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박찬용과 미도리의 토론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되자 내가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가 주도하든 연주자가 주도하든, 그걸 선택하는 게 바로 프로듀서의 권한 아닐까요? 프로듀서의 선택으로 연주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 그것 또한 프로듀서가 주도하는 거죠."
자신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내 말에 박찬용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본의 아니게 박찬용 선배 편을 든 셈이 되었다.
하지만 미도리 또한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단호히 말했다.
"지금 재호 군은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냥 두려워서 연주자들에게 떠미는 거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전혀 물러서지 않는 미도리를 보며 ‘중재에 실패했나?’ 싶어 하던 참에 재호가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제가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냥... 저는... 연주만 잘하면 된다고 좀 쉽게 생각했던 거 같고, 제가 부족했던 거 같네요. 연습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의기소침해진 재호의 말에 미안했는지 박찬용과 미도리가 서둘러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아닐세! 연주는 정말 잘했어! 우리 예상을 뛰어넘었네!"
"너무 잘해서 그래요, 재호 군! 기대가 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고메나사이(미안해요)."
박찬용과 미도리의 응원이 섞인 사과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재호가 힘차게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이미 지났으니. 내일까지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 * *
뒤풀이는 다행히 깔끔하게 잘 끝났다.
이제는 자유시간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처 없이 항구 거리를 걸었다.
그저 발 닿는 대로 아무 데나 걸어 다녀도 이 부근은 참 좋았다.
항구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 그 위에 맞닿아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 그 하늘을 지붕 삼아 줄지어 서 있는 한국과 제법 다른 형식으로 건물들, 그리고 그 속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편안하면서도 이국적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한참은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항구 끝이 보였다.
"노을 씨!"
갑자기 내 등 뒤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내 뒤에 문루아가 서 있었다.
"아! 선배. 여기서 뭐 하세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나의 물음에 문루아는 자신의 주변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리니 그녀 주위에 제작진이 좍 깔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내게 문루아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공연은 안 하니까. 몰래 주변 탐방 좀 하고 있었어요. 저도 분량 뽑아야죠."
‘...그러다 정체 들킬 것 같은데.'
이런 내 생각도 무리가 아닌 것이, 아시아 최대 스타인 문루아의 인기는 중화권에서도 그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비공개 스케줄로 처리해 조금 자유롭다고는 해도, 너무 많이 활동했다간 여차하면 팬들에게 걸려 큰 소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런 나의 염려가 무색하게, 오랜만에 문루아는 케이팝 스타의 무게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굳이 막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나는 문루아의 의견이 어떤지 궁금한 주제가 하나 있었다.
문루아는 곡도 쓰는 다재다능한 가수였고, 무엇보다 미도리와 오랜 기간 함께했기 때문에 이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제작진과 함께 있는 그녀의 상황에서 혹여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루아는 딱히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길어져요? 그러면 자리부터 잡죠.”
우리는 문루아가 앞장서서 찾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잘 닦인 통유리창을 통해 훤히 보이는 바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해지게 만드는 경치였다.
문루아가 박력 있게 저벅저벅 걸어가 그 유리 앞 테이블에 자리 잡고 떡하니 앉으니, 덩달아 나도 모르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녀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문루아는 그녀가 주문한 허브티를 홀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어떤 질문을 할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주문한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문루아에게 방금 밴드 연습 뒤풀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미도리와 박찬용이 서로 다른 의견을 말했던 일과, 이에 대한 재호의 반응까지 전부 다 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문루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도리답네요."
미도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나로서는 문루아의 말이 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답다는 건 무슨 뜻이신가요?”
내가 설명을 구하자, 문루아는 상체와 얼굴을 내 쪽으로 조금 내밀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나를 째려보듯 얼굴을 조금 옆으로 틀어 웃음기 어린 실눈을 하고 내게 되물었다.
"미도리, 부잣집 딸인 거 알고 있죠?"
"네."
미도리는 해외 스케쥴이 있을 때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탈 정도니 말 다 했다.
"일본인이란 사실도?"
“네."
문루아는 미도리의 ‘기본 정보’를 내가 알고 있는지 확인하듯 물어보고는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새로운 의문점을 제시했다.
“그러면 부잣집 딸이 왜 일부러 외국까지 와서, 기타리스트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그렇네요?"
문루아가 ‘제시’한 새로운 의문점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재벌 집 자식이 굳이 편한 생활을 저버리고 외국에서 기타리스트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2천년대 후반, 한국은 일본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스스로 고생길을 자처한 미도리가 대단하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문루아는 내 생각을 파고들듯 미도리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도리, 원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였어요. 그것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고 알고 있어요."
"그랬군요. 왠지 어울리네요."
문루아에게 미도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가 느꼈던 ‘미도리의 부자연스러움’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케이팝 분야에 녹아들어 있는 ‘세계의 이목을 받는 클래식 기타리스트’.
미도리의 그 고고한 자태가 왠지 내 눈에는 나와는 너무 달라 어딘가 어색한 면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루아는 계속 미도리의 이야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더는 즐겁지 않아서 클래식 전공을 취소했다고 해요."
나는 미도리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서 전국을 누비며 활동할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릴 셈이니 말이었다.
왠지 국악 전공인 내 동생 생각도 났다.
나뿐만 아니라 미도리 씨의 가족도 아까워했을 거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서 문루아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뭐라 하던가요?"
"오히려 좋아했죠. 빨리 시집보낼 수 있었으니까."
"윽..."
시집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눈치챈 듯 문루아가 맞장구를 쳤다.
"일본의, 심지어 재벌가니까요. 뻔하죠."
"근데 어떻게..."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문루아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주변 말을 안 들은 거죠. 결혼을 강요하는 분위기, 기획사가 가수를 쥐락펴락하고, 음악도 멋대로 조종하는 분위기 같은 게 싫었나 봐요. 어쩌다 보니 저랑 한 번 활동을 한 적 있었는데, 저와 천채왕 선생님이랑 일하는 게 한결 편하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럴 수 있겠네요."
하긴 천채왕은 한국인이지만 일본 뮤지션 정도의 금액을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는 재력을 갖췄다.
게다가, 그는 의외로 뮤지션들이 편한 상태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좋은 연주가 나온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온전한 자율성을 주었다.
오히려 대중과 타협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미도리는 저, 그리고 TYB와 함께하면서 일본에서 얻기 어려운 자유를 얻은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도망친 거고요. 당연히 비원더도 음악의 권한을 얻어서 자율로 진행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겠어요?”
문루아를 통해 이런 사정을 들으니 미도리가 왜 그렇게 프로듀서의 '자립'을 강조했는지는 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자유를 찾아 한국까지 온 셈이니 말이었다.
나는 ‘프로듀서 논쟁’에서 보인 미도리의 모습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자, 그녀에 대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 근데 집안이랑은 그럼 절연했나요?"
"아뇨. 왜요?"
나는 꽤나 조심스럽게 물어본 건데 문루아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되려 민망해하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난번에 자가용 비행기를 탄 거 보면 그렇지 않은 거 같아서요."
“결국 할아버지가 두 손 들고 항복하셨나 봐요. 이제는 집안의 자랑이죠. 팝가수랑도 연주하고 하니까."
“그걸로 된다고요?"
내가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뭐 이런 거인가 싶어 하는데 문루아가 말했다.
"일본만 그런 건 아니에요. 아시아의 부모님들, 서양인의 인정에 약하다고요..."
"하긴 뭐 저도 좀 그렇긴 하죠,"
나 역시도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꿔 봤기에, 쉽사리 그들을 비웃을 순 없었다.
문루아 덕분에 미도리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니, 미도리의 주장이 한결 잘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그녀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문루아에게 또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건 미도리의 입장이고. 재호는 꼭 미도리의 길을 추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문루아가 내 말도 일리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힌트가 될 만한 자료가 하나 있어요."
"어떤?"
"잠깐만 기다려봐요."
문루아가 궁금해하는 나를 두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잠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통화하는 사람이 천채왕은 아닌 거 같은데, 상당히 높은 분과의 통화 같았다.
* * *
1시간 후.
나와 문루아는 물론 재호와 환희, 심지어 미도리와 박찬용까지 모두 문루아 호텔 방에 모였다.
다들 옹기종기 둘러앉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이 좁디좁은 숙소에 대해 불편함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는데 환희가 대뜸 물었다.
"저희 왜 다 모인 거죠?"
환희의 질문에 문루아가 기분 좋은 듯한 상기된 어조로 대답했다.
"이번 공연 준비에 크나큰 도움이 될 자료를 준비했어요. 실장님?"
"넵."
자기를 부르는 문루아의 말에 배영웅 매니저가 노트북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화면을 켜고는 웬 영상 하나를 틀었다.
미도리가 노트북 화면을 향해 고개를 주욱 내밀면서 문루아에게 물었다.
“무슨 영상이야?"
"미도리 상과 멤버들 공연 준비에 도움이 될 영상. 잘 확인해 주세요. 이거 구하느라 구룡도 총영사님께 통화하고 힘 좀 썼으니까."
미도리의 질문에, 문루아는 그녀의 오뚝한 코를 슬쩍 위로 치켜들고 씨익 웃으며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답했다.
배영웅이 가져온 영상은 다름 아닌 잇츠쇼타임의 쇼케이스 영상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공연장에 잇츠쇼타임 3인이 섰고,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와 함께 그들의 쇼케이스가 시작되었다.
"와우..."
잇츠쇼타임의 쇼케이스 영상을 보며 환희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영상은 그만큼 장관이었다.
순백의 턱시도를 입은 잇츠쇼타임 3인의 뒤에는, 정통 재즈 밴드와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앉아 있었다.
전주가 시작되었다. 잇츠쇼타임의 모든 곡이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어 있었다.
현악기의 아름다운 연주에 맞춰 잇츠쇼타임 3인이 노래를 불렀다. 재즈 밴드 또한 화려하게 음악의 무게 중심을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조명을 사용하고 리프트까지 동원하는 등 무대장치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보고 박찬용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MTV 언플러그드가 울고 갈 규모구먼. 돈이 썩어나나?"
잇츠쇼타임의 영상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채 빈정대는 박찬용을 보며 배영웅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돈을 얼마든지 쓰니까요."
결국 소인중이 TYB에게 무너진, 아니, 정확히는 비원더에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공연 퀄리티 자체는 엄청났다. 그야말로 대형 오케스트라를 쓴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편곡이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잇츠쇼타임의 곡들이 한층 고급스럽게 들렸다.
현지 관객들도 그런 그들에게 우렁찬 박수로 화답했다.
영상이 끝나자 문루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어째, 참고되셨어요?"
미도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문루아에게 말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거 같기도 한데! 루아 짱."
박찬용도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미도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뭐, 적어도 규모로 승부는 안 되겠구먼. 비슷한 콘셉트의 한국 그룹이 이런 대규모 공연을 했으니 말일세."
그 말을 들으며 재호는 앞으로가 많이 걱정되는지 손을 떨며 물을 마셨다.
어찌나 손을 덜덜 떠는지 사방으로 물이 튈까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재호가 '하하'하고 애써 웃어 봤지만, 씁쓸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는 못했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모를 큰 공허함이 느껴졌다.
'차라리 그 영상을 안 보는 게 나았으려나?'
모두의 반응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걱정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재호의 염려와는 별개로, 우리의 공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잇츠쇼타임의 공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것보다는 더 좋은 공연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내겐 있었다. 이 확신을 멤버들과 스태프들에게 전하기만 하면 됐다.
나 외에 다른 멤버들과 박찬용, 미도리는 뜨겁게 편곡을 주제로 토론 중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조촐한 악기 구성을 갖고 어떻게 잇츠쇼타임보다 나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의 장을 열어 연구 중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보기에도 이렇다 할 묘수는 딱히 없어 보이는 토론이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 * *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우리가 있던 방 주인인 미도리와 문루아만 남고 모두 나가려 하던 때, 문루아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
"잠깐만 더 있다 가요."
미도리가 저돌적인 문루아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루… 루아 짱. 이렇게 육식 계였어? 아무리 그래도 나도 쓰는 방인데… 어쩔 수 없지. 1시간만 나가 있어 줄게."
짓궂은 미도리의 농담에 문루아가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는 손사래를 치며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런 거 아니니까 나가지 말고 있어요!"
"하… 하이(예.)"
그렇게 미도리와 나, 문루아 셋만 남았다.
쭈뼛거리며 문루아가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음… 이거 노을 군에게만 몰래 이야기하려 했는데. 미도리는 어쩔 수 없죠."
“네, 무슨 일이신가요?”
문루아가 자꾸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단호하고 당당했던 문루아 선배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모습을 내게 보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나는 문루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를 재촉했다.
"그냥 말하세요. 괜찮으니까."
미도리도 우물쭈물하는 문루아가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냥 말해요, 루아 짱!"
문루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뭔가 결단한 듯,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노을 씨… 살… 쪘어요."
그녀의 결연한 태도와는 다르게 문루아는 속에 있던 말을 힘겹게 뱉었다.
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되물었다.
"살이요?”
나는 슬쩍 곁눈질로 문루아의 화장대 앞에 놓인 거울을 봤다. 그러고 보니 턱에 조금 살이 붙은 거 같기도 했다.
뜬금없이 날아온 문루아의 말은 내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괜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가수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과체중에 따른 자신감 부족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때 그 문제가 다시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일단 침착하자.'
나는 자신을 다독였다.
비록 살이 쪘다고는 해도, 방송에만 괜찮게 보이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일단 노경진 PD에게 전화를 걸어 은근슬쩍 이 문제에 관해서 물어봤다.
-맞아요 노을 군. 무대에 서는 사람이라기엔 좀 살이 붙긴 했어요. 빼면 더 좋을 거 같긴 해요. 가능해요?
"네, 네에..."
아, 역시 그런가… 노경진 PD도 문루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구룡도에서 좀 많이 방심하긴 했다.
매일 아침 로컬 맛집에서 잔뜩 아침을 먹었다.
점심은 재호가 만들어 준 비빔밥이었다.
이건 그나마 다이어트식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저녁에는 매일 늦게까지 연습 후 야식을 먹은 데다, 심지어 중간마다 막창 꼬치, 구룡도식 핫도그, 카레 어묵, 그리고 우유 푸딩까지 다양한 간식을 가리지 않고 우걱우걱 먹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살이 안 찌려야 안 찔 수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문루아를 향해 나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요. 돌아가서 확 빼려고 했는데..."
나도 사실 이게 내 잘못인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이렇게라도 응석 부리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나의 응석은 문루아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쇼케이스 무대까지 살을 빼야죠."
"그렇네요..."
나의 작은 반항은 이렇게 맥없이 끝을 맺었다.
나도 문루아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문루아 선배가 미리 말을 해준 게 다행이었다. 내게는 아직 이틀이란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쫄쫄 굶으면 어떻게든 감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문루아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구룡도 음식은 너무 맛있죠. 그죠?"
"동감합니다."
나는 ‘암요, 그렇고 말고요’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문루아가 그런 나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킥킥대며 물었다.
“먹을 수 있는 걸 실컷 먹고, 살도 빼는 법을 알려줄까요?"
아니, 이게 무슨 획기적인 제안이란 말인가!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화이팅 자세를 취하고 문루아를 향해 외쳤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정말 감사하죠!"
근데,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있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