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그날은 하루종일, 노자경의 연락만 기다렸다.
사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녹음 준비를 위해 노래 연습도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내가 담당한 솔로곡은 편곡자와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음악을 고쳤다. 곧 방송 출현 시기가 들어오기에 운동 강도도 강해졌다.
하지만 바쁜 일정 와중에도 나는 은근히 노자경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일정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저녁 7시였다. 당분간은 저녁 일정도 잡지 않고 녹음에만 전념하기로 했기에 일정은 빠르게 끝났다.
저녁을 먹으려 준비를 하려던 차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놀! 저에요 저.
노자경이었다. 놀라서 문을 열었다.
"집에까지 오셨어요? 제 부탁은 잘 되셨나요?"
"말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그냥 왔어요. 밥 먹는 거예요?"
내가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본 모양이었다.
"네."
"잘됐네. 나도 밥 안 먹었는데. 같이 먹죠?"
"맛 없으실 텐데요."
"뭐 먹는데 그래요?"
“닭가슴살이랑 샐러드요."
"에이, 난 또 뭐라고. 나도 가수 생활 한 놈이에요. 익숙해요. 같은 걸로 줘요."
'나는 아무리 먹어도 안 익숙해지던데.'
가수 생활에 유일하게 싫은 점이 식단 관리였다. 노자경은 그런 고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손님이 왔으니, 오리고기로 메뉴를 바꾸어 샐러드와 함께 내왔다. 노자경이 촵촵 소리를 내며 먹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래서, 제가 드렸던 부탁은?"
노자경이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내게 말했다.
"그래. 노을 씨 요청대로 그 여자 만나 봤어요. 다행히 안면이 있었어서 만나 주더군요. 동갑이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노자경에게 소인중의 애인이란 여자를 만나 달라 요청했다. 그렇게 만나서 그녀에게 소인중의 실체를 밝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그 여성을 위한 길이었다.
물론, 노자경에게 곧 소인중이 주환희에게 거짓 누명을 씌울 것이 걱정된다고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내가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말해야 했으니까.
노자경은 다행히 순순히 내 말대로 해주었다. 명분도 좋았다. 노자경은 소인중의 실체를 깨닫고, 그의 기획사를 나왔다. 그러니 그가 소인중이 가지고 노는 여자에게, 소인중의 실체를 알려준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적어도 타 기획사 가수인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소인중의 애인(이라고 믿고 있는 존재)은 처음에는 노자경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노자경은 철저하게 애인들의 이름, 홈페이지, 심지어 사진까지 온갖 증거를 준비해 갔다. 결국 그녀는 노자경에게 설득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이제는 어쩌시겠데요?"
노자경이 뭐 그런 걸 묻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두 눈은 지그시 감은 채였다.
“뭐라 그러겠어요? 쌍놈이라 그러지."
"풉!"
"바로 이 나라 떠나겠다고 하네요. 구룡도에 유학 가겠다고. 잘했죠. 소인중은 전 세계 인맥이 넓지만 특히 한국과 일본 연예계 인맥은 촘촘하니까."
“그렇군요."
그녀는 이 나라를 떠났다. 그렇다는 건 환희 스캔들 걱정도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소인중 같은 녀석과 헤어지는 건 그녀에게도 좋은 결정일 터였다.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리고, 노곤함이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잠이 확 깨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 바로 노자경에게 질문했다.
"근데… 이렇게 이야기가 잘 끝났으면, 왜 굳이 저희 집에 찾아오셨나요? 그냥 전화로 하셔도 될 말 같은데요."
노자경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며 내게 말했다.
“역시! 놀! 센스가 있어. 그게 내가 다음에 하려던 말이에요. 그녀가 그냥 그러고 만 게 아니에요."
"그러고 만 게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신가요?"
“대애박을 하나 줬어요."
그가 내게 USB 포트를 하나 내밀었다. 4기가 바이트나 되었을까? 아담한 용량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한 용량이었다.
“USB요?"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지.”
"뭔가요?"
"틀어 봐요."
노자경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워낙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홀린 듯이 USB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소리 파일이었다.
“음성 파일인가요?"
"일단 들어 봐요.”
재생 버튼을 재생했다. 약간 치지직 거리는 잡음이 섞였지만, 분명히 노랫소리가 들렸다.
느닷없이 외국인의 나레이션이 들렸다. MP3로 영어 실력을 늘린 덕에 대충 가사가 들렸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이이이이스트 웨이브~ 서쪽에서 왔지.
동방의 별 잇츠쇼타임을 위해서.
어이 너희들. 너무 겸손 떨지 말라고.
니들도 최고니까 말이야.
나 정도는 아니지만.
토키오에서 써울 써울에서 방콕까지.
박살 내보실까? 레에에에에츠고우!]
손발이 오그라들 느낌이지만, 나름 2006년 랩음악 트렌드를 충실하게 따른 나레이션이었다.
하지만 그거보다 중요한 건, 이 나레이션을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건..."
"그래요. 잇츠쇼타임 다음 타이틀곡이라네요. 소인중이 의기양양 해하면서 들려줬다네요."
“이스트웨이브… 곡이군요."
이스트웨이브. 몇 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슈퍼 프로듀서 겸 래퍼였다. 이전 생에서는 무려 2020년까지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독보적인 팝스타였다.
한창 잘 나가는 신성인 이스트 웨이브, 그가 직접 잇츠쇼타임에게 곡을 준 것은 물론, 나레이션으로 샷 아웃(응원)까지 해준 것이었다.
노자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나는 힙합 좋아하는데. 내가 있을 때는 이런 곡 안 하고 말이야. 소인중 그 인간은 생전 도움이 안 돼."
"아쉬우신가요?"
"뭐가 아쉬워요? 죽지 못해 살았는데. 그냥 하는 소리지. 그건 그렇고. 놀 씨는 걱정되지 않아요?"
“걱정이요? 왜요?"
“잇츠쇼타임이면 라이벌 그룹인데. 세계 최고 작곡가의 곡을 받고. 응원 메시지까지 받았잖아요. 좀 짜증 나지 않을까?"
나는 아무 말 않고 웃기만 했다.
왠지, 이 곡,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 * *
한 달에 한 번, 비원더는 개인 면담을 가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이 오늘이었다.
소행 그룹이 운영하는 SH 호텔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9층 레스토랑이었다. 조식 뷔페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아직 아침 8시임에도 사람들이 상당히 붐볐다.
배영웅의 리드로 방으로 들어가니 천채왕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
배영웅은 언제나처럼 스르륵 사라지고, 나와 천채왕, 단둘만 남았다.
소인중이 몇 번씩 비원더의 수를 읽고 방해하는 일이 반복되자, 천채왕은 강수를 뒀다. 비원더의 대부분의 회의와 면담을 회사 바깥에서 진행했다. 몇 배로 귀찮았지만, 여튼 보안은 훨씬 철저해졌다.
"안녕하세요!"
"별일 없지? 어이쿠! 그새 살 많이 빠졌네. 훨씬 잘생겨 졌는데? 한 4킬로 뺐나?"
"5킬로입니다."
"목표 체중까지 거의 다 왔네? 자알 하고 있어."
천채왕과 나는 언제나처럼 면담을 했다. 사실 회사에는 만족하고 있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건강 상태 이야기를 나누고, 좀 더 쉽고 안전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다.
"좀 죄송하네요."
"뭐가?"
자기 식사를 간단하게 끝내고, 커피를 마시던 천채왕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게 물었다.
"이런 면담, 회사에서 하시면 몇 배는 편할 텐데. 저희 때문에 굳이 회사 외부에서 매번 이렇게 하셔서요."
"아 그거?"
천채왕은 물컵을 들더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치 씹는 것처럼 천천히 물을 음미했다. 건강 덕후인 천채왕이라 그런지, 왠지 저렇게 물을 마시면 더 건강할 거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을 다 마신 그가 내게 말했다.
"내가 비원더를 왜 제작하는 거 같아?”
"저희를요?"
"그래. 사실 우리가 처음부터 기획한 팀도 아니잖아. 우리 특기인 댄스 아이돌도 아니야. 근데 왜 비원더를 만들었을까?"
잠시 고민해봤다. 하지만 회귀자인 나조차 이것만은 딱히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뭘까요?"
"새롭기 때문이야. 우리가 한 번도 안 해본 장르거든. 보컬 그룹인데 싱어송라이터라니. 게다가 나는 이런 걸 늘 해보고 싶었어. 앞으로 가요계는 직접 가사 쓰고 곡 쓰는 아티스트 형 가수들이 인기를 얻을 거야."
"그건 어떻게?"
"그냥 감이야."
"그렇군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감탄했다. 사실 그의 예감이 맞았다. 2010년대 초반은 아티스트 형 가수들의 전성시대였다. 잘하면 편곡자와 작곡가, 작사가를 모두 보유한 비원더도 그 흐름에 탈 수 있을 터였다.
"여튼 그래서 새롭게 도전 해보려는 거지. 그러면서 TYB도 좀 리프레시하고.”
"이렇게 훌륭한 회사가 그런 게 필요할까요?”
천채왕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을 이었다.
“조직은 좌우지간, 시간이 지나면 경직되게 되어 있어. 본질은 잊혀지고, 형식만 남더라고.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안 하는 게 나태한 게 아냐. 그런 사람은 애초에 1등 같은 건 못해.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하던 대로 하는 건 나태한 거야. 한 번씩 꼭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해."
보면 볼수록 천채왕의 기업 운영방식에 감탄이 나왔다. 괜히 30년간 가요계의 제왕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납득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새로운 것'이 비원더일 뿐이야. 철저하게 내 사업을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어. 고마워할 필요 없단 뜻이야."
"알겠습니다."
말은 그래도, 천채왕이 나를, 그리고 비원더를 아낀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어제 얻은 정보를 꼭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사실 그전에도 면담 때 이야기하려고는 했지만.'
"선생님. 이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천채왕에게 노트북을 건넸다.
“그 사이 곡 작업이라도 한 거야?"
천채왕은 싱글싱글 웃으며 곡을 들었다. 그러다 곡을 듣더니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이거… 어디서?"
"잇츠쇼타임 탈퇴한 노자경 씨와 방송에서 만나면서 친분이 생겼거든요. 팀 나간 다음에 그분이 들려줬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부분적으로 말했다. 설득력이 있었는지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말했다.
"이스트 웨이브라니. 대단하네. 하지만 뭐 별로 걱정할 건 없겠어."
나도 씨이익 미소를 지었다. 나와 완전히 같은 생각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작곡가라고 해도, 결국 한국 활동곡이었다. 이 곡은 너무 한국 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곡이었다. 영어 나레이션을 누가 이해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스트 웨이브는 미국에서야 유명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무명에 가까웠다.
천채왕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너무 참여진의 명성에만 신경 썼어. 초보자의 흔한 실수야. 결국 청자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해야 하는 거지. 유명한 사람을 데려온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야."
"동의합니다. 저는 되려 아쉬울 정도입니다."
천채왕의 눈썹이 호기심에 슬쩍 올라갔다.
"아쉬워? 왜?"
"잇츠쇼타임과 비원더의 라이벌 경쟁이, 저희에게 관심을 좀 가져다줬다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경쟁자가 좀 더 성공적인 활동을 하면 저희에게도 자극이 될 텐데. 이 정도 곡이라니 좀 아쉽네요.”
"크하하하하하하!"
천채왕이 빵 터졌다. 그야말로 박수를 짝짝 치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왜 그러시죠?”
천채왕이 너무 웃어서 살짝 눈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아니 너무 맞는 말이라서. 맞아 노을아. 라이벌이 중요해. 경쟁자가 있어야 더 잘 크는 거야. 너는 진짜 그런 걸 어떻게 아냐? 한 40대는 돼 보인다니까?"
뜨끔했다.
"여튼, 그래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공유했습니다."
"아냐 아냐. 잘했어. 이제는 걱정 안 되지?"
"넵."
"이제부터는 걱정 말고! 타이틀곡 녹음 준비 시작해. 이번에는 좀 빡쎌 거야. 내가 직접 녹음 디렉팅에 들어갈 테니까."
"직접… 들어가신다고요?"
"내가 디렉 보면 타이틀곡 녹음 반년 걸린 적도 있어 각오해.”
'한 곡 녹음에 반년.. .이 걸렸다 고라고라고라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