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다음 날 메뉴는 완탕면이었다. 이번에도 우리는 구룡도 현지 맛집에서 식사했다. 모든 식사 장면 하나하나가 다 촬영 분량이었다.
그중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건 역시나 환희였다. 어찌나 복스럽게 밥을 잘 먹는지, 내가 다 놀라울 정도였다.
환희가 10여 년이 지난 후에 가수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유튜브 먹방으로 충분히 먹고살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으니 환희는 음식을 한가득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너무… 마시써여. 꿀꺽꿀꺽."
환희와 다르게 재호는 찬찬히 재료를 하나하나 음미했다. 성급하게 완탕면을 먹는 환희가 못마땅한지, 차를 홀짝거리며 재호가 중얼거렸다.
"이 육수… 만드느라 요리사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해보라고. 이거 진짜 힘들거든? 그렇게 막 먹을 게 아니야."
그 소리를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재호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 요리사 다 됐네."
"말도 마. 요리가 하다 보니 진짜 힘들더라고. 원래 취미가 요리였는데, 그만둬야 하나 싶은 정도야."
그러고 보면, 나는 딱히 이렇다 할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식당 아르바이트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식당 일을 하기에 전생의 내 몸은 너무 비대했다. 그래서 내게는 아르바이트의 추억 따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식당 일을 하는 추억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정말 좋은 여행이었다.
오히려 관광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당 일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 감사한 일인데.'
나는 이 짧은 여행 기간, 더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며 지내기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불평을 늘어놓을 시간 따윈 더더욱 없었다.
나는 반 그릇만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딱 반 그릇만 담아 놓은 상태였다.
환희가 그런 나를 보더니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내게 소리치듯 말했다.
"횽, 그거 남겨여? 저 주세여!"
그런 환희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희가 내 그릇을 가져가려 하자 재호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야, 일부러 남겨놓은 거잖아."
"저 준다 잖아여."
환희는 자기를 가로막는 재호의 손을 떨치고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에 재호도 지지 않고 단호히 환희에게 말했다.
"아닐 거라고."
이러다 둘이 싸우겠다 싶어 보다 못한 내가 툭 던지듯 끼어들었다.
"배불러."
재호는 그런 내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벌써? 너 환희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잘 먹잖아?"
"그렇긴 하지만."
사실 내가 반 그릇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어제 문루아에게 배운 다이어트 비법 때문이었다.
그 방법은 정말이지 어이없는 정도로 간단했다. 그녀의 비법은 '내 배를 잘 알라.'는 거였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배부른 줄도 몰라요. 다이어트 비결은 '배부르다고 말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재호의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문루아의 말을 되뇌었다.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다라...'
* * *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시 언제나처럼 식당 오픈 준비를 했다. 환희와 나는 여유롭게 천천히 마트로 걸어가 신선한 식재료를 사 왔다. 하루도 묵히지 않은 신선한 채소를 그냥 적당히 비벼서 내놓기만 해도 손님의 반응이 이렇게 좋다는 사실을 어제 장사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신선한 식재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식당에 뭔가 불안한 공기가 흘렀다.
드링크 바에서 계속 음료수를 만들고 있는 문루아를 한 무리의 여성 손님들이 자꾸 힐끔힐끔 쳐다봤다.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선배한테 경고를 해줘야…'
이런 내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니나 다를까 그 여성 손님들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댔다.
"꺄아아아악!"
'이런.'
역시 나의 안 좋은 예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문루아 씨!!!"
"그 아시아의 달 문루아?"
"사인해 주세요~~!!!! 사진 찍어 주세요!!!"
한 무리의 여성 손님들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다들 소리치며 문루아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우르르 모여든 군중들에게 문루아를 둘러싸였다.
이제는 그녀의 안전이 위험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이를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 문루아가 곧바로 그녀가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내게 휙 던져줬다. 그리고 황급히 내게 지령을 내렸다.
"레시피는 책상 위에 있어요! 음료수 부탁해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터프함에 나는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엉겁결에 대답부터 했다.
"넵."
문루아는 빠르게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가게 바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노경진 PD가 제작진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문루아 씨 따라가세요. 빨리!"
"네네!"
그렇게 별안간 벌어진 큰 소동은 끝이 났다.
제작진 일부가 문루아 일행을 따라 사라지자 노경진 PD가 한숨을 쉬듯 말을 토해냈다.
"가게가 위험하니까 먼저 나가 주셨나 보네요. 너무 배려해주고… 고맙네요."
내가 조심스레 노경진 PD에게 물었다.
"문루아 선배 정체가 밝혀져 버렸네요. 촬영에 문제가 생긴 거죠?"
“언젠가는 걸릴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그렇게 됐네요. 어쩔 수 없죠. 제 기획의 한계였던 거 같아요. 신경 쓰지 마요."
"걱정이네요. 가게는 어떻게 될지..."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나를 보며 노경진 PD도 자신의 걱정거리를 내비쳤다.
"사실 가게는 위장이죠. 가게로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내는 청년이 된 다음에, 마지막에 빡! 하고 공연으로 반전을 줄 계획이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일리 있는 노경진 PD의 염려에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렇군요… 근데 사실, 저희는 가수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잖아요?"
"라기보다는 대부분이죠?"
역시나 그랬다. 극히 일부만 '킹 오브 싱어' 등을 통해 나를 봤을 뿐, 구룡도의 사람 중 대부분은 나를 잘 몰랐다.
그러므로 아직은 방송은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 '아시아의 달' 문루아가 있었다면서요!”
"문루아 어디 있어요!"
"문루아!"
...좀 쓸데없는 손님들이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었다.
* * *
우리는 가게 정리를 완료하고 가게 앞 주변 길거리까지 쓸며 하루 장사를 마무리했다.
‘그 소동’ 때문인지 오늘따라 하루가 더 길게 느껴졌다.
열심히 청소하는 나를 지켜보던 환희가 말했다.
"횽, 거기는 가게 아니자나여. 거기까지 청소할 필요 없어여."
나는 환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하던 일을 하면서 대답했다.
"우리 가게 때문에 동네가 시끄러워졌으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야지."
“횽은 마음씨도 좋네여!"
해맑은 환희의 칭찬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말을 흐렸다.
"뭐..."
솔직히 어느 정도 계획도 있었다.
아까 노경진 PD와 이야기해보고 깨달았다.
이번 기획은 구룡도 명물인 항구 거리의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비원더 3인이 식당을 차리는 것처럼 잠입해서, 마지막에 '짜잔!' 하고 등장하는 게 핵심인 기획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이곳의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이 좋았다.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법한 일을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같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길거리를 치워주는 일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점심시간에 벌인 소동이 너무 미안해서 한 일이지만 말이었다.
옆 카페 주인이 내가 청소하는 걸 빤히 지켜봤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옆 카페 주인이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할 시간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벌써 공연 리허설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었다.
* * *
공연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재호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답을 찾은 덕분이었다.
'문루아 선배가 보여준 영상 덕분이었지.'
나는 그녀가 보여준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잇츠쇼타임의 무대는 훌륭했다.
엄청난 규모의 무대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왠지 그들의 영상을 보면서 이상하게 나는 불편했다.
대체 왜 불편한 걸까 생각하며 영상을 보다 보니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의 공연은 과시 욕구가 너무 강했다. 정작 그 안에 '관객'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 내가 재호와 밴드에게 한 말은 딱 이 말이었다.
[관객이 우리 곡을 잘 들을 수 있는 편곡을 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다행히 그 말이 재호에게 영감을 준 듯했다.
오늘은 재호가 확신하며 자신만의 색깔이 돋보이는 편곡을 짜 왔다.
음악에 대한 견해가 정반대인 것만 같았던 박찬용과 미도리도 그런 재호에게 힘을 실어주듯 모두 한 의견으로 단합했다.
둘 사이의 충돌 원인은 의견이 달랐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진짜 목적을 잠시 잊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뛰어난 기술도, 창의성도, 모두 관객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집중하면 어느 정도의 의견 차이는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었다.
지금의 편곡은 너무나도 그 본질에 충실했다.
나는 어찌나 놀라운지 노래를 부르면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순한 구성임에도 노래의 맛을 제대로 살려주고 있었다.
나는 내일 있을 우리의 무대가 점점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합주가 끝났다. 재호와 미도리, 박찬용 모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호가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모두를 진두지휘했다.
"자! 오늘 연습은 이 정도로 하고요. 밴드 멤버분들만 남아서 같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수정사항 확인해 볼게요."
리더쉽 넘치는 재호의 말에 미도리와 박찬용이 동의했다.
"그럼세."
"좋아요."
환희는 연습량이 아쉬운지 뚱한 표정으로 재호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저희도 같이 연습 할께여. 벌써 내일이 공연이자나여?"
재호가 그런 환희에게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래선 안 돼. 목소리를 아껴야지. 오늘부터는 소리를 최대한 아껴. 내일 식당도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야."
"그 정도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의아해진 내가 재호에게 되묻자, 재호가 차분하게 그 이유를 말해줬다.
"공연 당일에 소리 질러야 하는 식당일 하는 건 목에 안 좋거든? 우린 공연하러 온 거니까. 장사보다는 공연에 집중해야지."
재호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그가 자신감을 되찾은 게 느껴졌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설사 뮤직넷의 CP나, 음악계 전설적인 연주자 앞이라고 해도 말이다.
재호의 의견은 언제나 치밀하고 체계적이었다. 나도 그런 재호가 하는 말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었다.
"네가 그러면 맞겠지. 뭐, 마음대로 해."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나와 환희는 연습실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이제 6시였다.
연습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하늘이가 내게 말을 툭 내뱉었다.
"전 가볼게요, 형.”
"야 어디가?”
"마지막으로 구룡도 돌아보려고요. 내일은 공연 끝나면 뭐 할 정신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이 녀석이 또 뭘 하려고 하나 싶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저 녀석 또 밤새워 노는 거 아냐?'
설마 그러진 않겠지 하면서도 나는 노파심에 멀어지는 환희를 불렀다.
“야!"
"네? 왜 그러세요?"
"목소리 아껴. 내일 공연이야."
"에이~ 알겠어요~."
하늘이는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나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하늘이가 애도 아니고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배영웅 매니저가 그를 항상 밀착 점검하고 있다고 내게 말해주기도 했다.
'실장님이라면 잘해주겠지.'
실장님이 계시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이 저녁 시간에 뭘 할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 * *
마지막으로 나와 노경진 PD는, 방송에서 차마 내보내지 못한 현지 맛집 레스토랑의 룸을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손님을 기다렸다.
"왜 불렀어요?"
문이 열리고, 문루아가 들어오며 물었다.
온몸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 등으로 칭칭 감았다.
심지어 옷도 최대한 펑퍼짐한, 거의 망토에 가까운 원피스를 입어 아예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게 위장했다.
이게 평소 아시아 스타 문루아의 외출 복장인 모양이었다.
노경진 PD가 우리 맞은편 빈자리로 안내하며 문루아를 맞이했다.
"여기 앉아요 루아 씨. 배고팠죠?"
문루아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샐러드 시켜 먹었어요."
기껏, 구룡도까지 와서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다니, 나는 그런 그녀가 참 안타까웠다.
이게 스타의 어두운 면인가 싶었다.
나 역시도, 만약 내가 목표하는 '글로벌 스타', ‘세계 최고 가수'가 되면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성공에도 대가가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내가 조심스레 문루아에게 말을 꺼냈다.
"내일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문루아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뭐 방법이 있겠어요? 조용히 호텔 방에 있다가, 몰래 갈 수 있는 곳만 좀 가다 귀국해야죠."
문루아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우리와 식당 일을 함께하는 동안 너무도 즐거워 보였다.
문루아는 항상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음료를 준비했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식당 아르바이트 같은 추억을 한 번쯤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친구들과 함께 식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해서 손님에게 가져다주고, 뒷정리하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데 문루아에게는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평범한 경험을 해보기에 그녀는 너무 어릴 때부터 유명했다.
그런 그녀의 상황을 헤아리듯 노경진 PD가 문루아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제가 잘 기획해서 출연진을 보호했어야 했는데."
문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PD님 잘못은 없어요. 회사는 이미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말했었잖아요. PD님도 동의하셨고. 그래도 강행한 건 저예요. 제 잘못이죠."
역시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문루아가 식당 일을 해보고 재미를 느낀 나머지 조금 무리를 해서 진행한 게 맞아 보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이곳의 최고 인기 메뉴인 구룡도식 솥 밥이 나왔다. 깜짝 놀랄 만큼 윤기가 나는 맛있는 요리였다. 그런데 문루아는 음식을 먹지 않고 말없이 그릇만 만지작거렸다. 마치 음식보다는 그릇의 온기가 더 좋다는 듯했다.
암울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딱 하나 방법이 있어요. 선배를 신인 시절로 돌릴 방법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