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오랜만에 양재역 근처에 있는 천채왕의 녹음실에 도착했다. 타이틀곡 '개 쩔어' 녹음을 위해서였다.
벌써 4월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주택가가 한층 고즈넉해 보였다. 어디선가 살짝 새소리도 들렸다.
'가끔 이럴 때는 음악보다 자연음이 더 좋을 때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내 가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타이틀곡이자, 정식 앨범의 타이틀곡을 녹음하는 날이었으니 말이었다.
눈을 감고 오늘 내가 부를 파트를 다시 되짚어 보았다. 가사를 외운 건 기본이었다. 미리 준비한 애드립 라인을 점검했다. 각 가사마다 어떤 감정으로 노래를 부를지도 다시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전체를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노을 군!"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베이비 심사위원, 아니, 베이비 선배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편안한 청바지에 베이지색 니트 차림이었다.
“선배님. 어떤 일이세요?"
“녹음 보고 싶어서 구경 왔어요. 이거 가사 제가 썼거든요."
"아… 베이비 선배 가사였군요."
“선생님과 환희 군이랑 상의해서 많이 수정하긴 했지만요. 작사가가 꼭 녹음에 참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꼭 보고 싶어서, 힘 좀 썼습니다."
"그러셨군요… 영광입니다."
진심이었다. 문루아처럼 현역은 아니지만, 베이비 또한 전설적인 가수였다. 트로트 가수가 아닌 팝 가수로써, 아시아를 뒤흔든 최초의 가수라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지금은 결혼 후, 가수 활동은 중지한 채로 작사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주로 진지한 발라드나, 글리치 등의 실험적인 전자음악, 록 음악 등의 가사를 활발하게 쓰는 작가주의 작사가였다.
그런 그녀가 '개 쩔어' 같은 가사를 쓰다니, 뜻밖이었다.
"원래 좀 정적이고 사색적인 가사를 많이 쓰는데요. 비원더는 제가 처음부터 지켜 봐온 가수기도 해서 좀 노력 해봤어요. 다행히 제 곡이 선택됐더라고요.
TYB는 철저하게 무기명으로 가사를 받아 회의를 통해 가사를 결정했다. 설사 그게 과거의 톱스타인 베이비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가사가 선택되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선배님까지 보신다고 하니 더 긴장되네요."
베이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작사가는 녹음에 관여 거의 하지 않아요. 그냥 방관자일 뿐입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충분히 긴장할 거리도 많으니까요. 말씀… 들으셨죠?"
"천채왕 선생님이 녹음 디렉 확인하신다는 그 이야기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천채왕이 직접 녹음실에서 확인하는 곡은 TYB에서도 많지 않다고 베이비 선배가 말했다. 극 초기에는 모든 작업물 녹음을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업무가 많았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다양한 TYB 가수가 활동 중이었다. 대신 그는 최종 녹음물 수정 및 검수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녹음실에 방문하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프로젝트란 거죠."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주 가끔 천채왕이 직접 디렉을 봤던 곡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곡은 대부분 크게 성공했다. 댄스 음악을 거의 안 듣는 나조차도 알 정도였다.
“그렇군요."
“그거 아세요? 해어지화 라고 신인 걸그룹이 하나 TYB에서 나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해어지화는 2020년, 내가 한 번 죽을 때까지 활동한 최정상 걸그룹이었으니 말이었다.
"그 그룹, 지금 데뷔 준비 중이에요. 녹음 몇 달째인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9달째입니다. 선생님이 요구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않아서 하염없이 데뷔가 늦어지고 있어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확고하세요. 중요한 그룹이니만큼 준비가 된 다음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십니다."
"대단하네요."
사실 알고 있었다. 저 그룹은 11개월을 채우고, 2달 뒤에야 데뷔한다. 그렇게 오랜 기간 벼려서 나온 데뷔곡 '돌아가는 길'은 엄청난 난이도의 노래와 안무로 '돌길'이라 불리며, 걸그룹 전설의 무대로 길이길이 칭송받았다.
“물론, 춤까지 함께 춰야 하고, 8명이 넘는 대규모 그룹이라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그 정도 무게라는 거지요."
"저도 9개월 노래 하나요?"
"설마요! 노을 군은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9개월은 아니라도 1달 정도는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전 미팅 때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
너무 멋을 부린다. 감정이 어색하다. 가사 맛이 안 살아난다 등등… 온갖 지적을 받느라 미팅 시작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노래 지적을 이렇게 많이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숨소리 하나까지 철저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이렇게 초 단위로 누군가 내 노래를 분석해서 비판한 적은 처음이었으니 말이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부를 자신이 있었다.
* * *
녹음실에 들어가자 이미 엔지니어들이 앉아 있었다. 키미도 함께였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깔끔하게 회색 슈트를 차려입은 천채왕이 앉아 있었다.
"왔어?"
천채왕이 싱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뭔가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이게 녹음실의 긴장인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아아. 목 아껴. 녹음하는 날이니까."
"알겠습니다."
천채왕이 조곤조곤 오늘 녹음의 목적과 계획을 이야기했다. 우선은 그사이 재호와 환희가 동원해서 다듬은 '개 쩔어'를 다시 들어볼 참이었다. 이후에는 천채왕과 키미가 지켜보는 앞에서 내 녹음을 하면 되었다.
녹음실에 들어가 헤드셋을 썼다. 이미 와봤던 곳이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그만큼 한 기획사의 수장이 직접 확인한다는 상황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천채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수정된 곡 들어볼게.
조금 더 드럼이 화려해졌다. 가볍게 어깨춤을 출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적당히 신나는 드럼 비트가 중심을 잡으면서도 감성적인 피아노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2천년대 감성 미디움 템포 알앤비였다.
"쩌~어어러. 쩌어어러~"
풋, 하고 웃을 뻔했다. '쩔어'라는 가사가 싫다는 재호가, 곡 곳곳에 교묘하게 화음을 심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쩔어'라는 부분이 강조되도록, 일부러 잘 쓰지 않는 화성의 화음을 넣어 두었다.
이렇게 하면 음악을 잘 모르는 대중도, 왠지 모르게 '쩔어'라는 킬링파트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터였다.
거기다가 환희가 뿌려놓은 조미료도 기가 막혔다. 절묘하게 리듬악기처럼 추임새를 넣어 두었다.
"오!"
"저~엉말!"
"쩔!"
이런 식으로 온갖 독특한 발음의 의성어를 리듬에 맞춰 넣어서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비원더 두 멤버의 목소리가 비트에 들어가니 뭔가 훨씬 고급스러우면서도 비원더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채왕이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좋습니다."
-그래, 이제 녹음만 자알 하면 된다. 긴장하지 말고 일단 한 번 불러 볼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비트가 다시 처음부터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키보드 사운드와 가슴을 울리는 드럼 소리가 함께 들렸다.
‘너무 노래를 잘 부르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게 키미 작곡가가 내게 알려 준 팁이었다. 사실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이란 게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던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여지껏 나는 그래 왔었다고도 했다. 지금껏 그런 지적을 받은 적은 없었으니 말이었다.
'그럼 여지까지의 나와, 타이틀곡을 녹음하는 나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
딱 하나였다. ‘노래 욕심'이었다. 이 노래는 잘 돼야 한다는 욕심, 꼭 떠야 한다는 욕심, 그게 오히려 노래에 대한 집중을 막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었다. 그저 여지껏 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됐다. 가사에 나만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그 이야기에 집중해서 노래를 전달하면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네 생각을 해 (쩔어)
대체 너는 어떻게 이리 예쁜 건데 (쩔어)]
나는 이 가사를 무대에 선 내 감정으로 해석했다.
이전 생에서 나는 내게 집중해주는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다. 코러스로, 남을 서포트하는 경험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이제는 전국민이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망한 신인 가수가 되어 있었다.
무대에서 내 노래에 모두가 집중하는 그 기분… 그도 정말 ‘쩔었다'.
팬들과 노래 하나만으로 호흡하는 그 기분… 정말 '쩔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정말 '쩐다'고 밖에는 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 노래를 들어준다는 그 기쁨을 그대로 노래에 담아 보았다.
[넌 정말 쩔어! 쩔어~. 쩔어, 쩔어어! 개 쩔어우우우우~ 쩔어!]
처음 들었을 때는 웃음만 나오던 후렴이 이제는 입에 촥촥 감겼다. 이 정도 표현은 되어야 지금의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내가 요리하기에 되레 좋은 소재였다.
음식 재료로 비교하자면 충분히 맵고 독해서 내가 자극적으로 요리하기 좋은 맛있는 소스 느낌이었다.
[쩔어!]
노래가 끝났다. 정적이 흐르더니 천채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나올래?
* * *
나오라니, 뭔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너무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한번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녹음을 하라는 뜻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불안함을 가지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키미와 천채왕, 베이비가 모두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나?’
그러다 천채왕이 입을 열었다.
"쩌는데?"
풋!
나는 물론 베이비, 키미까지 모두 피식 웃었다.
일단 화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천채왕이 연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원했던 걸 그대로 했어. 그래 그거야 노을아. 이전에는 너 무슨 묘기 하는 서커스 광대 같았어. 자기 노래 잘한다고 자랑하면서 재주넘는 그런 거 있잖아."
“네에..."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런 식으로 노래하면 곡이 원래 갖고 있던 미묘한 서사가 죽어버려. 다들 열심히 만든 곡인데 그러면 안 되겠지. 지금은 근데 네 기술도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고. 무엇보다 자랑하는 거 같지가 않다. 너무 좋네."
다행이었다. 베이비는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키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잘 녹음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음… 근데 잠깐?'
"저… 그러면 이걸로 녹음이 끝난 건가요?"
"아 그건 아니야. 이제부터 더블링도 좀 하고. 네가 해야 할 애드립도 좀 해야지."
“그럼 녹음실에서는 왜 나오라고 하신 건가요?"
"니가 한번 직접 들어보라고. 정말… 쩔었어."
"풋!”
베이비 선배가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녹음한 내 목소리를 듣는 일은 항상 어색했다. 가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주 겪었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천채왕이 내게 말했다.
"어때?"
"제 목소리 같지가 않아서 실감이 안 나네요."
"자기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 법이니까. 오히려 남이 더 잘 알지.”
"그렇군요.”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 이 감정, 이 상태 그대로 딱 3번만 더 부르자. 그리고 추가 녹음이나 애드립 부분도 말해줄게."
"넵!"
* * *
이후 녹음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그래 봐야 다 합쳐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녹음실에 나오자 키미가 따뜻한 차를 건넸다. 늘 마시던 홍차가 아닌, 카페인이 없는 허브티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차를 마시자 천채왕이 슬쩍 다가와 앉았다. 그는 독특한 심층해양수 브랜드의 생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내게 슬쩍 말했다.
"녹음 잘했어.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끝내주게 만들어줄게."
"네… 믿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이번 활동에. 노을이 너 단독 활동 제의가 하나 왔는데."
"단독 활동이요?"
"그래."
의외였다. 비원더는 음악방송 2위를 할 정도로 화제를 모으는 인기 신인 그룹이었지만, 그 인기 대부분은 외모가 압도적인 재호에게로 몰려 있었다. 굳이 나를 단독으로 초대한다는 게 신기했다.
'무슨 방송이길래 나를 단독으로 섭외했을까?'
천채왕이 입을 열었다.
"히트작은 아니고. 파일럿 프로그램이야. 제목이 특이해… ‘킹 오브 싱어' 라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