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와아아아아~"
관객들의 함성이 들렸다. 그제야 조금씩 관객들이 보였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숫자였다. 5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관객석을 다 채우지 못했다, 못해도 1/3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슬쩍 옆을 보니 재호와 환희도 얼굴이 썩어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우리에게 노경진 PD가 말을 걸었다.
"자! 비원더 여러분. 뒤를 돌아봐 주세요!"
초등학교 때 배운 국민체조 동작으로 '뒤로 돌앗!'을 했다. 뒤에는 텅 빈 벽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벽이 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 천이 떨어지더니…
“우와아아아앙아아!!"
"비원더! 비원더!"
딱 봐도, 방금 전보다 배 이상 많아 보이는 관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경진 PD가 말했다.
"비원더 컴백에 뭔가 좀 재미있게 해주고 싶어서 깜짝쇼를 하나 준비했어요. 놀랐죠?"
환희가 노경진 PD 어깨를 툭 치며 반발했다.
"아~~ 이런 장난 좀 하지 마세.. 여!"
'녀석, 간신히 캐릭터 유지했네.'
사실 나도 정말 깜짝 놀랐다. '기습 콘서트'를 빠짐없이 봤지만 이런 기획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노경진 PD는 '기습 콘서트'의 담당 PD가 아니었다. 내가 바꾼 역사에서 노경진 PD가 슈퍼스타 T 마지막 회 담당 프로듀서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이렇게 우리 '기습 콘서트'를 특별히 노경진 PD가 맡게 되어서 역사가 바뀐 모양이었다.
슬쩍 봐도 관객들이 의자는 가득 채웠다. 자리 주변에도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몇 명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살짝 봐도 익숙한 팬클럽 멤버들이 무대 맨 앞에 서 있었다. 환희가 그들 한 명 한 명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와~ 열분덜. 숨소리 하나도 안 내고 말예여! 계속 숨어있던 거에여?"
관객들이 대답했다.
"네에~"
"우리 놀래키려고?”
"네에~"
“다들 나빠써여 증말!"
"꺄하하!!!"
관객들과 환희가 반 농담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사이, 재호가 눈가를 훔쳤다.
노경진 PD가 살짝 당황한 듯, 더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재호 씨?"
재호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쪼르르… 영화처럼 턱에 흘렀다.
솔직히 너무… 간지났다.
"아~~~"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팬들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내가 보기에도 뭐랄까…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었다.
노경진 PD가 재호에게 지금 심정을 물었다. 재호가 대답했다.
"너무… 고맙구요. 오늘 받은 이 감동. 영원히 잊지 않고 여러분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노경진 PD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좋네요. 이 밤공기. 숲. 강.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 팬들에게도, 비원더 멤버 분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됐으면 해요. 그렇죠 여러분?"
팬들이 뜨겁게 화답했다.
"네에~~~~"
“자! 그럼! 공연을 시작할 수 있을지 그 여부를 알아봐야겠죠. 관객 숫자를.... 공개해주세요!!!"
숫자가 카운딩 되었다.
첫 번째 자리는... 9였다.
"최종 관객 수가 5천 명이 넘어야만 콘서트가 가능합니다. 최종 관객 수는.......... 바로....!"
간판이 점멸하더니, 이윽고 밝은 빛을 내뿜었다. 숫자가 보였다.
숫자는…
"1만 6천 809명!"
환희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와!"
엄청난 기록이었다. 노경진 PD 또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되레 되물었다.
"역대 최고 기록이에요!"
환희가 넙죽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큰절을 했다. 그리고 외쳤다.
"정말 감사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아니라 여러분이 원더에요! 유! 아! 원더풀!!!"
재호가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폭소했다.
"저 바보! 뭔 말을 하는 거냐구! 저게 맞는 영어긴 하냐?"
이해가 됐다. 나도 절로 감사와 기쁨의 웃음이 나왔으니까.
이제는 그 기쁨을 관객들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자! 그럼 첫 무대를 공개합니다. 비원더의 새 타이틀곡… '걔 쩔어'!!!"
거의 절반 넘게 내 파트가 배분됐던 이전 곡과는 달리, ‘걔 쩔어'는 내 파트가 적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감성적이면서 리듬감이 강조된 노래의 성격상, 강렬한 고음이 특기인 내 목소리보다는 섬세한 재호의 목소리나 통통 튀는 환희의 목소리가 대부분의 파트에서 더 적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파트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또 아니었다. 파트의 숫자는 적기에, 오히려 더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파트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어차피 도입부부터 후렴의 킬링 포인트, 그리고 하이라이트 고음까지. 주요 파트는 모두 내 파트였다.
오히려 더 노력해야만, 짧은 시간 동안 메인 보컬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었다.
어느새 곡은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향해 갔다.
*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바보가 된 것 같아
할 필요 없는 생각을 하고
지을 필요가 없는 미소
마이너 풍 멜로디로 살살 고음을 쌓았다. 재호와 환희는 '우~우~'하고 마치 야유를 하듯 화음을 넣어줬다.
그리고 이제 모아둔 감정을 터트릴 차례였다.
*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이대로는 멈출 수 없는 건
왜냐면 걔는 정말 쩔어~!
첫 무대이니만큼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정말 내가 생각한 대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꺄아아아아아~~"
노래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오히려, 이전 타이틀곡보다 훨씬 더 큰 환호였다.
'이 흔들림… 어디서 느껴본 적 있던 거 같은데?'
잠시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다.
이 대지가 쿵쿵거리는 느낌. 그래, 이전에 '글로벌 비전' 미국 예선전 결승에서 느꼈던 바로 그 함성이었다.
그때, 한 번만 이런 무대에서, 이런 관객과, 이렇게 호흡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바람이, 생각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이런 일이 앞으로 좀 더 자주,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감동에 젖어있을 틈도 없었다. 회식도 하지 못하고 바로 무대가 끝나자마자 귀가해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킹 오브 싱어' 녹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녹화가 아홉 시지만, 훨씬 일찍 일어나서 세팅 및 의상 착용을 해야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배영웅과 함께 방송국에 가다 보니 화가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배영웅에게 살짝 투덜댔다. 가수 생활이 워낙 감사해서 그런가, 평소에는 불평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침잠이 부족하니 절로 짜증이 났다.
“이왕이면 오후부터 촬영하면 좋았을 텐데요. 아침에는 노래도 안 나오는데."
배영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노래 안 하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멘토분들 일정이 중요하니까. 그분들에게 맞췄나 봐요."
"멘토들이요?"
"아 모르셨군요. 킹 오브 싱어는 가수마다 1명씩 멘토를 붙여 준다고 하더라고요. 멘토와 싱어가 함께하는 팀 대결인 셈이죠. 방송 분량도 겸사겸사 늘리고요. 하하!"
"멘토라면 어떤 분들이죠?"
"박찬용 선생님 같은 분들이겠죠."
"아!"
음악계의 레전드 들이란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충 이해가 됐다. 그 정도 원로라면 오후에는 너무 바쁠 테니 말이다.
이전 생에서는 그런 기획은 없던 거 같은데, 뭔가 조금 역사가 바뀐 느낌이었다."뭐 그래도 요즘은 해가 길어져서 이렇게 일찍이라도 나름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나름 좋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해가 뜨면서 아침노을이 밝아왔다. 미리 배영웅 매니저가 준비한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은은한 에리카 바두의 음악이 귓가를 울렸다.
게다가 지금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성공이 예정된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것도 음악계 레전드와 함께.
'이 정도면 뭐 괜찮은 아침 같기도 하고.'
"근데, 멘토가 누굴까요?"
"그건 비밀이죠 당연히."
근데 뭔가 배영웅 매니저가 ‘푸훗'하고 살짝 웃었던 것 같았다.
뭔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 * *
의문은 순식간에 풀렸다. 세팅을 끝내고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내 멘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노을 군!"
베이비 선배였다.
"선배님이 멘토신가요?"
"제가 힘 좀 써봤죠. '걔 쩔어' 녹음하고 처음 보네요.”
“그러게요. 워낙 바쁘셔서…"
베이비가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말했다.
"바쁘기야 비원더가 바쁘죠. 작사야 어디서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한량처럼 삽니다.”
"아 그런가요?"
“방송 출현도 싫어서요. 이번에는 파일럿만 찍으면 되기도 하고. 노을 군하고 같이 하는 섭외가 와서 특별히 하기로 했습니다만."
"덕분에 편하게 임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노을 군 나왔다니까 나온 건데요. 근데 좀 이거, 괴상하지 않습니까? 코스튬을 입고 노래를 하다니요.”
"하하."
"이게 될까요?"
'제가 미래를 살아봐서 그런데, 됩니다 선배님'이라고 말할 뻔했다. 여튼 이 방송은 크게 성공할 운명이었다. 문제는 내가 이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였다.
"그럼,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베이비 선배가 방송 룰을 설명했다.
이번 '킹 오브 싱어' 파일럿은 2주에 걸쳐 진행했다. 첫 주는 소개 무대로 자기 대표곡을 불렀다. 두 번째 주는 멘토의 추천곡을 불렀다. 다만 코스튬으로 철저하게 모습은 숨긴 채로였다.
"아무도 정체는 모릅니다. 결과 발표 때까지는. 결과 발표는 역순으로 할 건데요. 한 명씩 마스크를 벗고 정체를 알릴 거라 하네요. 이게 재미있을까 모르겠지만..."
확실히 '킹 오브 싱어'는 당시 기준으로 좀 파격적인 시도였다. 얼굴 표정을 가리고 노래를 부른다는 개념 자체가 새로웠다. 거기다 아이들 장난 같은 화려한 코스튬까지 더해지니 정말 애들 장난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 이 프로가 전 세계에 포맷이 수출되는 최고 인기 프로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물론 인생 2회차인 나만 빼고 말이다.
"자!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지요. 코스튬을 확인해볼까요?"
"아 그렇군요… 코스튬을 쓰죠?"
살짝 허무했다. 1시간 넘게 했던 방송 준비가 다 의미가 없어졌으니 말이었다.
'그럼… 나는… 뭐하러 이리 화려한 메이크업을!'
베이비 심사위원이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그럼 뭐 하러 이런 메이크업을!'이라고 생각했죠?'
"헉 그걸 어떻게!"
"노을 군은 얼굴에 표정이 다 보입니다! 그게 매력이어요. 그래서 노래에도 노을 군의 감정이 전부 담기니까요. 여튼 애니웨이~."
베이비 심사위원은 침착하게 왜 코스튬을 입어도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방송사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상태서도 촬영을 조금씩 해서, 결과 발표 이후 편집해 올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니 말이 되었다.
"그렇네요..."
"물론, 그래도 코스튬이 가장 중요한 것도 사실이구요. 그럼 한번 코스튬 보러 가실까요?"
앞으로 2주간, 방송에서 내가 피부처럼 쓸 그 코스튬이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베이비 심사위원이 가리키는 쪽을 봤다.
그곳에는… 내 코스튬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뭐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