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내 춤솜씨를 뽐낸 후에는, 한결 편해졌다. 나를 향한 과한 시선이 싹 다 사라진 탓이었다.
'근데 왜 눈물이 나지?'
그러거나 말거나, 녹화는 계속됐다. 댄스 신고식이 끝나자마자 다음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유미가 힘차게 룰을 설명했다.
"그러면, 커플 선정에 앞서, '퀴즈 게임'을 하겠습니다. 답을 알면 바로 이름을 외쳐 주세요. 오답을 말하면 1분간 참여가 불가능합니다."
다음 게임은 정적인 게임의 정석인 퀴즈였다. 제작진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우선 이 '퀴즈 게임'은 다른 개그맨 출신의 MC보다는 아나운서인 이유미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댄스 신고식은 상당한 체력을 소진하는 코너였다. 나야 막춤을 춰서 정신적 데미지만 받았지만(ㅠ) 댄스가 주력인 참가자들은 이미 숨을 헐떡거렸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었던 환희는 당시 배웠던 아크로바틱 춤을 추느라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문루아 또한 엄청나게 고난이도의 춤을 춘 덕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숨기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녀를 자주 봐서 그 상태가 보였다.
그러니, 완급 조절을 위해 이런 정적인 게임이 필요했다.
이유미는 계속해서 룰을 설명했다.
"퀴즈는 딱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만 진행되는데요. 영화, 음악, 경제, 우리말, 그리고 수도까지 다양한 주제의 퀴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환희 군?"
"네, 네에?"
환희가 죽을상을 하고 대답했다. 아직 피로 회복이 덜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유미가 질문했다.
"무슨 테마가 제일 좋으시겠어요?"
"허, 허억.... 잘 모르게써여… 암거나 상관없을 거 가타여."
"그렇군요, 그럼 노을 군은요!"
“저는… 음악이면 좋겠네요."
"역시!"
사실, 내 인생 경험이 남보다 더 많다고는 해도, 이는 음악에만 한정되었다.
음악 외에는 딱히 일반인보다 더 유리한 점도 없었다.
음악 퀴즈도 마찬가지였다. 출제 범위는 앞으로 미래의 음악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음악에 한정될 터였으니 말이다. 딱히 내가 유리한 점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주제보다는 음악이 낫겠지.'
슬쩍 환희를 봤다. 환희 또한 아는 게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박학다식한 재호가 아쉬웠다.
이유미가 제비뽑기를 문루아에게 건넸다. 문루아는 뒤적뒤적하더니 제비를 뽑았다.
이유미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가 뽑은 제비를 발표했다.
"자! 오늘 퀴즈의 테마는.... 바로바로바로… '수도'입니다.”
“예쓰!"
지켜보고 있던 외국인 여성 패널 젤다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다 보니 좀 수도 대결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문루아 또한 여유 있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아시아 투어를 밥 먹듯이 다녔고, 유럽, 북미 콘서트도 해봤던 월드 스타였으니 자신이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반해 환희는 죽상이었다. 슬쩍 귓속말로 내게 물었다. 녹화 중이라 본 모습이 아닌 '주환희' 버전이었다.
'형 미국 수도가 머였져?'
'뭐?'
'뉴욕이져?'
'...... 아니?'
'머야! 그럼 설마 엘에이에여?'
'아니… 워싱턴 DC란 곳인데.'
'그게 머에여? 아~ 왜 그렇게 어렵게 만드는 거에여. 짱나게.'
'...너 미국 교포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제라도 전라도 남쪽 바다의 섬 출신이라고 솔직하게 밝힐까?'
'...차라리 주글래여, 횽.'
머리가 슬슬 아파왔다.
“자! 문제입니다! 영국의 수도는?"
초반은 역시 거저먹는 문제였다.
"문루아! 정답은 런던입니다."
문루아는 폭발적인 반응 속도로 초장부터 일찌감치 앞서 나갔다.
"호주의 수도는… 어디일까요?"
“주환희!”
"앗 잠깐만??!"
내가 손 쓸 틈도 없이 주환희의 손이 나왔다. 정호정도 함께였다. 이유미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이 거의 동시에 말하셨네요. 카메라 판정을 해볼까요?"
환희가 과장된 몸짓으로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이디 퍼스트."
'...개폼잡긴.’
정호정이 말한 정답은 '시드니'였다.
"땡!"
주환희가 미안하다는 듯 쿡쿡 웃으며 말했다.
"죄쏭하네여… 레이디에게 한 배려로 제가 이득을 챙기다니.... 죄송해여."
이유미가 재촉했다.
"정답은?"
"시드니!"
"땡!"
...오답이었다.
"아! 왜요!"
"나도 정답은 몰랐지만 '시드니'가 아닌 건 알았는데!"
젤다가 손을 들었다.
"정답은 캔버라입니다."
정답이었다.
"다음 질문입니다. 구룡도의 수도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환희가 '세부?'라고 말했다가 망신만 당했다.
"왓? 더? 크크큭. 바보같애!"
젤다가 소리 나게 크크큭 하고 웃었다. 그걸 본 환희가 내게 홱 돌아서서는 불만을 표했다.
'뭐에여 쟤는! 한국인이 좀 모를 수도 있는 거져! 지는 전라도 도청이 전주에 있는 줄 아나?'
'환희 너는 일단은 교포잖아. 외국인이 모른다는 게 웃긴가 보지.'
환희가 아주 잠깐, 찰나의 시간 동안 주하늘로 변해서는 나직하게 물었다.
'형 지금 저 사람 편드는 거예요?'
'아니 저 그게… '
'저 화 안 났어요. 솔직히 말해도 돼요.'
…삐진 하늘이를 달래느라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퀴즈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1등은 젤다였고 그 뒤를 바짝 문루아와 앤젤이 쫓고 있었다.
"다음 질문입니다. 조금 특이하게 가보도록 할게요. 미국 일리노이주의 주도는?"
"주환희! 답은 시카고에여!"
환희가 누구보다 빠르게 정답을 외쳤다. 정확했다. 이유미가 되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맞추셨어요?"
"제 고향입니다."
젤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주환희를 쳐다봤다.
"헤에…?"
내가 귓속말로 물었다.
'너 시카고가 고향이냐?'
'그럼여. '주환희'의 고향은 시카고져.'
'주환희'의 '설정상' 고향은 시카고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본인 설정을 만들면서 시카고만은 면밀하게 조사해 둔 모양이었다.
나도, 내가 어떤 계기로 자세히 알아본 범위에서 문제가 나와야 그나마 승산이 있어 보였다.
그 사이, 퀴즈는 흘러 흘러 어느새 마지막 문제까지 왔다.
"이번 퀴즈는 스페셜 라운드로… 천 점 드립니다!"
"우와앗!"
갑자기 점수가 10배로 뛰었다. 현재 최고 점수인 젤다가 900점이니, 사실상 마지막 문제를 맞춘 사람이 1등인 셈이었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남아… "
"권노을!"
내가 누구보다 빨랐다. 아마 젤다는 남아공의 수도가 어딘지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외국인이 '남아공'이란 말을 바로 이해하긴 어려웠다.
이유미가 내게 물었다.
"정답은?"
게다가 이 문제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문제였다. 보통은 남아공의 수도라 하면 케이프타운을 떠올렸다. 좀 아는 사람은 가장 큰 도시인 요하네스버그를 떠올릴 수도 있었다.
둘 다 틀렸다. 남아공은 수도만 세 개였다. 프리토리아, 블럼폰탄, 그리고 케이프타운까지, 3개의 도시가 각각 3권을 분리해서 가진 수도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아니. 오히려 반대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이전 생에서 동생은 내가 학비를 내지 못해 국악을 포기했다. 이번 생은 달랐다. 내 오디션 우승 상금과, 첫 활동 정산 금액 덕에 국악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곧, 동생의 해외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 첫 단추인 첫 공연이 바로 남아공에서 시작 예정이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동생의 꿈이 이뤄지는 첫 장소였으니까 말이다.
"정답! 권노을 우승!"
'동생 덕에 이런 게임도 이겨보네.'
* * *
짝짓기 프로그램의 꽃은 역시 커플 선정이었다.
커플이 되기를 원하는 여성에게, 남성 출연자들이 모여서 닭살스러운 구애를 했다.
그렇게 구애를 마치면 딱 한 명하고만 그날의 커플로 선정이 되었다. 나머지는 패자가 돼서 질질 끌려갔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처음 커플이 된 문루아에게 아무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안 나가?”
“미쳤어요, 횽?”
“왜 미쳐?”
“잔말 말고 빨리 가요, 횽.”
다른 참가자들도 뭔가 벌벌 떠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 기세등등하던 앤젤조차 그랬다.
‘뭐지?’
난 의아해하면서 혼자 단상으로 나가 문루아 뒤에 섰다.
이유미가 진행을 계속했다.
“문루아 씨. 사람이 많이 왔을 거 같나요?”
“많이 안 왔을 거 같아요.”
“왜요?”
“한 명만 있으면 될 거 같아요.”
“생각한 사람 있나요?”
“글쎄요.”
“자 그럼 문루아 씨 뒤를 돌아봐 주세요!”
문루아가 뒤를 돌아보자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주 살짝 표정이 굳어지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유미가 내게 물었다.
“문루아 선배를 선택하셨어요.”
“네에.”
“데뷔 때부터 많은 인연이었는데요. 그죠?”
“네에…”
그러고 보니 문루아 선배와는 슈퍼스타 T부터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그야말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자 그럼 문루아 권노을 두 분, 커플 성공!”
‘응?’
‘사랑합니까?’ 같은 2천년대식 돌직구 진행이 들어왔어야 했는데, 어째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막상 너무 닭살 돋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또 안 물어보니 섭섭했다.
하지만 꼭 그런 진행을 이유미가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정호정 참가자 커플 선정에는 남은 모든 남성 참가자가 다 나왔다.
“그럼 주환희 군. 정호정 양 사랑합니까?”
“사랑해여.”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춤으로 중명 하게씁니다!”
…그리고 바로 주환희는 당시 유행하던 비욘세의 댄스를 마구 춰 댔다. 여성 참가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꺄아악!”
“귀여워!”
“캬하하하 이게 뭐야.”
그에 반해 남자들은 모두 똑같이… ‘아 짜증 나’ 하는 표정이었다.
앤젤도 나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딱 둘이 마주쳤다.
“칫…!”
앤젤이 바로 고개를 돌려 보였다.
‘뭔가 매번 으르릉거리던 녀석이 기가 팍 죽으니까 그거도 좀 아쉬운데.’
그러거나 말거나 앤젤은 ‘러브게임’에서는 이겼다. 정호정이 커플로 앤젤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환희는 특유의 과한 프러포즈 남발로 연전연패, 그 결과…
“마지막 남은 주환희 씨는 자동으로! 젤다와 한 커플이 됩니다.”
주환희가 격하게 반응했다.
“아! 왜요!”
젤다도 발끈했다.
“진짜 싫은 건 내 쪽이에요! 가짜 외국인 주제에!”
“뭐여 가짜? 댁이야말로 가짜져. 외국인이 머 이리 한국말을 잘해여!”
보다 못한 나와 이유미가 둘을 중재했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대기실에서 좀 쉬자 쉬어.”
이유미가 덧붙였다.
“그 전에 깔끔한 클로징 하나만 더 찍고 갑시다. 다들 프로니까 깔.끔.하.게. 오케이?”
이유미의 강요로, 젤다와 주환희가 거짓된 프로 미소로 웃으면서 커플 포즈를 취했다. 이걸로 일단 클로징은 마무리되었다.
* * *
남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워낙 많은 게임을 해서 몸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휴우~ 피곤하네.”
옆에 다른 참가자들이 있었기에 환희는 ‘환희’의 모습으로 말했다.
“아~ 기대 많이 했는데. 하필 걔랑 돼서 쫌 짱나네여.”
“니는 원래 외국인 여성 취향 아니었어?”
“외국인이라고 아무나 오케이는 아니라구여 횽.”
‘이왕 주하늘의 모습을 숨길 정도로 조심할 거면 다른 출연자 험담도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남성 참가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늘이에게 이 메시지를 전할까 고민하려 했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고성이 들렸다. 여성 목소리였다.
“야! 얀뎌!”
‘안뎌? 웬 사투리? 오늘 출연자 중에 사투리 쓰는 여성이 있었나?’
조심스레 대기실을 나와 고성이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