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바로 여기서, 내 비장의 무기가 나왔다.
원래는 여기서 후렴을 한 번 더 부르고 노래가 끝나야 할 시점이었다. 그 시점에 갑자기 반주를 멈췄다.
그 대신 밴드 마스터의 피아노 솔로가 시작됐다. 장중한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나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
난 너를 묶지
뱀처럼 칭칭
보내줄 순 없지
도망은 그만두지
씨익 웃었다.
이 곡의 후렴은… 잇츠 쇼타임의 이번 신곡, 이스트 웨이브가 프로듀싱한 곡 '뱀(BAAM!!!)'이었다.
우리 못지않게 유치한 가사에 강렬한 보컬이 떠오르는 곡이었다. 원곡은 힙합, EDM이 연상될 정도로 강렬한 반주가 돋보였다.
하지만 이 곡에 잔잔한 피아노 반주를 얹으니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알앤비 곡으로 변모했다.
'이건 베이비 심사위원의 아이디어였지.'
베이비 심사위원이 자기 곡과 매쉬업(Mash-up 서로 다른 두 곡을 섞는 기법)을 하면 좋을 곡이 있다며 잇츠쇼타임의 신곡을 들고 왔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베이비 심사위원 말대로, 음높이를 맞추고, 잇츠쇼타임의 곡에 편곡을 바꾸니 제법 잘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무엇보다 후렴이 서로 이어졌다.
내가 로프처럼 상대에게 묶인 것 같지만, 사실 나도 상대를 뱀처럼 칭칭 두르고 있다, 사실 우리 둘 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곡이 바뀌었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매쉬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다른 악기들이 반주에 뛰어들어 왔다. 노래도 다시 '로프'로 돌아왔다.
*
난 너를 좋아해
난 너를 좋아해
난 너를 좋아해
마지막은 모든 연주를 멈추고, 내 모든 감정을 담아 읊조리듯 잔잔하게 마지막 부분을 다시 부르며 마무리했다.
*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준비한 무대가 모두 끝났다.
"와아!!!"
"브라보!!!"
박수와 함성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소리가 좀 잦아지자 오창선 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무대였네요! 아~ 진짜~ 내 곡도 이렇게 해주지. 멘토 곡이라고 너무 차별해서 신경 써준 거 아닙니까?"
"설마요!"
"아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너무 좋았어요. 아주 창의적이에요. 어떻게 다른 곡을 붙일 생각을 다 했어요?"
"멘토분께서 해주셨습니다."
"이야 좋아요 좋아요. 다들 어떻게 보셨어요?"
심사위원들은 여태까지처럼 극찬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모두 자기가 멘토링한 가수가 있기 때문에 발언을 조심하는 듯했다.
베이비 선배 또한 자신이 경쟁자 중 하나라는 점을 의식한 듯, 방어적이고 무난한 심사평을 남겼다.
"제 생각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이 무대는 오롯이 ‘암행어사 출두야’ 몫입니다."
그렇다면 역시나, 승부는 특별 심사위원 둘이었다.
우선 김지태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거에요."
오창선이 되물었다.
"뭐가요?"
"누가 떠오르지 않잖아요. 예상할 수도 없고. 전 이런 노래가 좋아요. 이게 예술이죠. 베이비 선배 노래 잘 듣고 있다가, 갑자기 잇츠쇼타임에 신곡을 딱 때려 버리는 거야. 얼마나 좋아. 새롭고!"
"새로운 게 꼭 좋은 건 아닌데요."
"듣기 좋잖아요! 듣기 좋은데 새롭다. 이게 좋은 겁니다. 아하. 아주 재미있게 잘 들었어요. 기본기도 충실하고. 그러면서도 도발적이고. 저는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점 드리겠습니다."
멘토들은 물론, 방청객들까지 깜짝 놀란 듯 '우오오~' 하는 환호성을 냈다. 일부 방청객은 박수까지 쳤다.
박수 소리를 뚫고 정산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물러요! 그러니까 선배처럼 노래 잘하는 사람 곡이 맨날 뭔가 아쉬운 거야."
김지태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항의했다.
"야 시비냐? 이거 생방송이야. 전 국민이 보고 있어."
하지만 김지태의 눈은 웃고 있었다. 원래 이런 장난을 자주 하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정산혁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법 괜찮은 펀치였어요. 그건 맞아요. 근데 제 생각에, 원곡을 막! 아주 다 잊게 해주지는 못한 거 같아요. 뭔 말인지 알아요?"
내가 가면을 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이비 선배의 원곡 '로프'는 딱 하나의 멜로디로, 록 사운드를 활용해 기승전결을 만드는 압도적인 완성도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사실 그걸 내 노래 실력만으로 뛰어넘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매시업이 필요했던 거였다.
‘아마 매시업같은 묘수가 아니었으면 그냥 나쁘지 않은 무대로 남았겠지.'
정산혁은 바로 내 무대의 약점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심사평을 계속했다.
"다른 곡이 불쑥 튀어와서, 놀라서 그걸로 임팩트를 만든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냥 낫배드한 무대였을 거에요. 뭔 말인지 알아요? 한 번은 먹히겠지만. 나아~는 인정할 수 없어요."
잠자코 듣고 있던 김지태가 말했다.
"그 말은, 뭔가 대결을 하고 싶다는 겁니까?"
정산혁이 황당하다는 듯,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와앗?(What?)”
"야 저 과장된 반응! 맞네 맞어. 여러분, 저거 극찬입니다! 나랑 한 판 붙자! 뭐 이거에요. 쟤 웬만하면 가수들한테 안 저러거든요."
"부정하지 않겠어요. 내가 무대에서 한 방 먹여주고 싶어요. 언제 한 번 같은 무대에서 붙어봅시다. 펀치 말고! 노래로! 뭔 말인지 알죠?"
여튼, 평가가 괜찮았다는 뜻이었다.
어느덧, 생방송을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자! 그러면 이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참여 가수분들 모두 무대 앞으로 나와 주세요!"
변사또를 포함해 모든 가수들이 무대 앞으로 나왔다. 7명의 가수들 앞에서 오창선 선배가 힘차게 외쳤다.
"'킹 오브 싱어' 그 최종 우승자는….. 바로....!"
갑자기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오창선 선배의 목소리도 느리게 들렸다.
“권... 노... 을…!”
* * *
‘킹 오브 싱어' 녹화 후 배영웅과 함께 차를 타고 귀가했다. 사실 정신이 없었다. 멤버들은 물론 친구들, 가족들에게서 축하 문자와 통화가 쏟아졌다.
그중 가장 신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야! 노을아!!! 정말 축하한다. 키야아아아 우리 기획사 가수가 발라드 대결에서 우승을 다 하네!!
우승하자마자 천채왕이 전화로 축하했다. 모니터링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통화가 지금, 30분째 계속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굉장히 쿨하고 냉정한 천채왕이, 엄청나게 들떠 보였다. 그만큼 시청률 등 수치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천채왕이 신나서 떠드는 걸 뒤로 하고 내가 귓속말로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상하게 선생님이 들뜨셨네요?'
배영웅이 쿡쿡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말은 안 하셔도, 요즘 소인중이 자꾸 공격적으로 나와서 짜증이 좀 많으셨던 모양이네요. 우리 기획사 가수 나오면 자기 가수 출연 안 시킨다고 보이콧을 한다거나요.'
'아하...'
그러거나 말거나 천채왕은 신나서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귀를 잡아챈 말 한마디가 있었다.
-아주 그냥 기분이 좋아 죽겠네! 너 이번 활동에 1등 하면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말해라. 내가 들어줄게!
이건 놓칠 수 없었다. 이미 경험적으로 천채왕은 자기 약속을 지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 하나 소원을 받을 수 있다면, 바로 받아야 했다.
"선생님, 제가 딱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원을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배영웅이 내게 말했다.
"노을 아티스트님."
"네?"
"제가 제법 오래 매니저 일을 했는데요. 그런 소원은 처음 들어봐요."
"아 그럼 안 되나요?"
"아니요. 너무 좋아요. 노을 아티스트님 같은 아티스트만 있다면 참 매니저 하기 편할 거 같네요.”
"보통은 다른 걸 바랄까요?"
"으음.... 그렇죠. 악기 같은 선물을 사달라거나...."
재호 이야기였다. 배영웅은 말을 이었다.
"몰래 데이트하게 자유 시간을 달라거나.... 그렇게 해서 회사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요? 하하!"
'....환희 이야기군.’
그러고 보니, 쉴 틈이 없었다. 바로 내일이 ‘소울 메이트' 촬영 날이었다. 내 방송 분량도 신경 써야 했지만, 환희가 혹시 딴짓을 할지도 배영웅과 함께 감시해봐야 했다.
쉴 틈이 없었다.
슬쩍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운전 중인 배영웅 매니저는 참 표정이 편해 보였다. 지금도 여유롭게 운전대를 잡으면서도 브라이언 맥나잇의 노래에 맞춰 휘파람을 멋들어지게 불고 있었다.
"참… 바쁘네요 매니저란 거. 저야 제 몸만 건사하면 되지만 실장님은 사실상 혼자 셋을 담당하시는데, 안 힘드세요?"
배영웅 매니저가 휘파람을 멈추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 엔터 직종 사람들은 노는 게 직업이니까요. 쉬는 게 직업이고. 남들 일할 때 쉬고, 남들 놀 때 일하고.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나는 노는 게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편하더라고요."
"저야 노래하고, 예능에서 게임하고 그러지만 실장님은 그러시지도 않는데."
"막상 보면, 직접 하는 아티스트보다 저 같은 스태프가 대리만족이 더 큰 거 같아요. 이건 정신승리 같은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사실, 20대가 연애하는 게 뭐 나쁘겠어요. 가수니까 문제가 되는 건데."
"하긴 그렇네요."
뮤직비디오 촬영 때의 환희가 떠올랐다. 발정 난 망아지마냥 외국인 모델에게 달려들던 그 모습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의 잘생긴 남녀가, 베네치아에서 손잡고 걸어 다니는데 무슨 일이 안 일어나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2006년이었다. 발라드 가수조차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인기가 급락했다. 연애를 하더라도 몰래 해야 하는 시기였다. TYB는 초반에는 '정말' 연애하지 않고, 연차가 쌓이면 몰래 하라는 기조였다. 팬들이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이유였다.
...이 또한 가수라는 빛나는 직업의 그림자였다.
‘사실 나야 뭐 연애에 그렇게 목매는 타입은 아니지만, 환희는 좀 신경 쓰이려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주환희는 가면일 뿐, 그 속에 있는 본 모습은 '주하늘'이었다. 그는 정말로 연애에 목을 매는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는 건지 궁금했다. 지금은 그저 '그런 게 있다'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안의 진짜 모습, 진면목을 언젠가는 볼 수 있을까?'
* * *
‘소울메이트' 촬영 날이 밝았다. 배영웅 매니저, 주환희와 같이 사무실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같이 방송국으로 나섰다. 배영웅 매니저는 '녹화가 길고 고되니 꼭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식단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든든하게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탄수화물 머그니까 막 힘이 솟네요 횽!"
한가하게 농담하는 환희와 함께 방송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메인 MC인 이유미가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을 맡은 이유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유미는 30대 중반의 스타 아나운서였다. 여성 아나운서임에도 이례적으로 그 에너지와 진행 능력을 인정받아 연예 예능 진행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퇴사 후 사라져 버렸다.
'재벌가랑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었지.'
여튼 진행자로서 이미 검증이 된 사람은 분명했다. 그녀와 인사 후 바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앤젤이 와 있었다.
우선 내가 먼저 인사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앤젤이 인상을 구겼다. 한숨을 쉬면서 토해내듯 한 마디를 남겼다.
"또 너냐…"
그리고는 쓱 방을 나가 버렸다. 잠자코 보던 하늘이가 내게 말했다.
“평소에는 훨씬 발발거리며 달려들더니. 오늘은 좀 기가 죽었네요?”
"그러게."
'킹 오브 싱어'의 패배가 그만큼 충격이었나 싶었다.
그때였다. 옆 방에서 뭔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가 슬쩍 내게 제안했다.
“무슨 소리죠? 한번 확인하러 가볼까요?"
안 가볼 이유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