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소리가 들리는 곳은 MC 이유미의 대기실이었다.
슬쩍 귀를 문에 대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딕션이 좋은 이유미라 소리가 훤히 다 들렸다.
"안뎌~ 노래 대결 해야혀."
목소리의 주인은 이유미였다. 방송 중에는 철저한 아나운서식 표준어로 말했는데, 실제 말투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제가 지금 상태가..."
"너만 힘들어? 다른 모든 애들이 다 힘든데 하잖여. 권노을! 걔도 너랑 스케줄 똑같잖여. 근데 걔는 빼달라고 안 하잖여?"
앤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무너진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mp3 덕에 목소리를 어제 완전히 회복했다.
앤젤이 나보다 못나서 목소리 회복이 안 된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온 힘을 다해서 노래를 부르고, 오늘 또 노래를 부른다는 스케줄 자체가 좀 무리였던 측면이 있었다.
앤젤이 터벅터벅 문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하게 다른 방으로 가서 숨었고, 몰래 앤젤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복도를 걷는 앤젤의 모습이 매우 지쳐 보였다.
* * *
몰래 주환희와 함께 방송사 바깥에 나왔다.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면서 방금 본 광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환희가 말했다.
"머 형은 노래 대결해도 되자나여?"
"그치. 대본에도 나랑 앤젤이 '앤젤의 복수혈전' 뭐 그런 식으로 노래 대결을 하면 좋겠다고 쓰여 있었고."
"그럼 머 하면 되죠. 걔는 좀 안됐지만 어쩔 수 없자나여?"
"음…”
일단 생각을 좀 해봤다. 굳이 예능에서까지 앤젤을 이겨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다고 내 가수 인생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래도 내 분량이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시점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뭐해요?"
문루아였다.
"아, 이런 상황이 이써써여, 선배…”
환희가 얼추 내가 들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다 들은 문루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유미 언니가 너무했네요! 시청률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내가 되묻자 문루아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튼! 굳이 그런 식으로 목소리도 안 좋은 사람이랑 노래 대결한들,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어요? 비원더가 더 멋져지진 않을 거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랬다. 컨디션이 좋은 앤젤과 노래 대결을 해서 이긴다면 내 이미지가 좀 좋아질지는 몰랐다. 하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앤젤과 대결해서 이긴다면, 앤젤이 조롱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내가 딱히 더 띄워질 거 같지는 않았다.
내게 이득이 안 된다면, 굳이 이겨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했다.
"저 선배, 그럼 한번 이런 걸 해보면 어때요?"
* * *
휴식 시간이 끝나고, '소울 메이트' 녹화는 계속됐다. 앤젤은 그야말로 죽 쑨 표정이었다. 더 웃긴 건 환희와 젤다 커플이었다.
젤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환희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앞만 봐요. 나 보지 말고.”
환희 또한 거짓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라 해도 안~ 볼꺼거든여?"
'...뭐하냐 니들.'
이번 커플 대결은 간단했다. 커플이 함께 앉아 있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성의 심장박동수를 가장 높게 만드는 팀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한마디로 여성의 마음을 알아서 두근거리게 하라는 거였다.
나는 문루아 선배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거 너무 저희에게 불리한 거 아니에요?'
'귀, 귀 대고 말하지 마요.'
...그러고 보니 귓속말은 처음이었다.
'선배는 전력 질주하면서 발라드도 부르는 강철 심장 소유자인데 제가 어떻게 이겨요?'
'하하하. 제가 좀 그렇죠.'
'?'
여튼, 대본상에는 이 대결에 앞서, 나와 앤젤이 노래 대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유미가 앤젤에게 물었다.
"앤젤 씨!"
"네 넵!"
"이번에 모 예능에서 아깝게 권노을 씨에게 패배하셨잖습니까? 노래 대결에서?"
"네네..."
앤젤은 썩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인터뷰가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미는 그러거나 말거나 앤젤에게 우악스럽게 질문했다.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복수 한 번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 좋습니다.”
좋다고 말은 했지만, 앤젤의 목소리는 안 좋았다. 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 꼴이었다.
이유미가 이번에는 내게 물었다.
"권노을 군은 어떻습니까? 이 도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나는 씨익 웃었다.
굳이 방송국의 놀음대로 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내 활동, 그리고 비원더의 가수 커리어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뇨.”
이유미가, 내 거절을 예상 못 한 듯 되물었다.
"네?"
"저는 커플 댄스 대결을 하겠습니다. 음악 주세요!"
바로 문루아가 음향 감독에게 손짓했다. 문루아가 이미 손을 써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커플 댄스 대결이 노래 대결보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 이걸 하겠다고 말해 둔 것이다.
어차피 노래 대결을 해봤자 내 노래 실력이 돋보일 것도 아닐 터. 차라리 문루아 선배가 좀 더 돋보이게 하는 게 이득이었다.
춤추기에 어색한 슬로우 템포의 알앤비 곡이 흘러나왔다. 알리시아 키스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을 감미롭게 노래했다.
나는 그 뭐랄까, 탈춤과 흐느적의 중간에 가까운 어떤 행위 예술을 실현했다. 그에 반해 문루아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턴을 돌았다. 마치 원래 이런 안무인 듯한 아름다운 턴이었다.
마치… 발레 같았다.
슬쩍 옆을 흘겨봤다, 앤젤과 정호정은 급하게 엉거주춤하게 블루스를 췄다. 딱히 훌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매우 아름다운 문루아의 춤이나, 웃음이 요절복통 터지는 내 춤과는 아예 격이 달랐다.
이렇게 하는 것이, 노래 안 되는 앤젤과 어설프게 노래 대결을 하는 것보다 나와 문루아 선배의 커리어에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깔깔깔깔깔깔. 그만! 그만! 그마안~~! 와! 노으리 너 대박이다! 왜 이리 웃겨. 깔깔깔깔깔. 아 미치것네."
이유미가 깔깔깔 대면서 내 어깨를 쳤다. 아마 처음에는 내가 대본대로 하지 않아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안인 '커플 댄스'가 너무 웃겨서 대충 잘 넘어간 걸로 보였다. 이유미는 너무 웃겨서 눈물이 고인 듯, 연신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댄스 대결은 어찌어찌 대충 잘 넘어가고, 바로 정식 게임으로 넘어갔다. 이제 심장박동 대결 차례였다.
다른 사람들은 눈을 빤히 쳐다보고, 사랑스러운 고백을 담은 편지를 읽는 등 온갖 로맨틱한 컨셉질을 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문루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루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네?"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게 좋아요.”
"아니 저희 분량 챙겨야죠."
"충분히 챙겼어요."
"아니, 선배가 방송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자고 했잖아요?"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거라고요! 잠깐 쉴 줄도 알아야죠!"
망했다 싶었다. 그런데…
"1위는 문루아 씨입니다! 와 권노을 문루아 커플이 1등을 했어요. 최고의 매력둥이 킹카 권노을 씨! 어땠어요? 비결이 뭐에요?"
"...비결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 * *
당연히 커플 우승은 나와 문루아였다. 킹카 퀸카로 선정이 되어서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떠나는 특전을 누렸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나?'
오늘 방송이 어떻게 편집될지 상상해 봤다. 일단 우승했다. 이것만으로도 분량을 어느 정도는 챙겼다.
거기에다가, 행운인지 불행인지 내 절망적인 춤 실력 덕분에 코믹 분량도 적절하게 넣었다. 노래 실력을 강조하는 부분이 거의 없었던 게 아쉬웠지만, 이유미 MC가 마지막에 '우승 기념으로 노래 한 곡 불러줘요!’라고 말 해준 덕에 잔잔하게 한 곡 부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분량과 개그, 노래까지 모두 잡은, 훌륭한 출연이었다.
게다가, 내가 투입된 진짜 이유였던 '주환희 감시'도 나름 적절하게 성공했다.
환희는 자신과 앙숙인 젤다와 커플이 된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둘이 무슨 스캔들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한 시름 놓았다.
"자, 그럼 환희가 옷 갈아입는 동안 핸드폰이나 확인해... 볼... 까...?"
갑자기 뒤통수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앤젤이었다.
그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무슨 짓이냐?"
"뭐가... 요?"
"왜 나를 도왔지? 내 목 상태가 안 좋아서, 지금 노래 대결을 하면 무조건 네가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아아. 그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저 녀석, 왜 내가 라이벌인 자신을 위기에서 도와줬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앤젤이 빈정대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풀 컨디션에서 이겼으니까. 나 따위는 또 대결해 봤자 싱겁다 이건가?"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뿐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해주었다.
"그야 멋없으니까요."
"뭐?"
"당신은 뭐가 되고 싶던 거죠? 1등 가수? 아니면 나보다 한 뼘 잘난 가수?”
"큭!"
...정신에 데미지가 들어간 표정을 보니 정말 '권노을보다 쬐끔 잘난 가수'가 목표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런 목표 가져봐야 멋없지 않아요? 안 되면 짜증 나고. 잘 돼봤자 잠깐이고 얻고 나면 허무하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
앤젤이 아무 말 없이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데뷔해서 만나고 반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가수가 되자.'는 것이 진짜 목표였다. 지금, 컨디션이 나쁜 상태의 앤젤과 대결하는 건 가족에게 자랑스럽지 않았다. 또한 자랑스러운 가수가 되는 과정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무리한 대결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이유가 필요한가요?”
앤젤은 충격을 받은 듯 대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마치 소파에 가라앉는 듯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문루아 선배였다.
"아 선배! 고마워요. 덕분에 우승했어요."
“윽! 그, 그건… 우연이에요! 춤을 그만큼 격렬히 췄을 뿐이라고요. 알겠어요?"
"네... 에?"
"여튼, 지금 나와 봐요. 빨리! 난리에요."
"난리요?"
"도저히 나는 안 되겠으니까 좀 뭐라도 해봐야. 그런 거 잘하잖아요?"
문루아 선배에게는 내가 뭔가 사람 마음 잘 다독이는 그런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슈퍼스타 T 시절, 숙소 생활을 하면서 내린 결론인 듯했다.
'아니 근데, 대체 뭐를???'
나는 문루아 선배를 따라 허겁지겁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 *
문루아 선배를 따라간 대기실에서는 이유미 MC가 펑펑 울고 있었다. 손수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나는 나쁜 년이여!”
내가 귓속말로 문루아에게 물었다.
'원래 좀 아시는 분이죠?'
‘맞아요. 유미 언니 예전부터 알았어요.'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나요?'
'몰라요. 녹화 끝나고 고맙다고 인사하러 대기실 들렀더니 이 상태였어요.’
‘뭘 고맙다고 인사하죠?’
'그건 신경 쓰지 말고! 여튼. 좀 어떻게 해봐요. 저 그… 막 그런 능력 있잖아요?'
'그렇게 말을 하셔도…'
일단 이유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봇물이 터진 듯, 자기 사정을 털어놓았다.
원래 뉴스 앵커를 꿈꾸고 방송국에 입사했건만, 방송국은 그녀를 철저하게 예능 MC로 돌렸다. 이적이 잦고 출연료가 비싼 개그맨 출신 MC 대신, 싼값에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출연료는 1/10은커녕 1/100도 되지 않았지만 예능 MC로서의 능력은 출연료 비싼 개그맨들과 동등한 기준으로 비교당했다. 그 중압감에 그녀는 자꾸 주변을 다그쳤다.
“그란디 노으리 당신이! 동료가 곤란해 하니께 대신 망가지는 거 보고, 내 마음까지 같이 무너지는 거여! 뭐땀시 내가 이 지랄스 하고 싶나~ 싶고. 그냥 내가 디져 부러야지!"
"아니 뭐 그럴 거까지야..."
"하지만 방법이 없잖여! 국장님이 닥달하니께! 죽으라 하면 죽어야지 뭐!"
그건 좀 이상했다.
“방법이 왜 없어요?"
뻔한 답이 있었는데, 그걸 이유미는 못 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