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이스트 웨이브의 심사평은 냉담했다. 쌍욕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매우 예의 바르고 입에 바른말을 할 뿐이었다.
배영웅 매니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스트 웨이브의 심사평을 듣고는 이렇게 평했다.
"진짜 영혼이 아예 아무것도 없군요."
내가 대답했다.
“차라리 쌍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내 의견도 배영웅과 같았다. 정말 예의 바른 말투지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실제 모습은 어떠실지 궁금하네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을 말만 적당히 남긴 평이었다. 마치 노래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솔직하게 말했다.
"뭐 솔직히 이스트 웨이브는 이제 최고의 작곡가잖아요?”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쵸. 빌보드를 완전히 폭격 중이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10년간은 계속 그럴 예정이다 라고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미래를 아는 회귀자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잘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아 네… 뭐 그렇죠."
배영웅이 ‘별 싱거운 말을 다 하시네요'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다음은 앤젤의 무대였다. 앤젤은 자신의 필살기에 가까운 '바보 같은 말들'을 불렀다. 앤젤에게 딱 맞는 화려한 알앤비 발라드였다.
배영웅 매니저의 무대 평은 간단했다.
"훌륭한데요?"
나도 동의했다.
"그러게요."
사실 나도 배영웅도 그보다는 이스트 웨이브의 평이 더 궁금했다.
나와 배영웅 매니저 모두 이스트 웨이브의 마이크, 아니, 정확히는 그의 말을 옮기는 김나리 담당자의 마이크를 바라봤다.
-잘 들었습니다. 훌륭한 노래네요. 테크닉이 좋네요.
생각보다 싱거운 한 줄 평이었다.
내가 먼저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으세요 실장님?"
"심사평이요?"
"네."
“뭐 이전 평들보다는 관심이 간 거 같은데...."
“큰 차이는 없는 거 같죠?"
배영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앤젤은 나와 수준 차이가 있었지만, 다른 가수들 중에는 군계일학이었다.
갑자기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할 시간도 없었다. 앤젤 바로 다음이 내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 평을 하는 동안 무대 뒤에 가서 대기해야 했다.
잡생각은 그만두고, 내 무대를 보여 줄 시간이었다.
* * *
통역을 위해 이스트 웨이브 옆자리에 앉았던 김나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대를 지켜보는 이스트 웨이브의 태도가 너무 불성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쌍욕을 하거나 대놓고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것 정도는 알았으니 말이었다. 다만 심드렁한 태도로, 집중하지 않은 상태로 무대를 볼 뿐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앤젤 무대는 나쁘지 않았는데. 저거도 심드렁한 걸까?"
김나리가 보기에 마지막 변사또의 무대는 충분히 훌륭했다. 리허설에서 아꼈던 에너지를 완전히 방출시켰다. 화려한 고음에 안정적인 음감, 수준급의 음색까지, 어느 한 부분이 아주 뛰어나다 볼 수는 없지만 빠지는 데 없는 육각형의 보컬이었다. 이 정도로 잘하는 가수는 베테랑 중에도 드물 터였다.
하지만 이스트 웨이브는 딱히 큰 감명을 받지 않은 듯, 얼굴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슬쩍 그가 자기 동료들과 했던 코멘트가 있었다.
"웹~ 동양인들 노래는 왜 저렇게 올드해?"
"일본도 그러던데. 10년 전 미국 거 그대로 듣던데. 동양 문화 특징인가? 나쁘진 않은데 뻔해."
대화는 그대로 동양의 암기 위주의 교육이 어쩌고, 복종을 강요하는 문화가 저쩌고 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김나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동양 문화가 어쩌고 하며 남의 문화를 품평하기엔 저 둘은 한국에 대해 너무 몰랐다. 그냥 자기의 문화적 편견, 인종적 편견을 팩트인 양 전시하는 꼴이었다.
그들에게 TYB에서 만드는 진보적인 음악을 들려주면서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TYB는 언제나 미국을 베낀 음악이 아닌, 자기만의 음악을 추구해왔고, 이제 슬슬 그 결실을 얻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이스트 웨이브의 말대로, 이번 '킹 오브 싱어'의 무대들은 좀 뻔한 편이었다. 할 수 없었다. 오디션 프로는 원래 대중 취향의 올드한 노래가 먹혔으니 말이었다.
'지네들도 미국 오디션에서는 올드한 노래, 스티비 원더 카피캣만 죽어라 부르면서. 뭔 소릴 하는 건지 참.'
한 방을 누가 팍! 먹여줬으면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틀에 박힌 인터뷰가 끝나고, 이윽고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
마지막 주자는 김나리 기억에 권노을이었다. 어사 차림에 탈을 쓰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빼박, 권노을이었다. 리허설만 봐도 티가 났다.
일단 그 성량은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다양한 방식의 끝 음 처리 방식, 완벽한 완급조절, 그리고 강렬한 보컬과 대조되는 부드러운 몸짓까지 누가 봐도 권노을이 맞았다.
권노을 무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이스트 웨이브 일행에게 매운맛을 보여줬으면 하고 바랐다.
리허설대로 차근차근 무대가 시작되었다. 전자 오르간의 은은한 소리로 곡의 포문을 열더니, 은은한 드럼 소리와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
돌아서겠소
그대가 원한다면
떠나주겠소
그것이 진심이라면
김나리가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록발라드인 원곡에 알앤비 감성을 더해 원곡이 아닌 권노을만의 감성을 더한 건 알고 있었다. 가성으로 청자의 마음을 살살 긁은 기억도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차원이 달랐다. 그 사이에 버스킹 공연 등 다양한 라이브 공연을 통해 단련된 권노을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미묘한 리듬감의 차이, 아주 약간 원곡에 변형을 주는 애드립만으로도 사람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김나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잡담을 멈추고, 자리를 고쳐 앉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건 좀 들을 만한데?'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소리 한번 크군. 사운드 세팅이 바뀐 건 아닐 텐데?"
절제해서 부른 1절임에도, 권노을의 성량은 벌써 팝스타를 놀라게 했다.
권노을의 노래는 2절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이전에 오디션 결승에서 불렀던 편곡처럼 화려하게 전조가 되지는 않았다. 대신 원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애드립이 들어갔다. 리허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2절부터는 화려한 고음으로 진성과 가성을 오가며 그야말로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기타와 드럼도 교묘하게 2절에는 독특한 코드를 적재적소에 심어놓아 권노을의 보컬을 보좌했다.
반복되는 후렴에서, 단 한 번도 권노을은 비슷하게 부르지 않았다. 처음 부를 때는 가성으로 불렀던 부분을, 그다음에는 진성으로 불렀다. 원래는 본 멜로디를 살렸던 부분을, 다음에는 리듬을 밀고 당겨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불렀다.
마지막에는, 원래도 높던 최고음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더욱 높여서 냈다. 원래는 산의 정상을 침착하게 걸어서 올라가는 느낌이라면, 이번에 권노을의 노래는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위에서 날아서 정상에 착지하는 듯한 곡예였다.
더욱 놀라운 건, 그런 고난이도 노래임에도 전혀 불안하거나 과하지 않다는 거였다. 이전에는 강한 감정이 들었다면 이번에는 과하지 않고 세련된 느낌이 드는 고음이었다. 절제의 미학이 느껴졌다.
이스트 웨이브는 처음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권노을의 노래를 리듬을 타면서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에 최고의 고음을 지를 때에는 '후~~~'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
돌아서겠소
돌아서겠소
후주와 함께 노래가 끝났다. 원래는 없던 부분이지만, 권노을 또한 애드립으로 음을 길게 끌면서 연주와 함께 곡을 마무리했다.
"예~~~~~아! 예~~~~~아!"
이스트 웨이브가 외마디 비명을 두 번 지르면서 일어났다. 두 번째 비명은 처음 비명보다 한 옥타브가 높아져 있었다. 손은 짝짝짝 박수를 하고 있었다.
기립박수였다.
현역 팝스타가 기립박수를 하자, 자연스럽게 옆에서 무대를 보고 있던 한국인 뮤지션 멘토들도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했다.
"야~ 대단한 무대였어요. 노래 너무 좋네요. 누구 노랜데 이리 좋죠?"
오창선이 '암행어사 출도야'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의 원곡을 너무 화려하게 잘 불러줘서 본인도 뿌듯한 모양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김나리가 살짝 웃었다. 음성변조를 했지만 말투, 억양, 그리고 제스쳐까지 모든 부분이 다 권노을이었다. 이런 게 코스튬을 입힌 가수를 보는 맛인가 싶었다.
이제 심사평 차례였다. 멘토들 모두 '놀랍다'는 평을 남겼다. 사실 진짜 관심은 모두 이스트 웨이브에게 쏠렸다. 여지까지 퉁명스럽게 무성의한 평만 남겼던 이스트 웨이브가 '암행어사 출도야’의 무대에서는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김나리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이스트 웨이브의 심사평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스트 웨이브는 흥분한 듯 고개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김나리가 뭐라 말하기 전에 이스트 웨이브가 먼저 말을 쏟아냈다.
"알지? (You know?)”
김나리가 자신을 가리키며 이스트 웨이브에게 물었다.
"네? 저한테 한 말이세요?"
“노노. 그냥 모놀로그."
"아예.""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그래. 내가 저 친구 콘서트에 가려고 한국에 전화를 하진 않을 거야. 뭔 말인지 알지?”
계속 축축 늘어져서는 느릿느릿 입에 바른말만 했던 이스트 웨이브가 흥분해서 랩 하듯 빠르게 말을 했다.
"네네."
"하지만 만약 내가 저 친구 콘서트를 가야 한다면! 뭐 여친이 쟤 팬이라던가. 일정이 우연히 맞는다거나. 그럼. 솔직히 별로 기분 안 나쁠 거 같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아 예..."
김나리는 이걸 대체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고민했다.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지만 저 사람 딴에는 '엄청나게 감동받았다. 오늘부터 팬 됨'이라는 뜻인 거 같았다.
"...너무 멋져서 앞으로 콘서트도 한번 가 보고 싶네요."
김나리가 통역으로 고군분투하던 말던 이스트 웨이브는 말을 쏟아냈다.
“나도 올드스쿨 알앤비 좋아해. 멜랑콜리도 좋아하지. 처지는 노래라고 하는데. 그게 진짜야. 진짜가 돼야 한다고 자식아. (dog)"
이제껏 이스트 웨이브는 굉장히 젠틀한 태도를 취했다. 그건 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다. 권노을 노래 후에는 흥분해서는 마구 은어와 비속어를 섞어가며 말했다.
김나리가 이스트 웨이브에게 말했다.
"자자 좀 진정하시고. 방송 녹화 중입니다."
이스트 웨이브가 되물었다.
“그래서?"
'아, 미국 방송은 이 정도 표현은 그냥 넘어가던가?'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진짜 굉장한 건 애드립이 매번 달라진다는 거야. 리허설 때도 저 친구 노래 들었는데. 나쁘지 않았어. 근데 본 경기는 완전히 달라. 아예 다르게 불렀어. 아마 저 친구, 다시 부르라 하면 또 다르게 부를 거야. 그게 예술이지. 그 즉흥성! 진실함! 잘하고 있어 친구! 진실하게 하라구!"
당연히 그날, 최고 점수는 권노을의 몫이었다.
게다가 이후에 이스트 웨이브는 마지막으로 폭탄 발언까지 날렸다.
"...다음에는 내가 곡 한번 주고 싶은데? 누군지 알려줄 수 없나?"
* * *
그날 밤, 녹화를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배영웅 매니저가 천채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나도 들으라고 스피커폰으로 연결했다.
"...이스트 웨이브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통화 목소리로 천채왕이 농담을 내게 건넸다.
-이야~~ 노을이 대단한데? 껄껄껄껄껄. 회사 나가면 안 된다 너? 아직 계약 기간 많이 남았어?
"하하."
"이거 방송 나간 다음에 사람들 표정 볼만 하겠는데?"
아마 천채왕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이스트 웨이브를 섭외하고, 한국어도 못하는 그를 '킹 오브 싱어'에 억지로 꽂아 넣은 소인중의 얼굴 표정이 아주 볼만 할 것 같았다. 그 부분이 기대가 컸다.
천채왕이 웃음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노을아. 니가 출연해줘야 할 스케줄이 또 하나 생겼다."
‘이렇게 갑자기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