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천채왕은 TYB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모든 곡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악기 소리 하나, 의성어 하나까지 철저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녹음 디렉션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30년간 숱한 가수들 디렉을 봐온 그였다. 얼마나 깐깐하게 디렉을 볼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 '쩔어' 녹음은 철저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이틀 후 녹음실.
내 솔로곡인 '배고파 죽겠어' 녹음하는 날이었다. 녹음 디렉션은 일본 투어 중인 문루아 대신 재호와 환희가 봐주기로 했다. 키미 또한 조언을 위해 방문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천천히 목을 풀었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수록곡이었고, 자유도도 높은 솔로곡이라 긴장이 풀렸다.
마이크를 통해 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됐어여 횽?
"그래."
-우선 한번 쭉 1절 불러볼게여.
환희의 말과 함께 경쾌한 기타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가 연주한 기타였다. 그 리듬에 맞춰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오늘도 난 네게 고파
하루 이틀 계속 고파
너랑 같이 밥 먹고파]
1절만 부르자 했는데 2절 끝까지 쭉 불러 버렸다. 아무도 끊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끝까지 불렀다.
"다 끝났는데?"
-...더블링 한 번만 할게여."
같은 노래를 몇 번 불렀다. 층층이 화음을 쌓았다. 그렇게 두어 번 필요한 부분만 부르고 나니 이번 재호 목소리가 들었다.
-됐어. 나와.
스튜디오를 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땠어? 다시 녹음할까?"
환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돼써여 횽. 이거면 될 거 가타여."
"벌써?"
"충분해여. 그냥 이대로 보내도 충분할 거 가튼데여.”
"그러면 다행이지만..."
재호도 갖고 있던 하모니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감정도 좋고. 완급조절도 제대로 되어 있었어. 굳이 재녹음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이미 완곡을 생각해서 녹음했던데?"
아무래도, 워낙 혼자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무사 패스인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그럼 좀 쉴게. 니들 곡 녹음 시작해."
소파에 앉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타이틀곡 녹음도 쉬웠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어제도 천채왕과 한 번 만났었다. 이번에는 타이틀곡 녹음 직전 점검 미팅이었다. 그때는 전혀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지적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대로 녹음이 가능할까 우려스러울 정도였다.
왜일까 궁금했다. 굳이 말하자면 가벼운 어쿠스틱 기반 노래인 솔로곡 '배고파 죽겠어' 보다는, 감성적인 알앤비 노래인 '쩔어'가 훨씬 내가 평소에 자주 불렀던 장르였다. 하지만 '배고파 죽겠어' 녹음은 프리패스였는데, '쩔어' 녹음은 난관이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 사이 재호와 환희는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스태프들과 함께 세팅을 바꾸는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녹음 세팅을 변경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홍차를 마시던 키미가 내게 슬쩍 말을 걸었다.
"고민이 있어 보이네요?
"네…"
"타이틀곡 녹음 때문이죠?"
"맞습니다. 역시 꿰뚫어 보시네요."
"노을 군은 읽기 쉬운 편이죠. 저도 미팅에 참여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키미가 피식 웃었다.
"그,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키미는 분명 미팅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긴 했지만 말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그럴까요? 하지만 이전에 녹음 준비 미팅에서 너무 지적을 많이 받아서요. 뭔가 더 연습을 해야 할 거 같은데."
키미가 손가락으로 나를 정확히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라고요?"
연습하는 게 문제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 * *
하와이의 이스트 웨이브 자택.
세계적인 보컬 트레이너 리즈가 분수 위에 앉았다.
세계적인 래퍼이자 프로듀서 '이스트 웨이브'의 집다웠다. 집 안에 야구장은 물론 소규모 영화관까지 있었다. 그중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집 안의 분수 공원이었다.
"요오~ 엘리자베스 왓업?"
누군가 리즈를 불렀다.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한 흑인이 걸어 들어왔다. 유명 래퍼라기에는 좀 이상할 정도로 단출한 퓨마 트레이닝복에 컨버스화 차림이었다. 걸음걸이만으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 누가 봐도 래퍼 이스트 웨이브였다. 손에는 팝콘 봉투를 든 채였다.
리즈가 반갑게 이스트 웨이브에게 인사했다.
"웨에입~ 잘 지냈어요? 팝콘은 뭐에요?"
"아~ 나 팝콘 좋아해. 그래서 집 곳곳에 팝콘 기계를 가져다 놨어."
리즈가 사방을 살피니, 진짜 언제든 팝콘을 먹을 수 있도록 업소용 팝콘 기계가 사방에 달려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봉투에 남은 팝콘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래퍼가 어쩌다 나를 다 부른 거예요?"
“나, 다음 앨범은 노래하고 싶어서."
이스트 웨이브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노래요?"
“그래."
지금은 2006년이었다. 래퍼가 노래하는 것은 금기시되던 시기였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그 금기를 부수려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세계 최고의 보컬 트레이너, 리즈를 고용한 셈이었다.
둘이 분수 앞 벤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이 최근에 했던 작업물 이야기가 나왔다.
"나 발라드곡 하고 싶어."
“바알라드를 하겠다고요? 작업해본 적은 있어요?"
"딱 한 곡 써본 적 있지. 가이드만 하고 남이 불렀지만."
"누가요?"
"동양 그룹이었어. 잇스쇼맨 머 그런 이름이던가? 뭐 그런 이름이던데. 이름은 별루야."
정확한 이름은 잇츠쇼타임이었다. 여튼 리즈는 호기심이 동했다. 본인도 최근에 인상적인 동양인 가수를 봤기 때문이었다.
“오? 동양 가수라니 특이하네요?"
"돈을 베리베리 많이 주더라. 그럼 가는 거지. 금융치료 받으러."
"최고의 치료죠. 노래는 어땠어요?"
"그냥 그랬어. 뭐 테크닉은 흑인을 흉내 내는데. 소울이 없달까? 내 마음이 움직이진 않더라고. 별루야. 그런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아."
“아무래도 흑인이 아닌데 흑인음악을 하면 그런 경우가 많죠."
"그래. 리즈처럼 흘륭한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는 거의 없지. 그 녀석들. 내가 좀 유명하다고 자꾸 굽신대고 말이야. 음악 하면 그냥 다 동료고 적인데. 별루야."
이스트 웨이브가 한층 크게 소리 내며 팝콘을 먹었다. 썩 기분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이스트 웨이브가 하는 말을 듣고. 리즈는 자연스럽게 자기가 만났던 한 동양인 가수를 떠올렸다.
"동양인 중에도 훌륭한 알앤비 가수가 한 명 있었어요. 브으라운 아이드 소울이라고 해야 할까?"
“호! 그래? 그거 좀 익사이팅 한데. 이야기 해봐."
이스트 웨이브는 아예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는 듯, 얼음을 채운 바구니에서 맥주병을 하나 꺼냈다. 하와이답게 빅웨이브였다.
"노오엘 이란 이름의 친구였어요. 저한테 배우겠다고 LA에 왔죠.”
"그래. 레슨은 몇 번 했는데?"
"딱 한 번이요."
"한 번? 그걸로 뭐가 돼?”
“별로 가르칠 게 없었어요. 막혀있는 부분 몇 개만 조금 뚫어줬죠. 나머지는 스스로 할 거예요.”
“그런가? 재밌네. 잠시만."
"왜요?"
이스트 웨이브가 잠시 옆의 팝콘 기계에 가서 봉투에 팝콘을 가득 채워왔다.
"더 들어보고 싶어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쩝쩝 소리를 무시하고 리즈가 말을 계속 이었다.
"여하튼 그래서. 노오엘 군이 부른 노래가.. 놀라지 마요."
"최선을 다하지."
이스트 웨이브가 눈을 과장되게 크게 뜨고 입을 팝콘 먹던 손으로 막았다.
"’Just Come'이었어요."
정말 이스트 웨이브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그렇게 옛날 소울을? 동양인이?"
“네. 게다가 노래도… 정말 뛰어났어요. 대형 보컬이라는 느낌. 리듬감도 뛰어났고. 애드립도 화려하면서 음정이 정확했어요. 곡 해석도 절묘했고요. 무엇보다 성량은… 오페라 가수 뺨치는 수준이었어요."
"기술이 좋았다 이건가?"
"기술도 좋았죠. 뭐 워낙 어려운 노래니까요. 음 레인지도 넓고. 애드립 구간도 많고. 엔간한 노오래 실력으로는 도전도 불가능하죠."
"맞지. 탤런트 쇼에서 보컬 보스만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지."
이스트 코스트가 팝콘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말 놀라운 건 테크닉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어려운 노래를, 그렇게 절륜한 테크닉으로 부르는데도 과시하는 게 없던 거에요."
“과시가 없다...."
"화려한 초고음, 현란한 애드립, 복잡한 박자를 밀고 당기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더라고요. 마치 말하듯이. 그래서 고난이도 노래인데도 서커스 같지 않고, 감정이 느껴졌어요. 그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렇지. 나쁘지 않네. (That’s Not Bad) 나도 그런 노래를 하고 싶어."
리즈가 곤란하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Just Come' 같은 고오난이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요? 그건 좀 어려운데?"
"그건 아니고 쏘울이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거지. 자연스러운."
"그런 건 제가 해줄 수 있어요."
"고마워... 팝콘 먹을래?"
이스트 웨이브가 사뭇 진지하게 팝콘을 건넸다.
"됐어요. ‘별루에요'."
"빼에에에엠~ 내가 한 방 먹었네."
“웨에입~. 당신 너무 간식 많이 먹어요. 그만 먹어요. 이제 노래 연습해야죠."
피식 웃으며 이스트 웨이브가 팝콘 봉지를 구겼다. 그리고 휙 던져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이스트 웨이브는 생각했다. 그 노오엘이라는 보컬리스트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말이었다.
그리고 왠지, 이번 소원은 곧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노오엘이 정말 리즈가 말한 수준의 보컬리스트라면, 가까운 시기에 세계 무대에서 반드시 만날 터였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되었다.
* * *
'뭐야, 그런 거였어?'
키미의 말을 듣고 나니,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너무 연습해서 문제라는 건 다시 말해서, 너무 잘하려고 해서 방해가 된다는 뜻이었다.
나도 몰랐지만, 내 노래의 장점은 '자연스러움'이라고 키미는 말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요. 노을 씨 정도는 드물지만. 하지만 기술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은 드물죠. 그게 노을 씨에요. 근데 이번에는 너무 잘하려고 많은 기술을 부려서 그런 자연스러움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지적을 많이 받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천채왕의 지적은 대부분 '빼라'는 거였다. 더 잘하라거나, 더 크게 부르라거나, 더 노력하라는 지시는 아예 없었다.
버리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여튼 없던 걸 하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원래 하던 대로 부르면 된다는 뜻이었다.
뭔가 녹음 아이디어가 번뜩! 하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감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타이틀곡 녹음 날이 밝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