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프리 선언하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사실 간단한 이야기였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나가면 됐다. 물론 일거리가 없다면 문제였다. 하지만 연애 프로그램 같은 방송사의 간판 예능을 책임지는 예능 MC라 치면 일거리가 없을 리 만무했다. 아마 최악의 경우, 행사만 뛰어도 아나운서 월급보다 서너 배는 많은 수입을 낼 터였다.
하지만 이유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바들바들 손발을 떨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안 되잖여?”
“왜요?"
"내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디. 엄마한테 뭐라 할 건디? 결혼도 아직 못했구만!"
문루아가 이유미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언니. 괜찮은 생각 같은데요?"
"니도? 봐라 루아야. 이건 너보고 TYB 나가라는 거여~."
"저도 언니처럼 비합리적인 비교를 하면서 사람을 닦달하면 당장 나갈 거예요. 저는 그런 대접을 안 받으니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겨?"
이유미가 찌이잉~하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대안인 듯했다.
하긴, 아직은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방송국을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시절이었다. 프리 선언한 아나운서가 예능 MC 등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변화가 다가오리라는 점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기업 행사 같은 거만 인지도를 통해서 해도, 회사 월급 정도는 금방 나와요. 그럼 생활 되잖아요?"
"하지만 불안하잖여!"
"이유미 씨 정도 인지도의 연예인은 큰 사고만 안 치면 큰 문제 없어요. 바짝 당겨서 벌고 저축하면 되죠."
"그러면 메인 앵커도 못하자녀!"
그래도 아나운서라고, 메인 뉴스 앵커로서의 꿈은 있던 모양이었다.
"거친 말 죄송합니다만. 아니, 바보 아니에요? 어떻게 이제 와서 앵커를 시켜요! 연예 프로그램 진행자를 메인 뉴스 앵커로 시킬 리가 없잖아요?"
이유미나 흑흑 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문루아가 말했다.
"오히려 잘 됐어요 언니. 저랑 같이 투어 돌아요!"
"머여?"
"언니 일어 잘하잖아요. 영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약간 어설프게 할 줄 알고!”
"그려."
그건 몰랐다. 역시 지상파 방송국 아나운서다운 스펙이었다. 나는 mp3 치트키로 간신히 익힌 외국어 실력을 겨우 구비하고 있었다.
"저 투어의 진행자 필요했어요.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잘 됐어요. 저랑 투어나 돌아요."
"그래도 되겄써??"
이유미가 울음을 그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제서야 주변이 보였다. 나와 문루아, 그리고 이유미만 있던 게 아니었다. 젤다가 이유미 뒤편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이 상황을 다 본 걸까… 얼마나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이유미가 정적을 깼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표준어 말투가 돌아온 걸 보니 마음을 좀 다독인 듯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런 마음에 내가 한마디 했다.
"저, 선생님."
"선배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MC, 아니, 아직 아나운서인데 내 선배라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네, 선배. 그… 저는 사투리가 훨씬 좋은데요?"
이유미가 눈이 동그래졌다.
"그려?"
"그렇지 않아요 루아 선배? 훨씬 개성 있어요. 특히 아나운서가 아니라 외부 활동한다면 사투리가 훨씬 좋을 거 같아요. 오늘 촬영도, 사투리로 하셨으면 훨씬 인상적이었을 거 같은데요?"
문루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중하게 이유미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으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유미가 손수건으로 코를 홱 풀면서 문루아 말이 끊겼다. 이유미는 능숙하게 휴지로 얼굴을 정리했다. 화장은 좀 지워졌지만, 다시 원래의 얼굴로 금방 돌아왔다.
“그건 좀 생각을 해볼게요! 여튼 두 분 다 고마워요.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얘야~ 가자! 언능 오라이~"
‘방송 스태프는 또 왜 사투리로 부르는 건데??'
뭔가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기껏 이유미의 기분이 좋아졌으니 일단 넘어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젤다가 헛기침을 했다.
문루아가 그녀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젤다. 여기 계속 있었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소."
아무래도 문루아가 나를 찾으러 간 사이, 젤다가 가만히 앉아서 이유미의 푸념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외국인이라 되려 잘 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이유미의 말을 이해했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일일 테지만 말이었다.
내가 젤다에게 물었다.
"상황이 이해되셨어요?"
"과인에게는 조금 어려웠소. 미국은 대부분 코미디언이나 토크쇼 호스트는 사업가거나 프리랜서란 말이외다. 아나운서의 이동도 자유롭소. 문화 차이를 느낄 수 있었소.”
"오 그렇군요. 한국이랑 미국이 좀 다르군요? 가수도 다른가요?"
문루아가 말을 끊었다.
“아니 잠깐!"
내가 되물었다.
"왜요?"
"’왜요'라니요! 아니 저 말투 뭐에요 젤다!"
"말투? 아 그러고 보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를 못 챘다.
문루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빨리 좀 알아차리라구요!"
젤다가 수줍게 말했다.
"사실 소인은… 한국의 엄마 때문에 온 게 아니오."
공식적으로 젤다는 '어머니의 나라 한국에 가보고 싶어서 한국말을 배웠다'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내용의 인터뷰를 한 참이었다. 그게 거짓이란 뜻이었다.
내가 되물었다.
"그럼 왜?”
"’엠퍼러 왕건'이란 쇼를 아시오?"
"엠퍼러 왕건? 그게 무슨… 어?"
'설마… '태조 왕건'을 말하는 건가?’
"그 show를 우연히 보게 되었소. 나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소! 그 스펙타클! 화려한 옷! 손에 땀을 쥐는 갈등까지! 그 방송을 보고 또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익히게 되었소. 그래서 태조 왕건의 녹화장을 순례하기 위해 이렇게 고려행을 택한 것이오."
"하하…"
문루아가 계속 물었다.
"그래서 사극 말투가 더 편하다는 거군요?"
"그렇소. 평소 방송에서는 필사적으로 감추지만…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원래 말투가 나와 버렸소."
"그렇군요."
하긴, 최고의 아나운서가 울고불고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당황할 만했다.
젤다가 나와 문루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이건 비밀로 해 주겠소! 부탁이외다!"
문루아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대답했다.
“아... 네... 뭐..."
그리고는 내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도 딱히 생각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무난하고 적절한 대답을 했다.
"약조를 하겠소!”
젤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하오! 나를 놀리는 것 아니오!"
"아니, 그냥 톤을 맞췄달까요..."
문루아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분명 놀린 거예요."
"선배도 제 편을 들어 달라고요. 그럼 선배가 대답해 주세요."
"내가 왜요!"
...여튼 그렇게, 다양한 이들의 비밀(?)을 알게 되며 '소울 메이트' 촬영이 끝났다.
* * *
언제나처럼 귀갓길은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였다. 오랜만에 뒷좌석에 환희가 앉아 있다는 사실만 조금 새로웠다.
‘예전에는 뒷좌석에 재호, 환희랑 같이 활동을 많이 했는데.'
요새는 음악방송 정도 외에는 개별 활동이 많이 잡혀서 통 함께 퇴근을 하지 못했다. 그 점이 아쉬웠다. 그 시간 정도 외에는 같은 팀이라도 함께 터놓고 대화를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생각난 김에, 환희랑 좀 대화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슬쩍 환희에게 운을 띄워 보았다.
"내일은 드디어 음악방송이지? 오랜만에 완전체로 활동하겠네?"
모자를 푹 쓰고 쉬고 있던 환희가 말했다.
"그러게여. 거의 2주 만이네여."
"앞으로는 좀 자주 같이 활동하면 좋겠네."
잠자코 카스테레오에서 들려오는 키샤 콜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던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말을 얹었다.
"이번 활동 전략이 ‘따로 또 같이'여서 개인 활동이 좀 많았던 거구요. 아마 내일 이후로는 완전체 활동이 많아질 겁니다."
내가 되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배영웅 매니저는 씨익,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내일 저희, 음악방송 1위 할 테니까요. 1위 할 때까지만 개인 활동으로 최대한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밀도록 한다. 그게 이번 비원더 활동의 전략이었습니다."
환희가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손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에이 실장님! 그건 아직 모르자나여! 잇츠쇼타임에 밀려서 2위 할 수도 있져."
배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1위 할 겁니다.”
환희는 물론, 나까지 당황할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내가 슬쩍 물었다.
"머 확신이 있으신가요?"
배영웅이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직관이란 거죠. 다만 그게 대충 느낌이란 뜻은 아니구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가수들과 함께 음악방송을 나와 봤어요. 그 데이터가 쌓이면서 얻은 직감이랄까요?"
환희가 낮은 목소리로 슬쩍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시니 왠지 믿고 시퍼지자나여.."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음악방송 1위라니,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한국의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처럼 많은 가수 중에 1위를 한다는 것, 엄청난 의미였다.
내가 이전 생에서 코러스나 하는 3류 가수 지망생으로 살면서 매일 꿈꾸던 그런 일이기도 했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
* * *
다음날 음악방송 '생방송 최고가요'
"생방송 최고가요! 이주의 1위는~~~”
사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의 ‘직감’을 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1위를 노리는 잇츠쇼타임은 그야말로 방송을 폭격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CF보다 잇츠쇼타임의 뮤비를 더 많이 볼 지경이었다.
언론 플레이도 예술의 경지였다. 신문은 물론, 지상파 메인 뉴스에까지 인터뷰를 땄다. 라디오마다 잇츠쇼타임의 노래를 뽑았다. 자연스러운 열풍이 아닌 소인중의 전방위적인 로비가 그 배경에 있었기에 어색한 흥행이었다. 하지만 노래란 자꾸 들으면 좋아지는 법이었다. 아무리 어색한 언플이라도 효과는 있었다.
발표를 앞둔 아나운서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주의 1위는~~~~ 바로오오~~~~~”
슬쩍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봤다. ARS 점수를 제외한 모든 점수가 공개된 상태였다. 음반 점수 등은 우리가 우위였지만 방송 점수 차는 1만이 넘게 벌어져 있었다.
관건은 비원더의 팬덤, ‘원더풀’이 그만큼 강한 ARS 화력으로 이겨줄 수 있을지였다.
‘우리 활동으로 ‘원더풀’이라는 씨앗을 과연 얼마나 심었을까?’
잘 몰랐다. 하지만 희망은 원더풀뿐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때였다. 드디어 아나운서가 입을 열었다.
“1위는 비! 원! 더! 축하드립니다!!!”
…어이없이 꿈이 이루어져 버렸다. 팬들의 함성소리가 너무 울려 사회자의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자! 어떠신가요?"
소감을 말할 차례였다.
“우선 원더풀 팬들과 천채왕 선생님. 배영웅 실장님. 김나리 담당자님. 및 모든 TYB 분들 덕분입니다.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생과... 흑!”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전 생부터, 대략 40년 가까이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재호가 잽싸게 마이크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넉살 좋게 회사 직원들부터 방송사, 녹음 참여진,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팬들까지, 연락해야 할 사람을 모두 빠짐없이 다 꼼꼼히 언급했다.
‘정 없는 자식...'
사실 그래도 고마웠다. 재호처럼 냉정한 녀석이 있기에, 내가 내 감정에 빠져도 인터뷰가 계속될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슬쩍 옆에 서 있는 환희를 봤다. 환희도 어느새 '주하늘' 버전이 되어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내 울음이 그쳤다. 환희 머리를 툭툭 두드려줬다.
"끄으으으으응...~"
환희, 아니 하늘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볼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녀석도 나름대로 힘들었을 터였다. 만년 연습생으로 마음고생을 그리 오래 했으니, 당연히 감정이 터질 만했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철썩! 하고 쳤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앤젤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나왔다.
“뭐죠?"
"축하… 한다."
앤젤이 시선을 내게서 돌려 버리면서 말했다. 환희가 슬쩍 쿠사리를 줬다.
"뭐에여! 이제 와서!"
내가 환희를 손으로 제지했다. 그리고는 앤젤에게 대답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시네요?"
"나는… 동료가 우승하는 거 질투하고, 그런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아. 그게 내 ‘가치'다."
"그래요?"
나도 모르게 푸훗, 하고 살짝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저절로 흘러나왔다.
앤젤이 말을 이었다.
"너도 네 가치가 있겠지? 1위 하니까 어때? 네 말대로 허무한가?”
“..."
'그럴 리가 있냐! 바보냐!'
"아니요 기분 째지는데요. 너어어무 좋습니다!"
"너 너어 이 자식!"
환희도 박장대소했다.
"아하하하하! 횽 아주 굳이에여 굳! 제대로 엿 멋였어여!"
그 사이 재호가 프로페셔널한 감사 멘트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혹시나 언급 못 한 모든 분들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언급하지 못한 것 미리 죄송하구요. 앞으로도 비원더의 여정을 잘 부탁드려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다시 한번 청해 듣겠습니다. 비원더의 '개 쩔어’!"
그렇게, 모든 팬들의 감사와 환호성과 함께 1위 앙코르 무대가 마무리되었다.
* * *
방송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천채왕의 전화였다.
'뭐지?'
배영웅이 전화 받으라며 손짓하며 말했다.
"바로 받으시면 됩니다. 중대 발표가 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