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
방금 말은 취소다.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mp3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갑자기 웬 낙태 논란??’
mp3를 통해 다양한 스탯을 얻었지만, 가면 갈수록 그중 가장 활용도가 높은 건 역시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었다. 미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느샌가 능력이 진화했는지, 슬쩍 아주 위험한 일은 미리 알람으로 경고를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지껏 이번처럼 황당한 내용은 없었다.
제목: 주환희, 임신한 전 애인에게 낙태 권유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가수에게 치명타였다. 공개도 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 * *
자작곡을 고쳐야 하는 재호, 환희와 달리 나는 곡의 마무리 작업을 모두 키미 프로듀서에게 맡겼다. 녹음 준비를 하는 일 외에는 나는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쏟아서 환희의 스캔들에 대해 알아보는 데 썼다.
우선, 이게 정말 사실인지 알아봤다. 우선 기사를 보니 뭔가 수상했다. 환희에 대해서 폭로해서, 환희가 활동 중단 선언을 한다고 미래의 기사에는 나와 있었다. 그 이후에는 저 전 여친이란 사람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환희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 여자친구는 가짜였다. 환희는 저런 짓을 할 녀석은 아니었다.
물론 환희를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환희의 본체인 숨겨놓은 실제 인격 '주하늘'은 그런 짓을 할 배짱도 없었다.
‘뭐 솔직히 외국 여자였으면 저 기사… 조금은 믿었을지도?'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있었다. 주하늘은 외국 여자만 만났다. 이유는 몰랐지만, 이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주하늘은 한국 여성과 사귀는 걸 철저하게 피했다.
'그런 녀석이 한국인 전 여친이 있을 리는 없지.’
그렇다면 이건, 뭔가 함정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함정이라면, 그 함정을 팔 놈은 딱 하나뿐이었다.
우리를 빼 오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다, 이제는 우리를 박살 내려 하는 제작자, 소인중, 그 녀석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그 이후에 언론에도 나오지 않고, 그 어떤 인터넷에서도 정보가 나오지 않아서 수사는 난항이었다. 그렇다고 범죄자도 아니니 어디에도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난감했다.
‘...정보가 좀 더 필요해. 없을까? 없나? ...아!’
그러다 불현듯 떠올렸다. 그 여자에 대한 정보를 더 얻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딱 하나 더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인 소인중에 대한 정보를 더 얻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소인중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면서, 최근에 나와 친해진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TYB 본사 1층 레스토랑에서 노자경을 다시 만났다.
"노을 씨 웬일로 날 또 불렀어요? 안 바빠?"
"아아 괜찮아요. 덕분에 회의도 잘 끝났고."
노자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요?"
"네네."
사실이었다. 노자경이 춤을 춰준 덕분에 내 곡은 리듬감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디테일을 세심하게 다듬은 덕분에, 내 곡이 굉장히 좋은 순서에 배치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 노자경 표정이 한층 더 의기양양해졌다.
“아이고! 좋네! 도움이 됐다니 말이야. 앞으로도 언제든지 불러줘요! 노을 씨는 내 은인이니까!"
“또 그런 곡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꼭 부르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아! 저기요! 여기 자몽주스 하나 주세요. 설탕 없이."
보면 볼수록 노자경은 참 기가 셌다. 기가 팍 죽어서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렇게 기가 센 사람이 어쩌다 보컬 그룹에 들어가서 짐짝 취급받으니 힘들긴 했겠네.'
기가 세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도와줬다. 앞으로도 도움을 약속했다. 다만 조금 말투가 셀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나는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자경은 신나서 오창선의 무대 준비에 대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연 기획안을 기한 내에 완료하려면 2일밖에 읍섰어요."
“그게 돼요? 공연 연출을 2일 만에 다 끝낸다는 게?"
"그게 나도 안 된다 생각했는데. 또 하니까 막 되더라고! 커피 마시면서 가만~히 고민 중인데. 갑자기 막 그림이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큰 그림 단숨에 잡고. 나머지 1일 반은 디테일 잡았죠."
역시나, 내가 아는 미래의 노자경다웠다. 노자경은 천재 연출가답게 다양한 아이디어로 촘촘하게 무대 구성을 짰다. 이야기만 들어도 얼마나 노자경이 자신이 담당하는 레전드 발라드 가수 오창선의 무대를 화려하게 꾸며주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럼 다시 다음 달부터는 소규모 공연 위주로 가시는 거예요?"
"전국 투어 지지난 주에 끝났고. 그래서 지금 좀 한가한 거예요. 다음 달부터는 소극장 공연 시리즈 시작하니까. 좀 바빠지겠지."
노자경은 신나서 자신의 공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소인중에 대한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잇츠쇼타임 공연을 봤을 때는. 그게 엄청 대단한 줄 알았어! 막 폭죽 때리고. 돈으로 때려 박으니까. 소극장 공연 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 관객과의 호흡. 관객을 설득할 스토리 라인. 이런 게 더 중요했던 건데. 하~참."
마침 노자경이 소인중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저… 소인중 씨에 대해 궁금한 게 있는데요."
"노을 씨가요? 뭔데? 알려줘 봐요. 내가 아는 거는 다 이야기해줄게."
이런 순간에서 어떻게 노자경에게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을지 수백 번 시뮬레이션 해봤다. 해답은 하나였다.
"고희진 씨 혹시 아시나요? 소인중 씨와 뭔가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요."
고희진이라는 이름은, 환희를 저격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노자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슬쩍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노자경이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이름… 어떻게 알았어 노을 씨?"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노자경은 내 손목을 붙잡고는, 자기 차로 데려갔다. 아담한 회색빛 마티즈였다. 차 안의 조수석에 들어가자 노자경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말할 수 없습니다."
노자경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거를 추천해. 소용읍서. 서로 피곤해져요.
"참고하겠습니다.”
"고희진은… 소인중 대표의 여자들 중 하나야. 거기까지만 말할게요."
"여자? 애인인가요?"
"설마! 뭐 그 비슷한 거긴 하죠."
소인중이 '데리고 노는' 수많은 여자 중 하나라는 뜻이라고 했다.
사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 소인중은 기부가 취미인 성실한 사업가였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해외 대형 음반사의 지부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체는 마약과 유흥에 찌들은 인간이었다. 노자경 같은 외부인은 어렴풋이 이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이미 미래에서 소인중의 진면목을 보고 왔기에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대로 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나는 대화를 이어갔다. 소인중의 사생활에 대해서였다.
예상대로 소인중은 난잡한 녀석이었다. 소위 유흥 중독자였음은 물론, 세계 곳곳 도시마다 실패한 여성 연예인들의 약점을 쥐고 갖고 노는 게 취미라고 했다.
“그런 여자가 몇 명 정도 되죠?"
노자경이 나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셀 수 읍서! 엔간한 나라 수도마다 한 명씩은 있다 보면 돼요. 굳이 말하자면 한 백 명? 부러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백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도 싫은데요."
그 정도 숫자면 이름도 다 못 외울 것 같았다.
아마, 소인중도 딱히 백 명의 여자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게 수많은 여자를 만나면서 한 명 한 명과의 관계는 점점 가치가 사라지는 그 과정에 중독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았을까 싶었다.
'다행이지, 그 덕분에 반격할 각이 나왔으니까.'
이제 노자경에게 더 구체적인 질문만 하면 되었다.
"저. 그 애인들이란 사람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정황이라던가."
노자경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궁금해요? 그런 식의 삶?"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하지만. 일단 저도 예술 하는 사람이니까. 저런 특이한 방식의 연애도 좀 들어두면 노래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노자경이 갑자기 탁자를 손으로 탁! 소리 나게 쳤다.
"좋습니다!"
"에?"
"바~로 그거에요. 창작을 위해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 역시 나 노을 씨 너무 맘에 들었어. 내가 다 이야기해줄게요!"
"아 네..."
노자경은 이후 쉴 새 없이 소인중의 여성 편력에 대해 말했다. 나는 모든 내용을 꼼꼼히 메모했다.
'이거라면 반격이 가능해.’
일단 무기는 준비 완료했다. 소인중의 저격은 실패할 터였다. 하지만 그거로는 뭔가 부족했다.
이전에도 그랬다. 노자경을 구할 때도 무리해서 숙소를 나와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물론 나는 아이돌은 아니었다. 신인 가수임에도 매니저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풀어주는 편이었다. 숙소와 사옥만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아이돌들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소인중과 일이 엮기면, 너무 큰 리스크를 짊어져야 했다.
매번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매니저도 아니고. TYB 같은 대형기획사의 PR 담당자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내 일도 아닌 일을 붙잡고 늘어지는 셈이었다.
슬슬 이제는 이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고 본업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자면 문제의 본질인 소인중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했다.
'그 녀석과 화해? 그건 불가능해.'
애초에 나는 그와의 계약을 거절했을 뿐이었다. 나의 정당한 권리였다. 그거 한 번에 갑자기 소인중은 적으로 돌변해 나를 사사건건 방해하고, 급기야 이제는 나와 비원더를 물리치려 음모를 꾸준히 꾸미기 시작했다.
역시, 처분이 답이었다. 게다가 이전 생에서도 소인중은 몇 년 후, 여러 논란이 겹쳐 몰락할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조금 빠르게 돌리면 됐다.
이번 일을 해결한 다음에는, 소인중의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헛.”
정신을 차려보니, 노자경이 휘둥그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또 버릇 나왔네.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한 5분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
나도 모르게 오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형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