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15화 (115/280)

제115화

기습 콘서트.

2천년대 최고의 인기 프로였다. 규칙은 간단했다. 콘서트 당일, 기습적으로 무료 콘서트를 발표한다. 가수가 직접 발로 뛰며 홍보해 관객을 모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관객이 5천 명이 모여야만 공연이 가능했다.

5천 명이 넘는지, 숫자로 카운팅하는 장면이 이 프로의 하이라이트였다.

15년 전만 해도, 기습 콘서트에 나와 성공적으로 공연하는 것이 인기 가수의 척도였다. 바로 그 방송에 비원더가 섭외가 된 셈이었다.

15년 전 방송으로만 봤던 그 추억의 방송에 내가 출연하다니, 새삼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 * *

공연 6시간 전.

'진짜 과격한 오프닝이네.'

뱃멀미로 머리가 얼얼했다.

지금 나는, 비원더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보트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안대를 쓴 채였다.

환희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횽들… 안 힘들어여? 원래 기습 콘서트가 이리 힘든 프로여써여?"

재호도 덜덜 떨며 대답했다.

“말할… 기운이… 있으면… 쉬라구… 그게 더 힘들거덩?"

사실 나도 말은 안 했지, 죽을 맛이었다. 대체 어디기에 배까지 태우는 건가 싶었다.

마침 그 순간, 배가 멈췄다.

"자~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이번 프로그램의 담당 PD는, 노경진 PD였다. 당시로는 특이하게도 진행자가 없어서 PD가 실질적으로 진행까지 맡았다. 원래는 다른 예능을 하고 있었는데, 비원더가 출연한다고 하니 '비원더 전담 PD’라며 먼저 나섰다고 했다.

안대를 한 채로 조심조심 뭍으로 나왔다. 단단한 바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노경진 PD의 가이드로 조심조심 바깥으로 나왔다. 감촉으로 보면 잔디밭으로 보였다.

노경진 PD가 우리에게 질문했다.

"어디서 공연하는지, 잘 모르게 하려고 배를 태웠어요. 미안해요. 어딘지 짐작 가요?"

환희 목소리가 들렸다.

“보트를 한강에서 탔으니까 한강 근처 어딘거 가튼데여..."

"정답입니다. 자. 그럼 장소를 확인해볼까요? 안대를 풀어주세요!"

안대를 풀었다. 눈 부신 빛에 잠시 눈이 멀었다. 서서히 빛에 익숙해지자, 많이 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강 옆에 넓은 데크와 유람선을 본뜬 레스토랑, 그리고 큰 무대가 보였다.

잠원 한강 공원 내 수영장을 잠시 개조해서 만든 일일 무대였다.

노경진 PD가 우리에게 간단히 홍보법을 설명했다.

"자 오늘 배포할 안내지입니다. 확성기도 드릴게요. 이 무기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오늘 7시, 잠원 한강 공원 콘서트에 와달라고 알리면 됩니다. 간단하죠?"

다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확성기와 안내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꼭 비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잠원 한강 공원이면 장소는 최적이었다. 우연히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마 이렇게까지 관객을 모으기 좋은 곳도 흔치 않을 터였다. 뭔가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 * *

공연 4시간 전.

의외로 오후 3시에 강남은 썩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끔 사람을 봐도 다들 바쁘게 걷느라 우리를 잘 못 보고 지나쳤다.

궁여지책으로 한강 주변을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지만 썩 반응이 좋지 않았다.

한창 확성기를 켜고 시민들에게 말을 걸던 환희가 지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관심이 없네요 횽들."

내가 대답했다.

"하긴, 오후 3시에 강남을 돌아다니는 시민들이 콘서트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어?"

“으… 노경진 PD님! 우릴 쏘켜꾼여!"

새삼 감탄하면서 환희를 쳐다봤다. 나는 환희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저 녀석, 교포가 아니었다. 국내파였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몰입해서 태연하게 한국말을 잘 못 하는 척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재호가 씁쓸하게 환희에게 대답했다.

"어쩐지 너무 쉽다 했는데. 이런 난관이 있었네."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직접 트럭에서 뛰쳐나가서 맨투맨으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뿌려봤지만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혹시 우리들이 인기가 없는 것 아닐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조금씩 들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럴 리 없었다. 국민 오디션 슈퍼스타 T의 상위 멤버 3인이 함께 만든 팀이었다. 게다가 첫 데뷔곡도 음악방송 2위를 할 정도로 쾌조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대형 기획사인 TYB의 지원까지 있었다. 인지도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였다. 지금 있는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인기 가수의 무료 콘서트가 먹힐 만한 곳으로 가야 했다.

내가 직접 노경진 PD에게 말을 걸었다.

"PD님. 지금 갔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 * *

공연 2시간 전.

학교가 많은 대치동, 삼성동을 거쳐 학생들이 하교 후 즐겨 가는 코엑스 몰까지 쭈우욱 트럭을 몰고 지나왔다.

“와~~~ 원재호 잘생겼다!"

"노래 불러주쎄요!"

"공연해요??? 대박!"

학생이 하교하기 시작하니 확실히 반응이 불붙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TV에서 본 비원더가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에 훨씬 격하게 반응했다.

자꾸 우리를 쫓아와서 재호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주고, 기습 콘서트에 꼭 오라고 말해줘서 귀가시켜야 할 정도였다.

눈에 띄게 힘이 나는 목소리로 환희가 말했다.

"반응이 좀 있네요 횽들!"

내가 맞장구를 쳐줬다.

"이제 슬슬 불붙고 있지?"

“마자여. 이대로만 가면 좋겠네여."

재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5천 명은 무리일 거 같긴 한데…”

“힘 빼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말 할 기운 있으면 전단지나 하나 더 돌려."

"그래."

이번에는 큰 대로로 갔다. 대로변에서는 갑자기 트럭에서 내려서 맨투맨으로 홍보하기는 어려웠다.

"으음…”

옆을 슬쩍 봤다. 환희가 확성기로 고래고래 홍보를 하고 있었다.

“안뇽하세요! 비원더입니다. 오늘 7시에 콘서트 해여. 마니 와 주세여! 5천 명 넘어야 공연해여!”

뭔가 임팩트가 부족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확성기를 잡았다.

노래 하기 위해서였다.

<너와 나

마치 케익처럼

달콤해

멈출 수가 없는걸>

"...!!!!”

길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씨익, 속으로 웃음을 짓고는 노래를 계속했다.

<나의 맘

마치 와인처럼

깊어져

헤어나오지 못해>

관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

"나 저 노래 들어봤어."

"저거 누구야?"

역시 가수는 노래로 승부해야 했다.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역 앞 백화점 앞에서 홍보했다.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번에는 둘로 나눠서 해보자. 제일 인지도가 높은 재호, 니가 백화점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홍보해.. 나랑 환희가 바깥을 맡을 테니까."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재호가 배영웅 매니저 및 방송 스태프들과 함께 백화점 내부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도 확성기를 틀고 홍보를 준비했다.

나를 잠자코 지켜보던 노경진 PD가 슬쩍 말했다.

"진짜 대단하네요."

"어떤 것이?"

"아니, 무슨 방송을 몇십 개 본 사람 같이 잘 아네요. 내가 사실 힌트로 주려던 걸 다 스스로 챙겨 먹어서. 내가 해줄 말이 없었어요. 오늘 아무것도 안 해도 됐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네요.”

사실은 이전 생에 '기습 콘서트' 주요 에피소드는 모두 챙겨봐서 어떻게 관객을 모아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노경진 PD에게 해줄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관객을 모을 때였다. 나는 확성기를 틀고 말을 시작했다.

"자자~ 백화점 안에 가면 외모 신동 재호가 있습니다."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재호를 보러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꺄아~"

"하지만 저희를 더 가까이서 보시려면! 오늘 7시! 잠원 한강 공원에 오세요!"

갖은 수를 써서라도, 재호를 팔아서라도 꼭 5천 명을 채우고 싶었다.

비원더는 버스킹 공연은 제법 했지만, 단독 공연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이번 기습 콘서트가 성사된다면 이번이 첫 콘서트였다.

가수가 되지 못했던 이전 생에서 나는 코러스였다. 그것도 오창선이라는 대가수의 코러스로 성공적인 가수 생활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의 방송도 부러웠고, 그의 돈도 부러웠지만 가장 부러운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는 단독 콘서트였다.

이번 기회에, 꼭 첫 콘서트를 해보고 싶었다.

* * *

공연 5분 전.

공연 1시간 전부터는 최대한 목소리를 아끼고 컨디션 관리를 했다. 공연 홍보가 아니라 공연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공연을 할 차례였다.

다시 오늘 아침처럼 안대를 하고 무대 뒤에 섰다.

환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조용하네요 횽."

"그러게."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기습 콘서트'는 일부러 가수를 놀래키기 위해서 관객들에게 함성이나 박수, 잡담과 같은 소리 내는 일을 금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조용할까 싶었다. 불안했다.

'설마 관객석이 텅 비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노경진 PD의 에스코트로 비원더 3인이 무대에 섰다.

노경진 PD가 말을 걸었다.

"자! 재호 님. 유난히 표정이 좋지 않은데요. 어떻습니까. '기습 콘서트' 성공할 것 같으신가요?"

재호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관객분들이 많이 계셨으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런 게 너무 안 들리네요. 만약 관객분들이 많이 못 오셔도. 아쉽구 그러기는 하겠지만.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구 싶어요."

재호는 이미 실패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음 인터뷰는 환희 차례였다.

"환희 군은 기분이 어때요?"

환희가 담담히 대답했다.

"연습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에여."

"연습생 시절이요. 그때는 어떠셨나요?"

"기약이 없어써여. 아무도 저를 봐주지 않는 거 가타구여."

“외로우셨겠네요."

"이제는 팬분들이 계시고, 멤버들이 이써서 괜찮아여. 다만 조용한 무대 앞에 서니, 오랜만에 다시 그런 느낌이 드네.... 요."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환희가 살짝 울컥해서 본모습인 '주하늘'로 살짝 돌아올 뻔했단 걸. 환희에게도 감명 깊은 경험인 모양이었다.

"노을 군!”

"네."

"특히 노을 군과 저는 각별하죠. ‘슈퍼스타 T’ 때도 함께 촬영 많이 했으니까요.

"네..."

"그때부터 지켜봐 왔지만, 지금처럼 떨려 하는 노을 군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결승전도 그래도 자신만만한 편이었던 거 같은데. 어때요?"

"PD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떨리는 건 처음이네요."

"어떠세요. 콘서트 가능할 것 같아요?"

잠깐 침묵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최대한 솔직하게 내 느낌을 말했다.

"항상 콘서트를 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관객분들을 모시고요. 설사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단 한 분이라도 와주셨으면… 그걸로도 기쁠 겁니다. 그분들 모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관객분들. 그동안 너무 잘 참아 주셨습니다. 소리를 하나도 내지 않으셨어요."

노경진 PD가 살살 떡밥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비원더 멤버 분들은 안대를 풀고! 관객을! 확인해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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