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천채왕은 내게 프로그램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이게 말이야. 나도 제안을 받았지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온몸을 가면과 분장으로 둘둘 말아서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노래를 부른다는 게 재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설명이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 내가 너무 잘 아는 프로그램이었다.
'킹 오브 싱어'.
계급장을 떼고, 누구나 노래 하나로 승부한다는 컨셉의 오디션이었다. 온몸을 코스튬에 가까운 가장을 해서 외모만으로는 얼굴은 물론 나이, 성별조차 알 수 없었다. 인터뷰 또한 음성 변조된 목소리로 진행했다.
천채왕은 계속해서 내게 '킹 오브 싱어'를 설명했다. 내게 온 제안은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일단 시험 삼아 한 번 해보고, 성과가 좋으면 정식 방송으로 런칭할 예정이라 했다.
"뭐 잘되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거긴 한데 말이야. 어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부러 슬쩍 천채왕을 떠봤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천채왕이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금방 자신감을 회복해서는 내게 말했다.
"노을이 너는 솔로 가수로도 대성할 애야. 아니, 대성해야 하는 애지. TYB는 너의 솔로 생활을 막을 생각은 없어.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지. 네 솔로곡을 지상파 주말 프라임 타임에 볼 수 있는 기회니까."
"걱정되시는 문제가 있나요?"
천채왕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문제가 있지. 많지. 이런 컨셉이 될까? 다른 사람으로 가장해서 노래를 부른다니. 노래는 표정부터 몸짓까지. 모든 요소를 동원해서 표현하는 건데 목소리만 가지고 승부한다는 게 가능할까?"
그러면서 천채왕은 소개서 속 코스튬을 걱정스러운 손짓으로 바라봤다. 과연 코스튬들이 좀 장난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초대박일 운명이었다.
'킹 오브 싱어' 줄여서 KOS는 2천년대 중반 30%를 넘는 기록적인 시청률로 한국을 뒤흔들 프로그램이었다. 너무 잘 돼서 아시아 전역, 심지어 미국에까지 프로그램 포맷이 수출될 정도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가창력 있는 가수들이 발굴되어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했다.
하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하겠습니다."
"그래?"
"네, 제가 뭐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요.”
"그래. 아직 신인이니까 그렇게 겸손하게 가는 게 좋지. 우리가 좀 기획사가 크잖아. 그래서 허세를 빨리 배우기가 쉬워. 노을이 넌 안 그래서 좋다."
그러면서 천채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코스튬들, 좀 재미있어 보이지 않나요?"
"이게?"
천채왕이 코스튬 예시 중 가장 허접해 보이는 허수아비 코스튬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그건 좀 구려 보였다.
'파일럿이 대박 난 다음에는 방송국 지원을 좀 받아서 코스튬 퀄이 나아졌던 거 같은데.'
내가 생각하는 '킹 오브 싱어' 코스튬보다 파일럿 코스튬은 훨씬 구려 보였다.
제발 코스튬만 너무 구리지 않은 게 걸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앨범 녹음이 완료된 이후 앨범 작업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총 녹음은 부드럽게 1달 내에 다 끝났다. 재호가 한 땀 한 땀 코러스를 녹음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키미 등 TYB가 섭외해온 특급 뮤지션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끝냈다.
뮤직비디오도 이번에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미 이전 '남녀본색' 촬영 때 찍었던 화면을 편집만 하면 됐다. 아폴로 빈이 그사이 몇 달 동안 완성도를 높여 뮤직비디오를 준비해 두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의 활동 시기가 다가왔다.
활동 전 마지막 회의는 축하 파티를 겸해서 우리 집에서 진행했다. 멤버는 언제나처럼 단출했다. 비원다 3인에 천채왕 대표, 배영웅 실장, 그리고 김나리 인턴까지 6명이 전부였다.
재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동생은 없어?"
"해외 공연 갔더라고."
재호가 깜짝 놀랐다.
"벌써?"
"걔가 좀 잘났잖아."
“야 너 돈 좀 들겠다."
비원더 활동으로 다행히 가수 생활은 궤도에 올랐지만, 아직 본격적인 정산은 받지 못했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아서 걱정은 없긴 한데. 뭐 더 받으면 좋긴 하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천채왕이 웃으며 말했다.
"자! 이번 활동 1등 꼭 하자! 빨리 정산해주게. 회사도 비원더도 부자 되게. 그리고 노을이 너!"
천채왕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
"너는, 노래를 잘하기도 하지만. 돈이 되는 목소리야. 같이 부자 되자."
"크크크큭."
듣고만 있던 김나리 인턴이 빵 터졌다. 그러고 보면 말은커녕 감정 표현도 거의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기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네에."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긴 하니까. 자, 그런 의미에서 회의 시작해 볼까. 배영웅 실장님 어때요?"
"네 선생님 시작하겠습니다."
배영웅 매니저가 자료를 읽었다.
"이번 활동은 '기습 콘서트'로 시작하려 합니다."
천채왕이 거들었다.
"섭외하느라 나름 고생했어."
'기습 콘서트'도 잘 알고 있었다. 가수들이 당일 콘서트를 잡는다. 그리고 콘서트장 주위를 돌며 콘서트를 홍보했다, 마지막에는 눈을 가린 채 콘서트장에 들어와, 무대 앞에서 안대를 풀고 모인 관객들의 숫자를 확인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재호가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 되면 좋은데… 못 채우면 망신이겠네요."
천채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렇게 나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비원더는 오디션으로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던 팀이야. 게다가 데뷔 싱글부터 음악방송 2위까지 했고!"
재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1위는 아니었구요..."
"첫 싱글곡부터 1위 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이번 앨범은 꼭 1위 하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배영웅 매니저도 거들었다.
"이번에는 1위도 무리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재호가 풀이 죽어서 말했다.
"미래는 모르는 거구… 여튼 알겠습니다."
뭔가 부정적인 기운이 팀 전체에 퍼졌다. 평소에 재호는 그렇지 않았다. 항상 깔끔하게 자기 마음을 다스렸다.
'기약 없는 음악 작업에 몸과 마음이 지친 모양이야.'
어떻게 부드럽게 분위기를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참에 천채왕이 재호에게 말을 걸었다.
"재호야."
재호가 살짝 긴장해서 답했다. 재호는 윗사람을 만나면 경직되는 타입이었다.
"네."
"실패하면 더 좋은 거야."
"네?"
“What?”
천채왕의 저 말에는 나와 환희는 물론 배영웅, 김나리까지 당황해서 빤히 천채왕을 쳐다봤다.
"TYB는 이제까지 10년 정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어. 그 비결이 뭔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나도 몰랐다. 나는 회귀자로써, 미래에 천채왕이 2020년까지 승승장구한다는 '결과'만 알 뿐이었다. 그 비결은 알 턱이 없었다.
"실패를 계산적으로 많이 했기 때문이야."
"실패를 계산적으로요? 왜요?"
재호 마음이 딱 내 마음이었다.
"잘 봐. 실패를 안 하기는 쉬워. 남들이 하는 거. 대중이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 하면 돼. 아무래도 실패를 덜 하지.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대중에게 따라잡히게 돼. 그다음부터는? 수가 읽히지. 그러면 기획사는 끝장이야."
사실 그게 음악판에 전형적인 사이클이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음악 기획자가 등장해서 처음에는 진보적인 음악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중적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과거 지향적인 음악이 되어 노년층 대상으로 음악을 하다 서서히 사라졌다.
내가 슬쩍 말을 얹었다.
"그러고 보니 TYB의 음악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네요."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동의를 표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바로 그거야. 우리는 항상 어느 정도 실패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대중들을 리드할 수 있거든. 실패가 없다면, 충분히 도박수를 던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야. 뻔해진다는 거지. 그럼 우리 같은 딴따라들은 끝이야."
뭔가 그럴듯했다. 그러고 보면 TYB의 음악은 언제나 미친 짓을 하는 것 같은 음악이 많았다. 록과 힙합을 섞은 음악을 90년대에 아이돌에게 부르게 하질 않나. 아크로바틱 댄스를 활용한 무대를 하질 않나. 유치한 가상의 스토리를 입힌 아이돌을 만들지 않나, 그야말로 매번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TYB는 언제나 뻔하지 않았다. 읽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TYB의 신인 가수나, 새로운 곡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상할 수 없는 걸 보겠구나'하는 기대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장기적으로는 성공이라는 건가요?"
"우리 말고 다른 기획사는 아무도 그렇게 못하니까. 우리가 언제나 한 발짝 앞서 나가는 거지. 그런데 이거는, 웬만한 각오로는 못해. 실패하는 거 싫잖아. 나도 싫어. 그걸 견뎌야 하거든. 정신력이 못 버티지. 그래서 작고 안정적인 성공을 추구하다 가는 거지. 다 멘탈이야 멘탈."
그렇게 말하고는 천채왕은 재호의 손을 툭 치며 위로했다.
"네넵..."
재호 얼굴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하지만 일단 재호는 입을 다물었다.
이후 회의는 제법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킹 오브 싱어'에 출현하기로 했다. 환희 또한 교포 컨셉을 무기로 외국인 프로, 영어 방송에 개인 활동이 잡혔다.
재호는 최고 인기 멤버답게 토크쇼부터 게임쇼까지 다양한 인기 프로에서 불렀다. 심지어 2006년 현재 가장 잘 나가는 리얼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에도 깜짝 게스트 제의가 왔다. 일단 재호는 모두 하겠다고 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구체적인 스케줄을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실제로는 배영웅이 알아서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만, 우리도 대충은 앞으로의 스케줄을 숙지해야 했다.
스케줄 공유까지 끝낸 후, 배영웅이 우리에게 물었다.
"...해서, 내일 하루 휴식하시고. 모레부터 ‘기습 콘서트’를 하시면 돼요. 질문 있으신가요?"
비원더 3인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를 확인한 천채왕이 회의 종료를 선언하려 했다.
"그럼 회의는 이쯤 하고. 이제부터 파티를 시작해볼까?"
그때였다. 재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선생님!"
"어 재호야."
"저희 이번 곡 '개 쩔어'. 너무 리스크를 안 진 거 아닌가요?"
천채왕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재호의 질문을 다시 되물었다.
"너무… 리스크를… 안 졌다?"
"확실히. 이번 노래 '쩔어' 같은 가사를 썼다는 점이 좀 놀랍긴 한데요. 말씀처럼 아주 도박적인 곡은 아닌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리 곡은 히트를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곡이었지만, 실패 확률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되려 그게 더 안 좋은 게 아니냐고 재호는 반문하고 있었다.
“음… 그렇긴 한데.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잖아? 굳이 더 할 필요가 있을까?"
환희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쌤. 그래도 좋은 거 가타여. 뭔가 하나만 더 독특한 거 업쓸가여?"
천채왕은 물론 회의 참석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어울리는 건 없었다.
사실 그럴 만했다. '개 쩔어'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곡이었다. 곧 팝에서 유행할 음악 양식에 한국 가요 감성을 섞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음악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이돌 감성의 유치하지만 중독적인 가사를 더했다. 뭔가 더 추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뭔가 하나만 더 추가해서 완성되면 더 멋질 것 같긴 하단 말이지.'
환희가 입을 열었다.
“어렵네여… 뭐 더 할 게 업써여. 게다가 저는 연습생 출신이라 안무 연습도 했지만. 저 두 횽들은 춤도 못 추자나여."
천채왕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게다가 내일모레부터 활동 시작이야. 그때까지, 춤 초보도 소화할 수 있는 안무를 만들 수 있는 안무가가 있을 리 없잖아."
천채왕의 말을 들은 순간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가 하루면 배울 수 있는 안무를 바로 지금 당장 만들어 줄 수 있는 실력 있는 안무가가 딱 한 명 있었다. 그것도 바로 내 곁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