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그럼 이번에는 노을이 노래 한번 들어볼까?"
드디어 내 차례였다. 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노을 군은 작곡가가 아닌데. 어떻게 했어요?"
환희가 장난치듯 말했다.
"노을횽 루아 선배에게 부탁했데요~. 깡도 좋아여.”
"저, 노을 군에게 물어봤는데요."
키미가 살짝 냉정하게 말하자 환희가 입을 다물었다. 키미가 말을 계속했다.
“루아는 자기 곡만 작년부터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남의 곡 쓰는 건 전문가의 영역이에요. 이제라도 제가 투입되는 게 어떨지요?"
천채왕이 씨익 웃더니 말했다.
"뭐 이리 급해? 한번 들어보고 정하면 되지."
"네."
천채왕이 내게 위로했다.
"야 니들이 이해해라. 노을이 니가, 워낙 악기가 좀 굉장하잖냐. 키미가 니 솔로곡 써보고 싶었는데, 초짜 작곡가에게 뺏겨서 심통이 좀 난 거야.”
"선생니임!!"
키미가 입술을 콱 깨물고 천채왕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천채왕이 '큭큭' 소리를 내며 곡을 틀어달라 손짓했다.
마이너 코드의 어쿠스틱 기타가 리듬감 있게 들어왔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들어왔다.
[배고파 죽겠어.
허나 나는 참겠어
내일까지 하겠어
너의 시선을 또 get you]
다들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음악에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악을 듣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번에 내가 준비한 곡 '배고파 죽겠어'는 몸으로 느껴야 하는 곡이었다.
이번 곡은 반전으로 내 '리듬감'과 '톤'에 집중한 곡이었다. 그중에서도 리듬에 힘을 실었다.
[오늘도 난 네게 고파
하루 이틀 계속 고파
너랑 같이 밥 먹고파]
처음에는 어쿠스틱 기타가 리듬감을 잡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슬쩍 젬베 등의 타악기가 얹어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후렴에는 어쿠스틱 풀 밴드 편성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는 가볍게 가성으로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탁탁 가사마다 끊어줄 부분을 끊어주면서 리듬감을 살렸다.
마지막에는 내 노래를 사람들이 듣는 이유인 고음을 얹었다. 애드립으로 마무리했다. 평소의 애절한 감정의 알앤비 발라드 애드립이 아닌, 깔끔하게 정리된 애드립이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희가 엄치척! 을 했다.
“이야 횽~ 너무 좋은데요. 완전 의외에여."
그러고 보니 환희가 좋아할 만한 타입의 노래였다. 리듬감이 강조된, 미국 알앤비 느낌 가득한 노래였으니 말이었다.
재호와 키미는 조금 더 미묘한 표정이었다.
재호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드럼이 어쿠스틱인데 그보다는 808 베이스 드럼으로 찍어주는 게 더 세련된 느낌이 나지 않을까? 지금은 꼭 포크 뮤지션 곡 같다구. 그것도 좋긴 한데 노을이 니 목소리에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야."
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기타는 미도리가 쳤어요?"
"네."
"역시 기타가 좋네요. 끝까지 긴장감이 팽팽해요. 이 기타가 좋으니 저 같으면 나머지는 모두 전자 악기로 수정하겠어요. 베이스도 아예 무그를 써서...”
재호와 키미가 이것저것 편곡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옆에서 회의록을 작성하던 김나리의 타자 소리가 매우 빨라졌다.
한참을 조언하던 키미가 마지막으로 짧게 마무리했다.
"그래도 잘했어요. 춤추고 싶은 비트였어요."
이 정도면 키미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재호도 동의했다.
"그러네요. 역시 문루아 선배님이 댄스 가수셔서 그런가. 비트가 댄서블하네요. 저는 아무리 해도 이런 느낌이 잘 안 나오던데."
'사실 좀 고생하긴 했지.'
이런 비트가 나온 건 노자경 덕분이었다.
* * *
어제, 노자경과 안무 연습이 끝나고, 바로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 했다.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주세요!”
노자경은 '배고파 죽겠어'에 맞춰 춤을 추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뭔가 어색해서 춤이 잘 안 춰지면 그걸 내게 말했다. 그러면 미리 배영웅 매니저가 섭외해 둔 인하우스 프로듀서가 내 지시에 맞춰 조금씩 악기를 수정했다. 미세하게 볼륨, 리듬, 싱코페이션(리듬을 원위치에서 밀고, 당기는 테크닉) 등을 조정하면서 노자경이 '춤추고 싶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들이 듣고 있는 ‘배고파 죽겠어'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노래를 듣고 있던 내내, 이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몸으로 내 노래에 리듬을 맞췄다. 춤추고 싶은 노래라는 뜻이었다.
다른 담당자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그러자 드디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천채왕이 입을 열었다.
“수록곡으로 딱이네.”
그러자 재호와 환희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니들이 놓친 부분이 있었지.'
솔로곡은 어디까지나 '수록곡'이었다.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너무 강한 개성으로, 앨범 전체 구성을 흔들리게 하는 곡은 오히려 뒤로 빠지게 되기 마련이었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보통 앨범 초반에 등장하는 타이틀곡이니 당연했다.
재호의 간절한 발라드나, 환희의 화려한 알앤비 곡은 저 뒤에, 후반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앨범의 핵심 서사와는 비껴간 채로 말이다.
그에 반해 내가 준비한 '배고파 죽겠어'는 댄서블한 알앤비였다. 감정도 그렇게 세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노래를 끝까지 들으면 내 애드립과 더블링(같은 부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는 녹음 테크닉) 등을 활용해서 마지막은 풍성하게 마무리했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곡이지만, 타이틀곡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반찬 같은 노래였다.
즉, 내 곡이 훨씬 더 앨범 구성상 잘 보이는 부분에서 등장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정규앨범이란 코스요리와 같았다. 굳이 모든 요리가 주메뉴가 될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타이틀 곡'이라는 주메뉴가 내정된 경우는 더욱 그랬다. 이럴 때는 오히려 이미 내정된 주메뉴와 최대한 잘 어울리는 곡을 만드는 편이, 더 유리했다.
천채왕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노을이 너. 진짜 20대 초반 맞어? 앨범 구성의 묘를 다 아네… 대단한 놈이야."
“우연입니다."
"설마!”
천채왕은 피식 웃어넘기더니, 그대로 자신이 준비한 다른 수록곡들을 들려주었다. 수록곡은 애절한 미디엄 템포 알앤비부터, 약간 펑키한 디스코까지 온갖 장르가 다 들어있었다. 심지어 래퍼 피처링의 신나는 파티 곡도 있었다. 단맛 쓴맛 씁쓸한 맛까지 온갖 맛이 모두 들어있는 풍성한 코스요리였다.
뺄 곡이 하나도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다 들어봤으니까 이걸 토대로 곡 순서를 내가 정하도록 할게.”
천채왕은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이 고민하시는 동안 공지할게요. 하나 축하드릴 일이 있는데요."
“뭔가요?”
배영웅이 언제나처럼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 일본 진출 확정했어요.”
"와!"
환희가 환희에 젖어 손을 하늘 위로 올려 만세를 외쳤다. 항상 쿨한 표정을 짓는 재호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미국에 가서 세계를 보고 온 것이, 예방주사의 효과를 준 게 아닐까 싶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문루아 아티스트님 덕분에 이야기가 잘 된 모양입니다."
내가 물었다.
“루아 선배가요?"
“문루아 님 덕에 '슈퍼스타 T’가 일본에서 좀 잘 됐어요. 재호 아티스트님은 벌써 팬클럽도 생겼던데요?”
만세를 멈추고 환희가 재호를 놀렸다.
"와 부러운데요 횽. 재호쿤. 스키!"
재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어설픈 일본어는 대체 뭐냐구…"
하지만 역시나, 재호도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바다 건너, 다른 문화권에 자신의 팬이 있다는 사실은 재호에게도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인 모양이었다.
내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일본은 한국하고 좀 다르죠?”
지난 여행에서 안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문루아와 함께 일본 시장을 개척한 일본통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는 미국에서도 현지 직원과 잘 어울리며 능숙하게 가수를 매니징했다. 보통 몇 개국의 몇 개 팀이 해내야 할 일을 인턴 한 명과 함께 척척 해내는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여튼, 저 사람이라면 일본 진출에서는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런 그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다릅니다. 훨씬 더 기존 레거시 미디어나 공연이 중요해요. 대신 한번 팬을 만들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요. 튼튼한 시장이죠. 부러워요."
“지금 우리처럼, 빠르게 성공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그건 한국에서도 어려워요. 오디션 프로에서 세 분이 워낙 화제가 되셨으니까 가능했던 거에요."
"그렇군요..."
나는 미래를 떠올렸다. 미래에는 사실 한국 가수가 일본에서 스타디움 규모의 대형 공연을 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대부분이 안무를 기본으로 하는 아이돌 그룹이었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말이었다.
미래를 보고 온 내가, 이 지식을 활용해서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봐야 했다.
어느새 천채왕은 화이트보드에서 마커를 들고 이렇게 저렇게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일본 시장 중요해~.”
"물론이죠. 일본 시장은 단순히 일본 시장이 아니니까요. 미국 팝시장 다음 세계 2위 시장이죠. 일본에서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아시아에서 주목받게 되니까요. 게다가 일본 문화를 즐기는 유럽, 미국, 남미 팬들의 유입도 생기고요."
시선이 느껴져서 말을 멈췄다. 정신 차려보니 재호, 환희는 물론 배영웅 매니저, 천채왕, 심지어 계속 스크립트 작업만 하던 김나리까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천채왕이었다.
“노을이 넌 참 희한하다. 노래만 부르는 애가 그런 거는 어떻게 아니? 너도 제작할 거야?”
"아뇨 아뇨. 노래만 부를 겁니다.”
“그런 애가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미래에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 나오는 걸 보며 배워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재호가 프로듀서다운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일본은 일본만의 취향이 있어서, 일본 전용곡을 따로 만들어야 할 텐데요."
천채왕이 대답했다.
"맞아. 일본 작곡가 섭외 풀은 우리에게 충분히 있어. 비원더가 싱어송라이터 그룹이기는 하지만, 일본 앨범은 좀 더 우리에게 맡겨 줘. 아무래도 우리가 더 전문가니까.”
"알겠습니다."
그 사이에 천채왕은 화이트보드에 앨범 트랙 리스트를 완성했다.
마음속으로 함성을 질렀다.
내 곡은 타이틀 곡 바로 다음, 무려 3번 트랙이라는 황금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천채왕이 말을 이어갔다.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해서 곡 순서를 짜봤다. 어때?"
재호와 환희는 자신의 곡이 뒷순위에 배치되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천채왕이 둘의 표정을 읽은 듯 말을 이어갔다.
"이 순서로 한번 쭉 들어보지?"
"네네!"
배영웅 매니저가 트랙을 재배치해서 곡을 틀었다.
역시나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은 그 이름 그대로 천채왕이었다.
곡들의 순서만 바꾸었을 뿐인데, 기승전결이 확실하게 생겼다. 이 앨범을 카페에서 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저절로 들 정도로 편안했다. 그러면서도 모든 곡이 개성이 확 살았다.
“어때?"
재호와 환희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후순위에 배치된 재호, 환희의 솔로곡도 전혀 죽지 않았다. 되려, 재호의 애절한 발라드는 너무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왠지 아쉽지 않았다. 셋 모두의 음악이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기쁨이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이후 회의는 한층 열기를 띄었다.
“슨생님! 저희 마지막에는 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곡으로 마무리하면 어때여? 대곡으루!"
"대곡? 그거 돈 많이 드는데."
“에이 슨생님 돈 많으시잖아여~"
“야 환희 너 데뷔했다고 너무 태도가 다른데.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었는데."
그렇게 서로 깔깔대면서 회의가 끝났다. 천채왕은 앨범을 마무리할만한 스케일 큰 발라드곡을 하나 알아봐 주기로 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회의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왠지 회의 때 처음으로 우리 앨범을 들었을 때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뭔가… 아직 뭔가 위기가 있을 거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mp3가 갑자기 울렸다. 뭔가 불현듯. 이건 위험 알림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뭐, 워낙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mp3 덕에 위기를 미리 알면 대처하기도 쉬웠다.
mp3를 슬쩍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