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목소리의 정체는 문루아였다. 버스 제일 뒷좌석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선배, 지금 한창 일본 콘서트 할 때 아니에요?"
"구룡도에서 일본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 되니까요. 일주일간 일정을 쉴 때 잡았어요."
"아하..."
환희가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선배! 요리 못 하자나요. 전력에 도움이 안 된다고요."
"윽… 나 음료는 잘 만들거든요? TYB 핼러윈 파티 때마다 칵테일은 제 담당이었어요."
뜻밖의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 생각을 입으로 뱉고 말았다.
"의외네요.”
"뭐가요? 내가 요리는 못하면서 음료는 잘 만든다는 게 의외란 거에요?"
"아니요. 문루아 선배. 항상 초인적인 다이어트를 하시잖아요? 그러니 요리를 잘 안 하실 텐데… 음료를 잘 만드신다는 게… 의외여서요."
"음… 그걸 기억하고 있었군요."
겸연쩍었는지 문루아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재호도 말했다.
"저는 요리를 파서 다이어트를 건강하고 맛있게 하자는 주의고, 선배는 삶은 계란이나 샐러드 등 최대한 단순화한 식단을 하는 수도승 스타일이니까요. 저도 이런 걸 일일이 기억하는 제 모습이 의외군요."
문루아가 말했다.
"...사실 단 음료는 잘 못 만들어요. 제가 잘 만드는 건 오로지 술이에요."
"술은 괜찮아요? 다이어트에 술은 최악의 적이잖아요."
"증류주는 조금씩은 괜찮아요. 커피, 차, 달지 않은 칵테일도 좋아해요."
"그렇군요… 그래서..."
노경진 PD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지켜보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번 원더비빔밥의 '음료 담당'은 문루아 씨입니다. 메뉴는 딱 하나. 두리안 맛 무알코올 칵테일만 판매할 예정입니다. 다들 슈퍼스타 T 시절부터 함께 있었으니,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겠네요."
내가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짜 친구들과 함께 해외 여행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얼 버라이어티 출연이지, 그냥 노는 일도 아니니 일석이조였다.
내 소원을 기가 막힌 재치로 이뤄 준 천채왕에게 감사했다.
* * *
...하지만 곧 감사는 부담으로 변했다.
구룡도로 가는 비행기 안. 이번에는 비원더 멤버 3인이 내부에 함께 앉았다. 창가 쪽에는 문루아와 배영웅 매니저가, 뒤에는 제작진들이 앉아 있었다.
3~4시간이면 도착하는 짧은 비행이라, 잠을 자기도 뭔가 좀 애매했다. 옆을 슬쩍 봤다. 재호는 벼락치기를 하려는 듯,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환희는 안대와 귀마개를 한 채로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나는 뭘 하지?'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바로 손이 음악을 향했다. 기내 리모컨으로 음악 채널을 확인했다. 팝 음악부터 구룡도 현지 음악, 재즈, 클래식, 심지어 세계의 민속 음악까지, 온갖 음악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러다 한 채널에 내 손이 멈췄다. 한국 음악 컬렉션이었다. 한국발 비행기다 보니 한국 음악 모음 채널도 준비한 모양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외국인들도 한국 음악을 듣고 싶으면 이 채널을 확인할 터였다. 어떤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이 채널의 음악을 듣기로 했다.
시작하자마자 문루아 선배의 노래가 나왔다. 역시 아시아 스타였다. 이후 오창선 선배의 곡도, 심지어 잇츠쇼타임의 노래도 나왔다.
…하지만 우리 비원더의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음악방송 1위를 했지만, 아직은 신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아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마음을 뒤로하고 헤드폰을 벗었다.
'아니 잠깐, 근데 잇츠쇼타임도 우리랑 데뷔 동기인데, 여기에 왜 벌써 곡이 있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조금 뒤에 밝혀지게 된다.
하여튼 이번 방송은, 시작은 팝업스토어 점심 식사 전문 음식점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기습 버스킹 공연이었다. '음식을 팔러 온 줄 알았던 한국 청년들이 알고 보니 이런 뛰어난 가수였다!'라고 어필하는 마무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마지막 날 공연이 매우 좋은 반응을 얻어야 했다. 관객도 많아야 했고, 무엇보다 그들이 공연을 본 후에 만족감을 느껴야만 이번 프로그램이 의미가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우리가 현지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 *
구룡도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건조하고 더운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휘몰아쳤다. 길가에 즐비한 가로수도 아열대 기후에 걸맞은 열대 우림의 그 나무들이었다. 심지어 코모도 도마뱀이 걸어다녔... 응 잠깐?
"저, 저거... 코모도 도마뱀이잖아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것을 향해 삿대질하듯이 손가락을 내지르며 쳐다봐도 코모도 도마뱀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뭘 봐?'라며 신경도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구룡도에서는 흔해요. 서울의 비둘기나 길고양이 같은 거랄까요?"
"아니, 저렇게 큰 길고양이가 어딨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문루아가 큭큭거리며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덧붙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원숭이가 비둘기처럼 길거리에 돌아다녀요."
"아니 대체… 상식이란 게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습니까!"
문루아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로, 배영웅과 함께 성큼성큼 지하철로 향했다.
그런 그들을 뒤따르며 환희가 물었다.
"사람들이 선배를 안 알아봐요? 지하철 타도돼요?"
문루아가 '쉿'하고 입조심하라고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구룡도는 자동차가 엄격하게 통제돼서 차를 빌리기가 어려워요. 대신 얼굴을 숨기고 다니면 되죠, 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진 나는 물었다.
“근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 * *
문루아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지극히 평범한 만둣집이었다. 아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지만 아주아주아주 크고 붐비는 만둣집이었다.
비원더 3인과 문루아, 그리고 배영웅 매니저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규모를 최소화한 제작진 일부도 맞은 편에 앉아 우리를 찍었다.
문루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세 분 비행기에서 밥 잘 안 드시더라고요?”
나를 포함한 세 명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문루아가 우리 반응을 확인하곤 말을 이어갔다.
"기내식 먹기 힘들었죠?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왠지 갇힌 곳에서는 식사가 어렵죠."
다시, 비원더 3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런데, 저,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간 이탈리아에서 음식이 너무 맛있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좀 기대돼서요. 현지 음식을 양껏 먹으려고 버텼습니다."
문루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배영웅 매니저가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재호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아, 저랑 문루아 아티스트님께서 한창 아시아 투어를 돌 때 아티스트님이 이곳을 참 좋아하셨거든요. 너무 소란스러워서 되려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고, 맛있고, 싸고. 그래서 점심때 자주 갔었죠."
그러고 보니,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해서 되려 가수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종업원들이 만두를 가득 담은 카트를 가지고 테이블 사이 사이를 지나가면, 손님들은 자신이 먹고 싶은 만두를 접시째로 가져갔다. 식사를 다 마치면 손님 앞에 쌓여있는 접시의 개수로 가격을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인기 있는 만두를 가져가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소란스러운 이 시장통에 '아시아의 달' 문루아 같은 유명 스타가 다녀갈 법한 곳은 과연 아니었다.
내가 문루아에게 말했다.
"정말 오히려 여기는 안전할 거 같네요."
"맞아요. 노을 씨 빨리 저거 집어요. 저 춘권 맛있어요."
문루아가 가리킨 대로 접시를 집었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환희가 우걱우걱 먹으며 감탄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죄다 맛있어요!!"
환희는 마치, 미래의 '먹방 유튜버'처럼 맛깔나게 먹었다. 옆에서 깨지락깨지락 먹고 있는 재호가 그런 환희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더니 재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저렴하게 이런 점심을 먹는 거군요… 만만치 않겠네요?”
티 나지 않게, 하지만 노련하고 신속하게 우리 표정을 카메라로 담고 있던 노경진 PD가 슬쩍 물었다.
"자신 없으세요, 재호 씨?"
"조금은요? 여기 너무 맛있고… 특색도 있고… 거기다 이렇게 푸짐하기까지 하니, 이런 시스템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거든요. 저희는 메뉴도 딱 하나뿐이고…"
배영웅 매니저가 의기소침해진 재호를 격려했다.
“그게 바로 승부처죠. 여기 사람들은 비빔밥 같은 거 먹어본 적 없잖아요? 오히려 저들에겐 우리가 더 특색 있을 수 있어요.”
"사실은… 비빔밥을 메뉴로 제안한 건 저였어요."
재호가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빈말이 아니라, 해외에서 비빔밥 해주면, 외국 스타들 반응이 폭발적이었거든요.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잘 될 거예요."
환희가 옆에서 히죽거리며 농담했다.
"문루아 선배가 얼굴을 공개하면 더 쉬울 텐데요."
"쉬잇!"
문루아가 황급히 환희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때였다. 현지인 누군가가 쭈뼛쭈뼛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런, 눈치챘나?'
비록 몇 년 공백이 있었지만, 문루아는 아시아 최대 스타였다. 당연히 구룡도에서의 인기도 굉장했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단 한 명이라도 그녀가 문루아임을 눈치챘다가는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물론 제작진 외에도 주변에 몰래 숨어있는 잠복 경호원이 몇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었다.
하여튼, 행여나 문제가 생길까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현지인이 다가와서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내게 말이다.
"저요?"
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러자 그 현지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권노을 님 팬입니다!"
알고 보니 '킹 오브 싱어'는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구룡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킹 오브 싱어'의 독특한 콘셉트와 비주얼, 그리고 노래가 호응을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놀랍게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 구룡도에서까지 전해져 소수의 팬이 생긴 것이었다.
하긴, 문루아의 팬이었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두어 명만 오고 끝났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 현지 팬에게 사인해주고 나니 뭔가 조금 용기가 생겼다. 왠지 이번 공연도 잘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후 첫날 일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출연진 모두 다 같이 내일부터 팝업 스토어를 진행할 식당에 방문했다. 식당은 구룡도에서 가장 많은 식당이 밀집된 항구 거리에 있었다. 거리 한가운데에는 버스킹을 할 수 있는 작지만 제법 그럴싸한 공연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이 우리가 마지막 날에 공연할 장소였다.
우리의 팝업스토어 또한 버스킹 공연장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었다. 조금씩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내일 가게를 차릴 준비를 하면서 방송 분량을 뽑았다. 환희와 나는 정리 정돈, 청소 등을 하며 오픈 준비를 했다. 재료를 사 올 마트에 가서 재료도 확인했다.
그 사이 재호는 능숙하게 비빔밥을 한 번 시험 삼아 만들어봤다. 신기하게도 그 맛이 그대로 나왔다. 하지만 제일 놀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문루아 표 수제 음료였다.
"... 이거 너무 맛있는데요 선배?"
문루아가 샘플로 만들어 준 생과일 음료가… 너무나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문루아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헴! 이래 봬도 백발백중이었어요, 이 음료."
“별로 달지도 않고 건강에도 좋을 거 같은데요. 대단해요, 선배. 비결이 뭐예요?"
"안 가르쳐 줘요~.”
어쨌든 이만하면 생각보다 번듯한 레스토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을 위한 식당 준비가 끝나고 녹화 없는 진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저는 항구 거리 좀 둘러보다 갈게요~.”
환희는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제일 먼저 사라졌다.
그런 환희를 보고 재호가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희한하네요. 산책에 웬 우쿨렐레를 들고 가지?"
배영웅이 불쑥 말했다.
"... 노래로 여자를 꼬시려 한다거나요."
재호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설마요."
"하하하 그러게요…"
그러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사색이 되며 썩어들어갔다. 그리고 환희를 찾아서 우다다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서엇!"
결국 나랑 문루아 선배만 스태프들과 함께 덩그러니 남았다.
문루아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뭐어, 노을 군은 구룡도 처음이죠? 뭐 하고 싶어요?"
내가 식당에 슬며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