그녀가 인형 옷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환희가 깜짝 놀라 문루아에게 물었다.
"선배 뭐에여? 웬 너구리 옷을 입고 있어여?"
"너구리 아니라 다람쥐예요… 영상 촬영을 좀 했어요."
환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인형 옷 차림으루여? 안 더워여?”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렇게라도 해야 외출할 수 있어요.”
재호도 문루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되물었다.
“그런 차림으로 어디를 가신 거죠?"
"급하게 구룡도 관광청 지원받아서 인형 옷 입고 동물원, 식물원을 방문했어요."
문루아는 어제 그녀와 나, 그리고 노경진 PD와 함께 한 회의에서 논의된 계획대로 하고 있었다.
문루아는 일전에 ‘잇츠쇼타임' 쇼케이스 비디오를 구해다 주었던 구룡도 총영사에게 부탁해 구룡도 관광청과 협업을 결정했다.
나는 그녀가 급하게 구룡도 관광청에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역시나 문루아였다.
[총영사님 주변에 제 팬이 많아서…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어요. 사인만 좀 많이 하면. 심지어 요트도 빌려준다고 했어요.]
환희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입 밖에 냈다는 게 환희가 나와 다른 점이었다.
“선배 대단하네여…. 관광청이 지원을 막 해주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말하는 환희를 보며 문루아가 장난스럽게 씨이익 웃으며 물었다.
"누구랑 같이 촬영했는지 알아요?"
"몰라여~?"
"젤다랑 했어요."
"허……."
잠시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환희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와 재호, 문루아 선배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그렇게 환희를 한참 놀리는 분위기를 멈춘 건 배영웅 실장이었다.
전화 회의 시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우린 배영웅의 핸드폰을 통해 천채왕과 마지막 회의를 했다.
전화 통화 속 천채왕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밝았다.
-준비 잘 되고 있지? 김나리 직원 보고자료 잘 보고 있어.
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넵."
언제나처럼 김나리 직원은 우리의 공연 및 활동 경과를 매일 정리해서 회사에 보고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공기처럼, 안 보이는 각도에서 우리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덕분에 천채왕은 이번 구룡도 촬영에 동행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우리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모든 상황을 훤히 알고 있었다.
-재호. 편곡 이야기 들었어. 고민 많았다고?
재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넵."
-재호가 비원더 공연에서 밴드 프로듀싱을 맡는 건 처음이니까. 회사가 좀 더 배려했어야 했는데. 워낙 프로듀싱을 잘하니까 방치한 면이 있는 거 같아. 이건 내가 잘못했어.
"아, 아닙니다."
-그래도 마지막 편곡 방향 너무 좋더라. 나도 참고가 될 거 같아. 고생했어.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네넵!"
재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다음은 환희 차례였다.
-환희야.
"네… 네!"
환희는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조심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 넵!"
그가 뭘 조심하라는 건지, 나도 알고 환희도 알고 천채왕도 알았다.
뭔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노을이야 뭐 잘하고 있지. 아, 대답하지 마, 목 아껴. 중요한 무대 앞두고 있으니까. 수분 섭취 많이 하고.
나는 천채왕의 말대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문루아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대신 답했다.
"이틀 만에 몸은 대충 만들었네요."
천채왕은 문루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물었다.
-어 나도 배 실장한테 들었어. 턱선이 다시 날렵해졌다며?
문루아가 의기양양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다 제가 알려 준 '간헐적 단식' 덕분 아닐까요?"
문루아의 이 질문을 시작으로 그녀와 천채왕의 가벼운 실랑이가 시작됐다.
-뭐? 루아 너 또 그런 비과학적인 걸 알려준 거야?
"경험적으로 효과가 있다고요!"
-경험은 과학이 아니야!
"이렇게 빠르고 건강하게 살을 빼는 방법이 또 있다고요~?"
역시나 문루아는 문루아였다.
그나마 비원더 중 천채왕과 친한 편인 나도 그와 통화할 때면 긴장을 좀 했다.
하지만 문루아는 아니었다.
친한 오빠와 통화하듯 거침없었다.
그만큼 둘의 신뢰 관계가 돈독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뭐 하여튼! 당장 턱선이 살았다니 다행이고. 무대에 서는 사람은 항상 관리가 되어 있어야 해. 이번에는 현지 촬영 장면을 보여주는 예능이라 좀 풀어 줬는데, 앞으로는 해외 활동 중에도 식단은 하자?
맛있는 로컬 푸드를 양껏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풀이 죽은 내가 답했다.
"네에..."
잠깐, 근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천채왕이 엄청난 발언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턱선? 아니었다. 무대? 관리? 그건 당연한 거였다. 예능? 그것도 아니었다.
해외 활동? 오케이. 그거였다.
환희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듯 물었다.
“해외 활동이여?????!"
천채왕은 ‘그게 뭐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냐?’는 듯이 태연하게 답했다.
-어 몰랐어? 일본 쇼케이스 잡을 거라고 얘기했잖아.
그야, 나도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 것 같다'라는 느낌이 있긴 했다.
한편으로 그냥 단발성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천채왕에겐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쇼케이스는 그저 시작일 뿐이고, 이후 아예 비원더의 활동 중심을 해외로 옮길 속셈이었다고 천채왕은 설명했다.
-그렇게 해야 해. 이제 한국에서 비원더는 사실 편해. 그냥 콘서트 해도, 지금처럼 활동하면 한 5년 잘 먹고 잘살 거야. 그리고 군대 다녀오고 완만하게 착륙하는 거지. 그게 나쁘단 게 아니라, 뭔가 새롭지 않잖아?
하긴 천채왕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지금은 2006년, 이미 문루아와 같은 댄스 가수 중에는 아시아 스타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가창력 위주의 발라드 가수 중에는 해외의 벽을 넘은 가수가 드물었다.
그나마 한류 드라마 인기를 업고 OST 가수가 조금씩 활동할 따름이었다.
'아니, 심지어 2020년에도 그런 가수는 없었지.'
회귀자인 내가 보기에도, 가창력 위주의 한국인 월드 스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도전이지만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천채왕의 얘기에 재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 너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요? 팝가수들 너무 잘하고. 해외에서 굳이 저희 음악을 들을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심지어 나도 재호의 말에 단호하게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천채왕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비원더의 강점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여지까지 TYB의 가수들은 모두 기획 가수였어. 내가 처음부터 키웠지. 사실은 루아도 처음에는 그랬고.
문루아가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이에요. 초등학생 때부터 TYB에서 살았으니까요. 외국어도 배우라고 유학까지 보내줬고."
-그래. 근데 비원더 너희들을 봐. 환희 정도만 제외하면 모두 연습생 기간이 없었어. 환희 또한 댄스 가수로 훈련받은 거고, 지금의 뛰어난 가창력과 멜로디 메이킹 실력, 작사 실력은 스스로 얻은 거야.
살짝 천채왕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사고뭉치에, 하여간 회사 말 안 듣는 환희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허용될 만큼 회사 연습생 대다수가 갖지 못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문루아가 말했던 '줄 수 없는' 능력이었다.
[스타성이 없는 사람에게 스타성을 줄 수는 없어요.]
문루아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글로벌 스타가 되는 법은, 전 세계에 먹혀드는 스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 말 말이었다.
환희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는 작사와 멜로디 메이킹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태어났다.
이런 걸 회사가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헤헤..."
환희도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히죽거렸다.
환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천채왕은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기다가 재호는, 뮤지션으로서 재능, 프로듀서로서는 기량을 갖고 있지. 단순히 편곡을 좀 만지는 게 아니야. 앨범 전체를 주도하고, 공연 전체를 주도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 이건 누가 알려 줄 수 없지. 그걸 재호는 가지고 있어.
나는 슬쩍 재호를 봤다.
그의 표정은 그렇게나 기뻐 보일 수가 없었다.
놀라기도 놀랐는지 가뜩이나 큰 눈이 소 눈망울처럼 커져 있었다.
심지어 약간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기도 했다.
천채왕에게 좀만 더 칭찬을 들었다가는 재호가 훌쩍거리기 시작할 기세였다.
-그런데 더 미친 건 그런 애가 잘생겼다는 거야! 나는 외모 하나 가지지도 못했는데! 재호 얘는 외모랑 프로듀싱 능력을 모두 가진 거야. 이건 진짜~ 어려운 거지. 얼굴만 잘생겨도 땡큐인데 음악에 진지하고. 심지어 잘해. 이런 인재를 어디서 구하겠어?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더 하면 재호가 울 것 같았다.
다행히(?) 천채왕은 내게로 화제를 돌렸다.
-노을이는 뭐 말할 필요가 없지. 노래 너무 잘하잖아? 그냥 체급이 달라. 팝 시장에서도 통할 목소리야. 게다가…
갑자기 천채왕이 잠시 뜸을 들였다.
뭔가 적절한 표현을 고르는 듯했다.
비원더 멤버들과 문루아, 그리고 배영웅 실장까지 모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 뭐지. 왜 나만 말을 고르는 거지?'
1만 년 같은 침묵이 끝났다.
수화기 너머로 천채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저렇게 대놓고 노래 잘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잘 생각해봐. 우리 회사에 저런 가창력 가수 많지는 않아. 노래를 잘한다는 게 꼭 경쟁력은 아니거든.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하고, 감동을 줘야지. 노래 실력에 너무 자신이 있으면 오히려 그게 감동을 주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해. 종종 그러지. 그래서 나는 가창력 가수 제작을 잘 하지 않아.
이래서 천채왕은 말을 고른 모양이었다. 하여튼 자기가 썩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천채왕처럼 무게감이 큰 인물이라면 더더욱.
천채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노을이는 좋아. 노래를 너무 잘하는데. 노래를 잘하려고 하는 일이 거의 없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잘하는데도, 자기 기술 과시가 없어. 그 겸손함이 너무 좋아. 이런 가수는 한국 땅에서 처음 아닐까?
"아이고..."
천채왕의 엄청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내 어깨를 재호가 툭툭 두드렸다.
환희도 씨익 웃으며 내게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게다가 더 미친 거는…. 그런 겹치지 않는 재능 셋이 뭉쳤다는 거야! 야~ 이건 진짜 신이 축복을 너무 많이 몰아준 거야. 너희가 안 되면, 누가 월드 스타가 되겠냐? 이건 당연히 제작해야지. 그게 이렇게 과분하게 받은 축복을 돌려주는 길이야. 나는 진심으로, 해외 팬들을 위해서 너희 해외 활동을 제작하는 거야. 한국 사람들만 듣는 게 아까워서.
귀가 간지러울 정도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천채왕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글로벌 스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 구룡도에 왔을 때, 내가 담고 있던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저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곳에 내 몸을 맡기면 됐다.
게다가 이미 우리에게는 그런 요소가 충분했다.
하지만 통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어차피 곧 알게 될 거라 말하는 건데. 잇츠쇼타임 해외 활동이 우리보다 한발 빨랐어.
재호가 천채왕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구룡도에서도 많이들 알고 있더라고요."
-그 정도가 아니야. 일본에서도 계속해서 TV 쇼에 나가고, 공연에 나가는 등 융단 폭격이야. 인지도가 빠르게 쑥쑥 올라가고 있어.
잇츠쇼타임에 관한 천채왕의 말에 다시 회의실 공기가 좀 무거워졌다.
비원더와 잇츠쇼타임은 정말 비슷한 그룹이었다.
멤버 숫자부터 장르까지 하나같이 비슷했다.
국내에서 그들은 우리와 데뷔 동기였다.
적어도 시작점은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과 그 밖에 여러 요소가 더해져, 비원더가 잇츠쇼타임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국내에서 1위가 되어 입지에 쐐기를 박기 위해 국내 위주로 활동하는 동안, 잇츠쇼타임은 과감하게 해외 활동에 투자했다.
소인중의 화교계 및 일본 음악계 인맥에다 '이스트 웨이브' 같은 팝스타의 곡까지 받았으니, 당연히 반응도 빨랐다.
비원더는 이제, 잇츠쇼타임의 아류작이 되었다.
후발주자로 잇츠쇼타임을 이기려면 더욱 큰 노력이 있어야만 했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채왕이 말했다.
-...하지만 꼭 후발주자가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재호와 환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천채왕의 말에 동의했다.
'후발주자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건 맞는 말이야. 선발주자의 실수를 미리 배우고, 더 나은 방향에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번 공연이 바로 그 예시였다. 우리는 잇츠쇼타임의 공연을 미리 보고 그들의 실수를 확인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잇츠쇼타임이 한 실수만 개선해도, 그들보다 훨씬 나은 데뷔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