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2천년대 중반, 한국은 짝짓기 프로그램 광풍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사랑한다며 영원한 사랑을 고백했다. 그리고 사랑의 대결을 하고 딱 한 번 커플끼리 게임을 했다. 그 게임 끝에 남는 승자 한 커플이 그 주의 승자가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녹화가 끝나고, 정말 둘이 커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적당히 시청자들이 꽁냥꽁냥 할 수 있게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하고는, 그 다음 주에는 모두 쿨하게 잊는, 그런 방송이었다. 연예인들은 물론 방송을 보는 시청자까지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하얀 거짓말 미팅인 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방송들이 인기 있었다는 게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방송이 정말 대단했다.
즉 비원더가 성공하려면 한 번쯤은 꼭 나와야 하는 방송이란 뜻이었다. 사실은 '외모신동' 원재호가 나오면 딱이었겠지만, 재호는 이미 인기가 워낙 많아서 리얼 버라이어티 촬영이 꽉 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 대타로 나와 환희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연애 중독에 가까운 환희가 염려가 된 기획사가 굳이 나를 감시역으로 함께 끼워 넣었다.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는 미팅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
연애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있었다. 그런데 마침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나니, 옆 대기실을 훔쳐볼 수 있는 명분까지 생겼다.
궁금함이 신중함을 이겼다. 주하늘, 아니, 주환희가 여성 출연자 대기실 문을 슬쩍 두드리는 상황을 지켜봤다.
문이 확 열렸다.
“뭐에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날카로운 턱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머리, 170cm를 훌쩍 넘는 길쭉한 신장, 무엇보다 엄청나게 차가우면서 당당한, 프로다운 말투까지 저건 분명… 문루아였다.
환희가 당황해서 말했다.
"서, 선배가 여길 왜 왔… 아니 와써요?"
'너무 놀라서 살짝 '주하늘'이 튀어나올 뻔했군.'
문루아가 말대꾸했다.
"인기 예능에 나오는 게 뭐가 어때서요!"
"아니 선배 지금 일본 콘서트 기간이잖아여!
"그럴 일이 있어요. 여성 출연자 방 기웃거리지 말아요."
그리고 문루아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하아..."
하늘이는 문루아에게는 꼼짝을 못 했다. 결국 다른 출연자가 누구인지는 방송 후에야 알 수 있나 싶었다.
"아!"
환희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종이 뭉치를 줬다.
"이거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이게 뭐지?”
"대본이요 대본!"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배영웅 매니저가 급히 어제 메모를 나눠줬다. 일종의 '권노을은 이런 사람이라고 연기해주세요'라고 지시사항을 적어둔 대본이었다.
그렇다고 별로 현실과 다르지 않았기에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런 발언은 조심해달라'라는 종류의 컨셉에 가까웠다.
['소울메이트' 방송 컨셉]
이름: 권노을
별명: 노래 천재 (킹오브싱어 우승자임을 어필)
노래 실력으로 이성들에게 어필할 것. (미리 연습했던 프러포즈용 노래들을 부르면 됨)
취미: 노래 연습, 영화 감상
이상형: 요리를 잘하는 여자
이상형이 좀 다른 걸 제외하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실제로 나는 노래 외에는 크게 취미도 없었으니까 말이었다.
과연, 대본에는 여성 출연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와 어떤 식으로 엮일 수 있을지 적당히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일을 해라'라는 지시사항은 없었지만 '이런 사람은 이런 컨셉이 있으니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쌓으면 된다'라는 식의 내용을 써두었다.
일종의 예능 매뉴얼인 셈이었다.
이 내용을 포함해도, 내 대본은 두어 장밖에 안 되었다. 그에 반해 하늘이의 대본은 딱 봐도 책 한 권 수준으로 두꺼웠다.
"너 그거 설마 대본?"
"형은 안 받았어요?"
"아니 나도 받았는데. 내 거는 달랑 두 쪽이었는데?"
"저는 형이랑 달리 문제아니까… 그렇겠죠?"
얼핏 우울한 척했지만 은근히 하늘이는 회사의 감시를 피해 하는 연애를 즐기는 듯했다.
대기실 방문을 내가 슬쩍 잠갔다. 그리고 물었다.
"하늘이 너 말야.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에요 형. 연애하고 싶어 한다고 한 대 치려는 건 아니죠?"
"미쳤냐..."
“그럼요?"
"그러고 보니 항상 궁금했어. 그… 바람둥이는 주환희지, 주하늘은 아니잖아?”
"그렇죠?"
"그리고 주하늘은… 가짜잖아? 니가 연기하는?"
"가짜라기보다는… 뭐 또 다른 제 캐릭터인 거죠."
부캐 같은 건가 싶었다. 여튼 질문을 이어갔다.
"주하늘은 딱히 연애에 관심도 없는데, 왜 주환희는 연애에 그렇게 목말라 하는 거야?"
하늘이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에이… 뭐에요. 그런 질문이었어요? 됐어요!"
"됐다니 뭐가? 화난 거 같은데."
"아니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리고 주하늘은 졸졸 구석으로 가서 대본을 중얼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주하늘답지 않았다. 하늘이는 좀 예민하기는 했지만 항상 예의 바르고 신중한 타입이었다. 저런 방어적인 태도는 거의 처음이었다.
'...이렇게 단순하게 질문해서 해결하기는 어렵겠군.'
아무래도 주환희가 연애에 굶주린 이유는,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좀 연구가 필요한 주제인 듯했다.
* * *
그러거나 말거나, 방송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유미는 아나운서임에도 화끈하게 망가지겠다는 듯, 츄리닝 차림으로 화끈하게 방송을 시작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소소소! 소울 메이트! 오늘은 과연 누가 진정한 사랑을 찾는 킹카, 퀸카가 될 것인지! 같이 확인해보시겠습니다."
퀸카라, 참 옛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2006년 지금 새삼 핫한 말일 거 같기도 했다.
그 전에, 우선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우선 오늘의 첫 참가자. 권노을 군입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권' 씨는 어지간한 경우 가나다순으로 세우면 맨 처음이었다.
"권노을 씨 이번에 ‘킹 오브 싱어' 우승했잖아요. 저도 잘 봤어요. 어떠셨어요?"
"아,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있었다 뿐이에요? 너무 잘했잖아요. 나 완전 반했어요. 대단하지 않았어요?"
"아, 그런가요?"
새삼 '킹 오브 싱어'의 파급력이 실감 났다. 분명 지금까지 내 인기도 나쁘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였고, 비원더라는 대형 기획사의 신인 그룹의 메인 보컬이기도 했으니 충분히 인지도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최고 인기 멤버는 언제나 '외모 신동 원재호'였다. 그렇다고 아이돌도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나쁘지 않은, 중상위권 정도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판도가 바뀌었다. '킹 오브 싱어'에는 앤젤만 있던 게 아니었다. 기성 발라드 가수, 록 레전드, 심지어 트로트 여제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실력파 가수들이 참여했었다.
그 방송에서 두 라운드 연속 1위를 거머쥐며 1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방송은 예상대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MC가 나를 대하는 대접이 아예 달라진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뭔가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여성 출연진을 보았다. 상당수가 뭔가 나를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그중 한 명, 예쁘장한 단발머리의 여자는 대놓고 내게 살짝 윙크까지 했다.
"!"
잽싸게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문루아가 서 있었다.
“??"
문루아는 매우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어 죽어라'라는 표정이었다.
적당히 인터뷰를 얼버무렸다. 다행히 다른 참가자로 인터뷰가 넘어갔다.
곧 문루아 선배 차례가 되었다.
"아시아의 달! 문루아 씨 오랜만입니다. 3년 만인가요?"
“그런 거 같네요 언니. 잘 지내셨죠?"
"그럼요. 아니, 문루아 씨, 이렇게 좋은 날 왜 이리 표정이 안 좋으시죠? 얼굴 풀어요.”
"아 네네. 괜찮습니다."
내게는 문루아의 짜증 섞인 표정이 보였다. 평소에는 철저하게 자기 제스처를 관리하는 그녀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기 쉽지 않았다.
귓속말로 환희에게 물었다.
'야, 문루아 선배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냐? 왜 저렇게 무서운 눈빛이지? 지금까지도 왠지 그런 거 같은데.'
'선배가요 횽?'
환희가 슬쩍 문루아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른 출연자들을 쳐다보더니 큭큭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알 거 같은데여."
"뭔데 뭔데?"
"안 가르쳐줘요 횽."
'으… 지는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아니, 누구나 자기 입장은 잘 모르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뷰는 내게 윙크했던 단발머리 여자에게로 넘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정호정', 현재 한창 잘 나가는 걸그룹 '캔디'의 센터이자 얼굴마담이었다.
“오늘 너무 무서워쏘요. 저를 지켜줄 왕자님을 찾으로 왔쏘요."
...말투가 내 타입은 아니었다. 환희에게 슬쩍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말했다.
'야 말투가 왜 저래?’
'쉿 횽, 들릴까 봐 겁나여.'
'그, 그래. 여튼.’
‘저런 거 남자들 좋아하지 않나여?'
'나는 전혀. 니는 좋냐?'
'아뇨.’
'그럼 너는… 음!'
니 취향은 뭔데?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 딱 봐도 익숙한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었다.
“젤다 씨! 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젤다 엘더입니다.”
"와~ 한국어를 너무 잘하시네요?"
"아닙니다! 많이 어색해서 연습하고 있어요."
'젤다'는 외국인 출연 예능 '미녀와의 식사'로 확 뜬 외국인 셀럽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인 출연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목구비는 모두 서양인 느낌인데 묘하게 짙은 갈색의 머릿결과 눈을 가지고 있어 한국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진짜 일편단심, 외국인 취향이구만 주하느… 아니 주환희 저놈은. 아니 둘은 같은 취향이려나? 역시 한 놈이니까?'
그녀가 살짝 어색한 발음의 한국어를 꼭꼭 씹어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주환희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주환희를 감시하려면 어디를 조심해야 할지는 뻔히 보이는 듯했다.
젤다 이후, 주환희를 거쳐 모든 참가자의 인터뷰가 끝났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확신을 얻었다. 루아 선배를 제외하고, 젤다 정도를 빼고 오늘 참여자 전원이 내게 뜨거운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애정 어린 시선이 계속 내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거 오늘 계속 이러려나? 나한테만 여성 출연자 프러포즈가 몰리는 거 아냐?'
"자아 이제 첫 번째 코너는, '소울 메이트' 만에 신고식이죠. 댄스~~~ 신고시익~~~"
"......"
이제야 기억이 났다. 내가 왜 미팅 프로그램에 나오기 싫었는지.
물론 그래, 나는 다시 태어났다. 미래를 알고 있었다. 살도 쫙 뺐다. mp3를 얻어서 노래 실력도 마구 키웠다. 심지어 체력과 외국어 실력도 얻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춤을 더럽게 못 추는, 몸치라는 사실이었다.
이유미가 당황해서 말했다.
"푸 푸핫! 노을 씨 이거 뭐에요! 개다리춤이에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막춤도 아니고 개다리춤도 아니고… 차라리 개가 자기 다리 춤을 흔드는 듯한 요상한 행위예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하!!!"
여성 출연자들 상당수가 빵 터졌다. 그중 정호정처럼 '극혐'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잊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미팅 프로그램을 나오기 싫었던 거였다.
젠자앙~.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문루아 선배였다.
"선배?"
"파하하 노을 군. 짱 웃겼어요."
“짜앙~?"
문루아 선배답지 않은 어휘였다. 여튼 문루아는 갑자기 엄청 밝은 표정이 되었다. 거의 달덩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을 군 무대는 생각도 안 나도록 내가 무대 부숴 버릴 테니까 걱정 마요."
"자 다음! 아시아의 달. 문! 루! 아!"
"우와아아아아아앗!"
문루아 선배는 바로 며칠 전 나온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신곡 'SexyBack’에 맞춰 그야말로 무대를 찢어 버리는 춤을 췄다.
"진짜 이 정도면 내 춤 잊혀지겠는데?"
환희가 옆에서 초를 쳤다.
"아니요 횽."
"뭐?"
“그 춤. 백퍼 박제돼서 영원히 남을 거에여. 횽 장례식에 제가 그 영상 틀어줄 테니까 마음의 준비 하쎄여."
"... 내가 너보다는 하루라도 더 오래 살 거다. 반.드.시. 각오해."
하지만 그때 나는 몰랐다. 내 그 형편없는 춤 실력이 불과 몇 시간 뒤, 내 문제를 해결할, 최대 무기가 될 것이란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