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TYB에 소속된 김나리 인턴은 오늘 배영웅 실장의 부탁으로 특별한 업무를 받았다.
비밀리에 내한한 세계 최고 인기 래퍼, 이스트 웨이브의 통역을 좀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통역을 제가요? 저는 전문 통역사도 아닌데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음악판을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이스트 웨이브가 콕 집어 요청했다 하더라구요."
김나리 인턴은 회사의 의중을 알아챘다. 배영웅 실장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통역을 맡길 기세였다.
어차피 정해졌다면, 빠르게 받아들이는 게 좋다. 실제로 나쁘지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날은 회사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죠?"
"물론이에요. 저희가 요청드리는 건데요. 이번에 이스트 웨이브랑 관계를 잘 만들어서 다음 송캠프 때는 이스트 웨이브 사단이랑 협업을 해보려구요. 나리 씨도 엔터 업계에 계속 있고 싶다면 이스트 웨이브 만나 보는 게 도움이 될 거에요."
김나리 인턴도 바라는 바였다. 그녀 또한, 자기 기획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TYB에서 사실상 풀타임에 가까운 일을 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에게 큰 기회였다.
"좋아요."
* * *
그리고 지금, 김나리는 이스트 웨이브와 함께 '킹 오브 싱어' 촬영장에 나와 있었다.
김나리는 힐끗 이스트 웨이브를 봤다. 얼핏 보면 무슨 흑인 영어 강사처럼 보였다. 항상 명품으로 도배한 듯한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는 걸로 유명한 이스트 웨이브지만, 평소 옷차림은 이토록 소박할 수가 없었다. 무채색 회색 티에 짙은 네이비색 청바지, 컨버스 신발이 전부였다. 거기다가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도 가렸다.
"리허설, 보고 싶은데."
세계적인 월드 스타의 요청이었다. 거절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몰래 이스트 웨이브와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와 무대에 앉았다. 가수들의 리허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근데 리허설 보여달라는 사람이라기엔 이상한데?'
이스트 웨이브는 건들건들 건성으로 음악을 들었다. 마치 '이 정도일 줄 알았다'는 듯,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하긴, 김나리가 보기에, '킹 오브 싱어'의 무대는 예능 제목처럼 글로벌 수준이라 보긴 어려웠다. 세계 최고의 가수들과 매번 작업하는 이스트 웨이브의 마음에 찰 정도의 무대는 아닌 것 같았다. 의외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의 무대부터, 숨겨진 실력을 발휘한 걸그룹 메인 보컬의 무대까지, 모두 나쁘지는 않았지만 세계적인 수준에 비춰 보면 좀 아쉬웠다.
걸그룹 메인 보컬 무대가 끝난 후, 그는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했다.
"기계적으로 시키는 대로 부르네. 저건 뮤지션이 아니라 인형이야 퍼펫 퍼펫!(puppet)"
뮤지컬 배우가 멋진 성량을 보여준 무대를 본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딱딱해. 성악 하는 거야? 팝을 성악처럼 부르니까 괴상한데. 난 별로야."
이런 식이었다. 하도 가수들 무대를 까니, 김나리는 제발 '한 명이라도 저 녀석 콧대를 꺾어 줬으면'하는 심정이 되었다. 없던 애국심까지 생길 판이었다.
사실상 조는 듯, 설렁설렁 무대를 보던 이스트 웨이브에 관심을 끈 첫 리허설은 '변사또' 코스튬 가수의 리허설이었다.
"오~ 오오~ 오오~ 오오~"
그의 선곡은 시티팝 감성에 알앤비를 얹은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이 지나면'이었다. 시작부터 흑인 감성의 화려한 애드립이 작렬했다.
애드립을 듣자마자 이스트 웨이브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처음으로 딴짓을 멈추고 진지하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입을 다문 채로 집중해서 변사또의 노래를 찬찬히 들었다.
김나리도 막귀는 아니었다. 지금 노래하는 변사또가 자기가 담당하는 팀 '비원더'의 라이벌인 '잇츠쇼타임'의 메인 보컬 엔젤이라는 사실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도 한국인이었다. 지금껏 이스트 웨이브가 한국 가수들에게 보여준 무시와 조롱을 뒤집을 정도로 좋은 노래를 보여줬으면 했다.
'하지만… 아마 이 정도로는 어렵겠지?'
김나리의 생각은 적중했다. 무대가 끝나기도 전에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나쁘진 않지만 카피캣(모작)이야… 흉내 내기야."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은 오늘 처음 만난 통역관일 뿐이었다. 궁금증을 최대한 누르고 가만히 있었다.
다만, 마지막 무대 전까지 아무도 이스트 웨이브의 마음에 차는 무대가 없다는 건 아쉬웠다.
벌써 마지막 리허설이었다. 이번에는 MC 오창선까지 함께 무대에 올라왔다. 그도 무대를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시 하하 호호 잡담이 오가더니, 오창선은 좌석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노래를 시작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기타 전주와 함께 노래가 시작됐다. 김나리도 너무 잘 아는 노래, 오창선의 '돌아서겠소'였다.
저 노래로 자기 자신을 소개할 가수는 오창선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김나리가 회사에서 담당하는 그룹 '비원더'의 메인보컬 권노을뿐이었다.
권노을은 안정적인 저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실 좀 심심해 보일 정도로 담담하게 곡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다.
*
돌아서겠소
돌아서겠소
후렴은 확실히 좀 더 임팩트가 있었다. 특히 2절을 돌고 난 후에 다시 나온 후렴은 좀 더 자유로운 애드립이 들어가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끝 음 처리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 부분에서는 '돌아서겠소'라는 후렴구가 계속 반복되었다. 가사뿐 아니라 멜로디와 박자도 반복되는 부분이었는데 권노을, 아니 암행어사는 애드립으로 매번 조금씩 다르게 이 부분을 불러서 지루하지 않았다.
2절 후렴 부분부터는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까딱이며 들었다. 가사가 중요한 애절한 발라드곡인데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여튼 이스트 웨이브는 나름 곡에 빠져든 듯했다.
어느새 곡이 끝나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묘한 미소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쁘지 않은데? (That’s not bad!)”
나쁘지 않다… 뭔가 묘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사실상 나쁘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극찬일 수도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저 한마디만 남기고 성큼성큼 대기실로 돌아갔다. 김나리도 그 뒤를 따라갔다.
이스트 웨이브에게 '나쁘지 않다'는 어떤 말일까? 궁금해하며 김나리는 이스트 웨이브를 따라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권노을 대기실.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방송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에는 연예인인 나만 담겼다. 윤결 작가의 부탁으로 목 컨디션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이 대화하면서 분량을 뽑기로 했다.
모니터를 통해서 오창선 선배가 진행하는 모습이 나왔다.
-킹 오브 싱어! 그 첫 번째 대결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7명의 가수에게 멘토링을 해주고, 심사를 해줄 7명의 멘토분을 소개합니다!
7명의 멘토를 보여주었다. 모두 내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뮤지션들이었다. 그 중, 나의 멘토인 베이비 선배도 또렷이 보였다.
베이비 선배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인터뷰를 했다.
-각오 어떠신가요 베이비 선배!
-선배라니, 동갑이잖아요 창선 씨.
-에에에~이~ 그래도 훨씬 먼저 데뷔하셨으니까 선배죠.
베이비가 살짝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인만 어려 보이겠다는 겁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오창선 선배가 능청을 떨었다. 관중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창선 선배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베이비 선배에게 질문했다.
-멘토링은 어떠셨습니까?
-자기소개 곡은 가수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최대한 간섭을 피했다는 거지요. 두 번째 무대에서는 좀 더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서는 베이비 선배의 프로듀싱을 더 기대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좀 프로듀싱 잘한다고 소문도 났습니다!
-하하 자신감 좋아요 선배.
베이비 선배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부러 베이비 선배는 1라운드 무대는 완전히 나에게 맡겼다. 대신 2라운드 무대는 처음부터 주도해서 나와 함께 준비해 나갔다.
덕분에 2주 연속으로 대형 무대를 준비하는 빡빡한 일정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게 소화할 수 있었다. 선배의 배려 덕분이었다.
다른 멘토들의 평을 들으니 내가 얼마나 베이비 심사위원에게 배려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아예 가수에게 방관하거나, 본인이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들거나 중 하나였다. 전략을 가지고 둘이 함께 협업하는 팀은 나와 베이비 선배뿐이었다.
이 정도면 승산이 꽤나 있어 보였다.
'사실 그건 이미 리허설 때 알았지만.'
내가 견제해야 할 법한 사람은 변사또, 즉 엔젤 정도였다. 나머지는 현저히 무대 완성도가 떨어졌다.
엔젤은 상당히 괜찮았다. 완벽하게 제련된 테크닉의 보컬이었다. 모든 부분이 다 깔끔하게 계산되어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내 취향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제법 훌륭한 노래인 건 사실이었다.
나는 내 노래가 더 좋은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었다.
7명의 멘토에 대한 인터뷰가 끝났다. 오창선의 얼굴이 긴장으로 팍 굳어졌다. 뭔가 엄청난 일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오창선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히 특별 심사위원을 한 분 모셨습니다. 글로벌 음악계의 레전드. 세계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래퍼. 이스트 웨이브 씨를 소개합니다!
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관중들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중에게까지 아주 잘 알려진 가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프로듀싱이면 프로듀싱, 랩이면 랩, 다양한 분야에서 그야말로 빌보드를 정복하고 있었다. 가수들과 멘토들은 엄청나게 긴장한 게 눈에 보였다.
'근데, 대중들은 아직 이스트 웨이브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스트 웨이브는 뭐하러 한국에 온 거지?’
살짝 의문이 생겼지만, 일단은 생각은 접어두고 모니터 화면에 정신을 집중했다.
카메라는 어느새 이스트 웨이브를 향해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화려한 올 화이트 재킷에 반짝이는 레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건들건들 그는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옆에는 통역사가 서 있었다.
“어?"
낯익은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려 배영웅을 바라보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송사가 급하게 통역이 필요하다고 해서 김나리 담당자가 투입됐어요.”
"방송사인데 통역사가 없나요?"
"통역사는 많은데요. 이스트 웨이브처럼 완전한 뮤지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한국어로 옮기고, 한국을 이해시킬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김나리 담당자도 간신히 구한 걸 거에요."
"그렇군요..."
모니터에서는 김나리가 이스트 웨이브의 말을 그대로 통역하고 있었다.
-한국에 오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한국 음악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자주 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좀 거친 말투를 방송에 적합하게 부드럽게 바꾼 것 외에는 거의 정확한 내용이었다.
오창선이 이스트 웨이브에게 잇츠쇼타임과 최근에 했던 작업에 대해 물어보았다. 워낙 한국에서 화제가 된 일인 만큼 안 물어볼 수가 없었을 터였다. 이스트 웨이브는 자연스럽게 잇츠쇼타임과의 작업기와 곡의 제작 의도 등을 설명했다.
'이거 때문에 한국에 온 거였군.’
자기가 쓴 곡이 성공할 수 있도록 홍보 활동의 일부로 한국의 방송에 출연한 게 틀림없었다. 아마 이 방송 섭외도 소인중이 해놓은 게 틀림없었다.
잇츠쇼타임의 홍보에 도움이 되는 방송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살짝 속이 쓰렸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노래로 잇츠쇼타임보다 더 돋보이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더 돋보일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