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28화 (128/280)

제128화

천채왕이 밝은 목소리로 우리를 축하했다.

-야 직접 만나서 축하해야 할 일인데 미안하다. 대단해. 쉽지 않은 일정이었을 텐데 잘 버텨줬어.

재호와 환희 모두 '아닙니다'라며 공을 회사에 돌렸다. 나름의 겸손의 표현이었지만, 또 진심이기도 했다.

기획사의 '개인 활동' 위주 전략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게다가 우리의 타이틀곡 '걔 쩔어'는 나 외에 모든 멤버들이 반대했던 곡이었다. 그런데 그 병맛이 그대로 대중에게 통했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토 달지 않는 완벽한 노래보다는 흠집 내는 안티와 이를 방어하는 팬덤의 경쟁이 더 큰 화제 몰이가 된다.

TYB의 과감한 선곡 덕에 비원더는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고, 활동 1년이 채 되지 않아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재호와 환희는, 회사에 그 공을 돌렸다.

천채왕이 둘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이렇게 답했다.

-전략은 결국 잘 실행이 돼야 가능한 거야. 세 명 다, 내가 준 일정이 좀 과도했을 텐데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서 해줬어. 열심히 하다 보니 의외의 성과도 많이 올렸고! 설마, 가면 쓰고 노래 부르는 티비쇼가 20% 시청률을 넘길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거기에서 우승한 게 노을이야! 이건 너희들 공이지.

서로 훈훈하게 공을 돌리는 분위기였다.

"진짜 그거 대박이었어여, 횽."

"나도 봤는데 편곡이 좋더라구. 내가 편곡한다면, 그 정도로 노을이랑 환희 장점을 살려줄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어."

재호와 환희까지 조수석에 앉아있던 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약간 뭉클했다. 척추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모두에게 대답했다.

"누구 덕이 아니라, 모두의 덕인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들 찌이잉~ 하는 감정에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천채왕이었다.

-노을아. 너 1위 하면 해달라는 거 있었잖아?

"네."

재호와 환희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나는 재호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아, 이건 선생님이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그게 뭔데?"

재호의 물음에 천채왕의 전화 목소리가 대답했다.

-너희 셋이 같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단 소원이었어. 이번 활동 전략 때문에, 셋이 자주 못 봐서 아쉽다고. 게다가 너희 셋, 같이 여행 간 적도 없잖아?

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죠."

-그래서 추억도 쌓을 겸, 해외여행을 하자는 제안이었어. 하지만 그건 좀 어려워, 노을아.

뜻밖에 답에 나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네에..."

역시나 좀 무리인가 싶었다. 천채왕은 굉장히 우리에게 잘 해주지만, 그래도 역시 사업가였다.

나는 이제 막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한 신인 가수였다. 그의 입장에선 최대한 뽑을 만큼 뽑아 먹어야 했다.

천채왕은 자신의 입장을 부드럽게 포장해서 '지금 많이 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평생에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 회사가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도, 지금은 달려야 할 때라고 봐.

사실 정론이었다. 하지만 이미 소원으로 들어줄 것을 약속한 것을 파기한 것은 아쉬웠다. 이 서운함을 어떻게 하면 성숙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해봤다.

그때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싱긋 웃더니 말했다.

"짓궂으시네요, 선생님."

-아, 배 실장. 왜 그래요?

"이미 준비하셨잖아요?"

배 실장의 물음에 천채왕은 하하 소리 내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하나 준비한 스케줄이 있긴 해. 이번에 노경진 PD가 새로운 예능 준비를 하나 했어. 비원더랑 딱 맞는 프로젝트 예능이야. 이걸 해보면 비원더의 명성에 도움이 될 거 같아.

환희가 물었다.

"무슨 프로그램 인가여?"

-해외에서 식당 차리고, 콘서트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야. 어차피 당분간 한국 방송 촬영은 잔뜩 했으니까 4일 정도 해외 다녀와도 문제없어. 독특한 컨셉의 예능이니까 인지도 향상에도 도움이 될 거야.

사실상, 해외여행이나 다름없는 방송이었다. 이 방송에 우리를 넣어주는 것으로 사실 천채왕은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넙죽 감사 표시를 했다. 환희 또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트 위를 콩콩 뛰었다.

"......"

반면 재호는 좀 담담해 보였다.

'재호 저 녀석, 원래 해외여행 관심이 없었나?’

* * *

다음 날 아침, 노경진 PD와 방송 미팅을 시작하자 비로소 재호가 냉철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경진 PD가 미리 섭외해 둔, 한강 주변 브런치 카페에서 방송 미팅을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노경진 PD가 경고했다.

"이건 쉬운 예능 아니에요. 요리를 해야 하잖아요. 저희, 정말 세분 요리 시킬 거에요. 음식점을 정말 운영해야 해요. 딱 3일, 그것도 점심뿐이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걱정이 밀려왔다. 환희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저는 밥 아예 못 하는데여. 계란 후라이도 못하는데."

나도 거들었다.

"슈퍼스타 T에서도 저희 요리는 모두 재호가 했잖아요?"

그러자 재호와 노경진 PD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재호가 말했다.

"사실 나는, 이번 예능 미리 알고 있었어."

환희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회사랑 단독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끼리 먼저 이야기하자고 했던 건 형이잖아여!"

재호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나만 혼자 알고 싶었다, 왜! 환희 니는 회사 연습생 성골이고. 노을이는 대표님이랑 친하고. 나는 한번 이래 보면 안 되냐구?"

내가 둘을 중재했다.

“아아 뭐 됐고. 여튼 좋아. 노경진 PD님이 미리 알려준 이유는 뭐예요?"

노경진 PD는 당연하다는 듯, 재빠르게 대답했다.

"재호 군은 요리를 해야 하니까요."

“아."

"메뉴도 정했고, 연습도 미리 했어요."

내가 재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요즘 네가 유독 바빴던 거였냐. 요리 프로 한 게 아니고."

재호가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그 요리 프로라구."

"그런 거였냐..."

확실히 내가 당해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웬만하면 회사와 이야기하기 전에 팀끼리 먼저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환희가 재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횽. 그럼 뭐 만들 건지 한번 보여줘 봐여."

재호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거덩~."

재호는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더니,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브런치 카페가 애초에 재호가 나와 환희 앞에서 음식을 하고 음식을 먹게끔 하는 의도로 섭외한 장소였다.

재호는 능숙하게 갖가지 채소를 썰었다. 거기에 삼겹살을 살짝 넣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곁들였다.

환희가 쏘아붙였다.

"...이건 그냥 비빔밥이잖아여!"

재호가 말했다.

"먹어봐."

"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채소 재료가 은근히 독특했다.

정신없이 먹던 내가 물었다.

"맛이 독특한데. 왜 굳이 이런 재료들을 택한 거야?"

재호가 요리 뒷정리를 하며 답했다.

"구룡도에서는 나물을 구하기가 어렵거덩~. 그래서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찾아 요리했지.”

"구룡도? 우리 구룡도 가는 거에여?"

잠자코 우리 셋을 지켜보던 노경진 PD가 대답했다.

"아, 아직 말을 안 했구나. 네, 저희 이번 촬영지는 구룡도에요."

구룡도.

아름다운 해변가를 자랑하는 휴양지이기도 하지만, 동남아의 금융의 허브기도 한 곳이었다. 화교들이 많고 아시아의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 그래서 천채왕이 이곳을 목표로 삼은 것 같았다.

천채왕은 비원더의 일본 진출을 준비 중이었다. 곧 일본에서 쇼케이스를 갖고, 싱글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한 시장이 바로 구룡도였다. 구룡도와 일본이 아시아의 트렌드를 좌우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게다가 구룡도는 영어가 통하니까 우리 3명 멤버 모두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활동할 수 있지.’

비원더 3인 멤버 모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능숙한 건 아니었다. 특히 환희는 많이 부족했다. 반면 영어는 3인 모두 문제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예능 촬영에는 훨씬 편할 터였다.

내가 재호의 비빔밥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고수라던가.. 이런 저런 게 있는 거군."

재호가 정리를 마무리한 듯,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그래. 게다가 이 정보면. 내가 준비만 해두면 너랑 환희가 문제없이 서빙을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머리를 쓱쓱 뒤적였다. 생각해보니 할 일이 많았다.

"서빙은 우리 둘이 한다 치고. 구룡도는 영어가 통하니까 그건 괜찮은데. 좀 사람이 모자라지 않을까? 음료수라도 누가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노경진 PD가 뭔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뒀지요' 라는 표정이었다.

환희가 내 심경을 그대로 대변해서 말해줬다.

"PD님 뭐 숨기고 있져!"

노경진 PD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 날씨 좋네요. 곧 여름이겠어요."

"아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여!"

노경진 PD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세 분. 질문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재호까지 놀랐다.

"네?"

"'누구랑 갈 거냐?'는 좋은 질문이 아니에요. 진짜 지금 필요한 질문. 지금 꼭 세 분이 제게 해야 하는 질문. 뭘 거 같아요?"

우리 셋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노경진 PD가 '시계'를 쳐다봤다는 점이었다.

"설마… 시간? ‘언제 가냐'고 물어봐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노경진 PD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답입니다!"

재호가 물었다.

"굉장히 불안하지만… 언제 가죠?"

"오늘 오후 3시요.”

"네에에에??”

급히 시계를 봤다. 벌써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환희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으아니?! 그럼 지금 출발해야 하잖아여! 저 아무 준비도 안 했단 말에여!”

노경진 PD가 문제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이미 서류나 약을 비롯해 꼭 필요한 물품들은 매니저 통해서 다 준비해 뒀습니다.”

우리 셋 다 문 바깥을 쳐다봤다. 창문 바깥에서 배영웅 매니저가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보아하니 이미 배영웅 매니저가 비행기 티켓부터 여권까지, 모든 준비를 다 해둔 모양이었다.

재호가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저희 옷도 없는데…. 오늘 그냥 대충 입고 왔잖아요?”

슬쩍 우리 셋의 의상을 확인해봤다. 환희는 벙거지 모자를 눌러 썼고, 블랙 후드티와 힙합 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재호는 깔끔한 흰 와이셔츠에 치노 팬츠를 입었다. 내가 제일 가관이었다. 붉은색 아디다스 츄리닝을 덜렁 입고 나왔다.

재호가 내 옷을 보고 한소리 했다.

“야 노을이 너 그게 뭐냐구! 아무리 그래도 방송인데?"

내가 맞받아쳤다.

"그야,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니까 그랬지. 촬영도 안 한다며."

노경진 PD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믿나요? 후후후…"

"아니! 그건 좀!"

"기획사와는 모두 이야기가 됐습니다."

노경진 PD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뭔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해외여행 수속 시간을 생각하면 바로 지금, 당장!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노경진 PD가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자! 바깥에 버스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타시면 세 분의 짐이 다 있을 겁니다. 지금 출발하세요. 시간이 없어요!"

후다닥 뛰어나갔다. 정말 브런치 카페 앞에 소형 버스가 있었다. 버스에 앉자마자 환희가 PD 뒷담화를 했다.

"아 너무 하잖아여. 그냥 미리 말해주고, 준비하고 가면 어디가 덧나나여?"

그런데 갑자기, 환희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험담할 때는 조심해요.”

'아니 이 프로페셔널함 속에 약간의 부드러움이 섞여 있는 목소리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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