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권노을이 마지막 리허설을 마무리하고 무대를 나왔다. 복도에 나오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휴우..."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우선 편곡을 위해 베이비 심사위원과 함께 연구해서 전략을 짰다.
하우스 밴드도 가세해 편곡을 보다 구체화시켰다. 다행히도 이미 손발을 맞춰본 팀이라 어렵지 않았다.
[햐~ 뭐 이런 복잡한 편곡을 다 짰노?]
밴드 마스터는 이렇게 툴툴대면서도 내 요청을 단시간 내에 완벽하게 완료했다. 밴드 마스터는 예전에 소인중을 소개했던 죄(?)가 있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내게 잘 해주려 노력해주었다. 박찬용 등 다른 연주자들도 든든하게 밴드 마스터를 보좌했다.
그리고 보컬을 위해 오늘은 평소보다 더더욱 각별히 컨디션 관리를 했다. 어제 동생과 잠시 나눈 담소 외에는 말도 아꼈을 정도였다. 연습도 딱 필요한 만큼만 했다.
왠지 오늘 노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오늘 무대는 계속해서 기록으로 남아 박제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방송 무대가 그럴 테지만 이번 무대는 달랐다. 더더욱 중요한 무대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 생에서, ‘킹 오브 싱어'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방송이 되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 동남아,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까지 방송 포맷을 사서 히트할 정도의 인기였다.
그 모든 전설의 시작은 파일럿 프로그램이었고, 그중에서도 바로 지금 내가 출연하고 있는 회차였다.
이전 생에서 파일럿 프로그램 우승자는 한 걸그룹 메인 보컬이었다. 5년 넘게 성공하지 못했던 이 그룹이 우연한 원 히트 원더 곡으로 대성공을 했다. 마침 그때 메인 보컬이 '킹 오브 싱어'에서 실력파 발라드 가수를 노래로 물리치며 우승해 크게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그 걸그룹은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생에는 출연진이 완전 달라졌다. 우선 이전 생에서 우승했던 걸그룹 메인 보컬이 출연하지 않았다. 원래 없었던 나와 앤젤도 추가되었다. 아무래도 점점 내가 일으킨 변화가 만들어낸 나비효과로 인해 내가 기억하는 역사와 현재 역사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직 알고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는 비슷하니까. 다행이야.’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대기실에 도착했다. 복도에서는 코스튬으로 철저하게 내 본모습을 감춰야 했다. 온몸에 가면과 무거운 옷을 두르고 노래를 부른 덕분에 온몸은 땀 범벅이 되었다.
"휴우~."
대기실에 들어간 뒤에야 옷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배영웅 매니저가 시원한 차를 건넸다.
"한 잔 드세요.”
"아 죄송해요."
"목 안 마르신가요?"
"곧 노래할 거니까. 따뜻한 물로 부탁드려요."
배영웅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지어낸 웃음이 아니라 되레 작지만 더 진실되어 보이는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배영웅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서서히 마셨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오늘 부를 무대를 떠올렸다.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는데, 은근히 무대 준비에 효과가 좋았다.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실장급 매니저인데도 이런 잡일까지 혼자 다 한다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좀 안타깝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그 모든 마음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메이크업은 어떻게 하실래요? 어차피 가면 쓰고 노래 부르니까 하지 말까요?"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메이크업하겠습니다."
가면 속 얼굴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오늘 승리 후, 우승자 인터뷰를 할 테니 말이다.
* * *
킹 오브 싱어 방송이 시작됐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이번 방송은 라이브였다. 아무래도 훨씬 제작 난이도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돌아다니는 제작진 얼굴도 무거워 보였다.
나도 방송 확인을 위해 TV를 대기실에 켜 두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말했다.
"이번에도 엄청난 게스트 심사위원들이 온 모양이더라구요."
"이스트 웨이브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이요? 그러려면 무슨 퀸시 존스나 베이비페이스라도 와야 하나요?"
배영웅이 초승달 모양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게 진정성 없는 평소의 '사회성' 웃음이었다.
"한 명으로는 이기기 어려워서. 세 명을 썼더라구요."
"세 명...?"
화면을 보던 내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화면에 장면이 워낙 엄청나서였다.
진행자 오창선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특별 심사위원을 모셨습니다. 야 이거 제 입으로 말하려니까, 하하! 부끄러운데요. 여러분 혹시 '대한민국 보컬 3대장 아시나요?
네에~ 하는 소리가 관객석에서 들렸다.
한국에서 노래 좀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대한민국 보컬 3대장'을 알고 있었다.
강렬한 초고음 록발라더 오창선, 성악을 베이스로 소울풀한 알앤비 테크닉까지 갖춘 전천후 보컬 정산혁, 여기에 보컬 발성의 정석, 노래의 교과서로 불리는 팔색초 보컬 김지태까지 3인방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었다.
워낙 가창력으로 인정받는 양반들이라 2020년대까지 이들의 노래는 사랑받았다. 너무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들이라 노래방에서 부르는 건 금지였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그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다.
그 정도의 명성을 가진 걸출한 3인이지만, 같이 방송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창선 외에는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오창선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야. 이 두 분. 사석에서는 제가 자주 뵀죠? 공연이라든가. 근데 방송은 진짜 안 하시는 분인데. 어떻게 방송에 오셨어요. 저 보시러 오셨나요?
정산혁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여어~. 왓썹. 그건 아니고. 방송을 좀 피했어요. 한국말 잘 못 해서! 뭔 말인지 알죠?-
진짜, 환희보다 더 교포스러웠다. 오히려 억지스럽게 발음을 서툴게 하지 않아서 더욱 자연스러운 교포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산혁은 교포였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세련되고 소울풀한 노래를 했다. 성악처럼 풍성한 성량에 알앤비처럼 자유로운 테크닉을 섞은 특유의 발라드가 정산혁의 특기였다.
굳이 말하자면 나도 오창선 선배보다는 정산혁과 비슷한 타입이었다. 내가 언젠가는 경쟁해야 할 상대라고도 볼 수 있었다.
오창선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그럼 저 보러 온 건 아니었군요?
-맨날 봤잖아요 형. 요새 결혼하신다고 안 보이시는 거지.
-자!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다음 김지태 씨!
오창선의 유머러스한 진행에 관객들이 파하하 웃었다. 다음은 보컬의 정석, 김지태 차례였다.
-네.
-선배도 진짜 방송 안 하잖아요?
-아이 방송을 안 하는 건 아니죠. 그냥 바쁜 겁니다… 앨범 안 냅니까?
방송을 보던 배영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짓말이군요.”
내가 되물었다.
"뭐가요?"
“오창선 씨랑 출연 결정이랑 상관없다는 말이요."
“무슨 뜻인가요?"
"저 두 사람. 방송 울렁증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안 하는 거예요. 근데 같이 공연도 했을 정도로 친한 오창선 님이 진행을 하니까, 훨씬 자연스럽죠. 마음이 편하니까 방송을 수락한 거예요."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베이비 선배가 멘토여서 훨씬 편안했습니다."
"바로 그런 거죠. 마음이 편안해야 방송도 잘 되니까요.”
오창선 선배 덕분에 저렇게 화려한 심사위원 진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곧 저 따스한 심사위원들은 그야말로 악마로 변했다.
정석적으로 기본기 위주로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에게 정산혁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쉽네요! 노래도 결국 기 싸움이에요.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되는데 너무 안전하게만 불렀어요. 그러면 음정 박자는 맞죠. 하지만 제압당한 기분은 안 들어요. 노래방 점수 대결이 아니잖아요. 뭔 말인지 알아요?
배영웅 매니저가 깜짝 놀랐다.
"와우! 라이브인데. 신랄하네요. 가수들 저런 비판 듣고 감당되려나?"
다행히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표정이 드러나진 않았다. 그래도 당혹감이 몸짓에 드러났다.
그나마 묵사발 나지 않은 참가자는 바로 내 직전 차례에 노래를 부른 변사또(잇츠쇼타임 앤젤)였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면서 들었던 김지태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아… 음… 좋아요! 좋아요! 음정 박자 정확하고. 느낌 좋고. 감정 좋고. 파워 있고. 뭐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근데 뭐랄까… 이미 정답이 생긴 느낌? 변사또 님이 노래를 잘 하는 건 알겠어요! 근데 어떻게 부를지 1절만 들으면 다 알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실용음악과 가수들이 실력이 있는 건 알겠지만, 그런 가수가 유행하면서 노래가 너무 규격화되고 정답이 있어진 거 같아 아쉽다는 말을 길게 했다.
사실 앤젤은 실용음악과 가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매뉴얼 대로의 가수기는 했다. 김지태 또한 얼핏 보면 그런 가수였지만 또 달랐다. 그는 매뉴얼대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본인이 매뉴얼을 만드는 가수'였으니까 말이었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그만의 개성이 있었다.
'나는 매뉴얼에 눌리지 않고, 앤젤보다 더 잘 부를 수 있으려나?'
심호흡을 하고 무대로 들어갔다.
“꺄아~~~”
“권노을! 권노을!"
무대 위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눈이 부셨다. 눈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서는 생방송 무대라 그런지 조금 몸이 긴장한 느낌이었다.
오창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암행어사 출두야 씨! 지금 압도적 1위네요~. 도전자들이 만만치 않아요. 특히 방금 전 변사또 님은 점수가 상대적으로 아주 좋거든요?"
“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오창선의 말이 맞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는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 앞선 점수를 받았다. 역으로 계산해보면 내가 그래도 한 90점 정도는 맞아야 안정권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앤젤 외에는 모두 80점도 받지 못한 깐깐한 분위기라 더욱 불리했다.
오창선이 다시 내게 물었다.
“어떠세요? 자신 있으신가요?"
"자신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것이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그게 자신이지요. 그럼 암행어사 출두야 님 무대를 박수로 청해 듣겠습니다!"
박수와 함성소리가 끝나고, 암흑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때가 가장 떨렸다. 노래를 듣기 위해 무대의 모든 이가 내게 귀를 기울이는 고요의 몇 초가, 내게는 가장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박찬용 드러머의, 곡 시작을 알리는 가벼운 심벌즈 소리와 함께 곡이 시작됐다.
이번 노래는 베이비 멘토의 곡 '로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상 한 호흡으로 가야 하는 고난이도의 노래였다. 게다가 멜로디도 사실상 하나였다. 전반부는 저음, 후반부는 옥타브를 올려 고음인 게 전부였다. 이걸 편곡의 묘로 교묘하게 감정을 살려서 풍성한 곡으로 만든, TYB의 프로듀싱이 돋보이는 록발라드였다.
*
난 너를 좋아해
너에게 묶였어
헤어나오지 못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잔잔하게 1절과 후렴, 그리고 2절 초반까지 불렀다. 여기까지는 원곡과 사실상 같은 흐름이었다.
그리고 2절 후렴, 여기서 원래는 한 옥타브를 올려서 고음으로 감정을 터트려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뻔한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내게 제안한 비밀무기를 쓸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