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07화 (107/280)

제107화

우리는 비밀리에 TYB가 아닌, 모 카페의 소규모 세미나실에 모였다. TYB 직원에게도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프로듀서 천채왕과, 신규 사원 김나리. 그리고 아마도 TYB에서 ‘비원더'의 메인 프로듀서로 지정한 듯한 키미까지. 딱 3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비원더 멤버 3인, 그리고 배영웅 매니저까지. 딱 7명이 회의의 전부였다.

살짝 옆을 바라봤다. 재호와 환희 모두 오랜만이었다. 미국에 갔다 온 다음에도 선곡 회의 대비를 위한 막판 곡 작업 때문에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

재호와 환희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슬쩍 둘에게 물었다.

'날 샜냐?'

'말이라고 해요 횽…’

'3일 동안 5시간도 못 잤다고… 노을이 넌 건강해 보이네.’

약간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하긴 뭐 그래봤자. 나는 곡을 안 쓰니까. 니들처럼 날을 샌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안심이었다. 대신 나는 어제, 내 나름의 대책을 세워 두었으니 말이었다.

환희가 내게 손바닥을 펴서 보여줬다.

“됐구요 횽! 선물!"

"선물?"

"태평양 건너 갔다 왔는데 선물도 없어요 횽?"

재호도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그래. 그건 매너가 아니지. 정말 없냐? 없냐구?"

그야 당연히… 뻥이었다.

"당연히 있지. 옛다.”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둘에게 줬다.

"와! 횽 대박!"

"너는 맨날 선글라스 끼니까."

"고마워요 횽."

"나는?”

"자. 너는 이거다 기대해."

엄청나게 큰 박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내가 고생고생해서 가져온 선물이 들어있었다.

박스를 열어봤다. 그 안에는 좀 특이한 악기가 들어있었다.

"뭐냐 이건?”

"너 악기 모으잖아."

"그지?"

"그래서 새 악기 하나 가져와 봤어."

"뭐 이런 걸 사 왔냐. 너무 무겁구… 듣도 보도 못한 악기를..."

"뭘 모르는구만."

"너 그냥 돈 아끼려고 아무거나 장난감 사 온 거 아냐?"

"무슨 섭한 말씀을."

재호에게 준비한 선물은 '하르페지'라는 이름의 악기였다. 보드판에 단추처럼 버튼이 가득 들어있는 현악기였다. 현악기지만 피아노처럼 두드려서 연주하는 독특한 컨셉의 전자 악기였다.

재호는 내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사실 이거 내년에 나올 예정이야. 지금은 구할 수도 없어."

비매품이라는 말을 듣자, 드디어 재호가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어떻게 가져왔어?”

"문루아 선배 덕이야."

문루아가 음악 작업을 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과 미팅을 했다. 그중 악기 제작사 대표가 문루아와 미도리에게 이 악기를 선물했다.

"그 사람 엄청 오래 자랑했어. '피아노 치듯 기타를 칠 수 있다'고."

"와. 그건 대단한데."

재호의 눈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사실 그래서 이걸 재호에게 주기로 했다.

문루아에게는 이 악기가 필요 없었다. 그녀 곁에는 완벽한 테크닉을 가진 기타리스트 미도리가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재호는 기타를 치지 못해서 늘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 악기라면 기타를 대신하지는 못해도 새로운 느낌을 낼 수 있을 터였다.

"한번 잘 써봐 그럼."

"뭐… 한번 확인은 해볼게."

재호는 여전히 잘 못 믿겠다는 듯, 뜨뜻미지근한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이 악기는 재호에게, 그리고 우리 비원더에게 엄청난 무기가 될 터였다.

그 사이, 김나리 사원이 배영웅 매니저에게 뭔가를 전달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그 자료를 회의의 참석자 모두에게 전달했다.

총 15개의 곡의 설명 자료가 들어있었다. 각 곡마다, 적게는 1쪽, 많게는 5쪽 정도의 소개 자료가 적혀 있었다.

천채왕이 모두에게 말을 시작했다.

"다들 잘 지내셨지요? 노을 군도 오랜만에 보내. 반가워. 미국 잘 갔다 왔지?"

나는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네넵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채왕이 내게 답변을 하면서 시선을 환희 쪽으로 돌렸다.

"그래그래. ...근데 환희 너는 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다 꼈니?"

"앗! 죄송해여."

다들 피식 웃었다. 환희의 엉뚱한 행동 덕에 회의실에 긴장이 좀 풀렸다.

저게 다 저 녀석의 진짜 모습이 아니고 연기라는 걸 아는 나나 재호는 좀 소름이 돋았지만 말이었다.

천채왕이 회의자료를 살짝 들추어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정규 1집 선곡 회의입니다. 다들 알겠지만. 데뷔 앨범은 정말 특별해요. 어떤 가수의 데뷔 앨범은 커리어 내내 잊혀지지 않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가수도 많아요. 모든 활동이 그렇지만, 특히 정규앨범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알겠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키미 프로듀서는 흥미롭다는 듯, 선곡 회의자료를 슬슬 살펴보고 있었다.

"그럼, 우선 키미. 키미가 준비한 곡부터 들어볼까?"

"아하 네. 가제 '테이크 미' 틀어주세요."

배영중 매니저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모니터용 스피커에서 서서히 음악이 들렸다.

잔잔한 느낌의 전주와 함께 화려한 팔세토 가성의 가이드 보컬이 들어왔다. 딱 봐도 환희가 부르면 좋을 파트였다.

근데 문제는 가사가…

[넌 정말 쩔어 break it like it’s on your mind~]

……

다들 침묵했다. 그야, 아직 가사가 나오지 않은 순간에는 외계어를 쓰는 게 관행이었다. 가사보다는 발음이 주는 느낌만 전달하면 되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딱 하나, 한국어 가사가 콕 박혀 있는 걸 볼 때, 이게 핵심 아이디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문장은 바로

[넌 정말 쩔어! 쩔어~. 쩔어, 쩔어어! 개 쩔어우우우우~]

심지어 후렴에는 '쩔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심지어 매번 미묘하게 강세, 애드립 등을 달리해서 '쩔어'라는 멜로디가 계속해서 나왔다. 노래가 끝나면 ‘쩔어'라는 말 밖에 머리에 안 남을 것 같았다.

머리를 최대한 깨끗하게 하고, 다시 찬찬히 음악을 들어봤다.

‘음악은 정말 고급스러워.'

음악은 정말이지 감탄이 나왔다. 은근히 감성적이고 서글픈 멜로디에 적당히 기분이 좋아지는 힙합 비트와 어반한 느낌의 세련된 기타, 그리고 과하지 않은 '살짝' 춤 출수 있을 법한 힙합 사운드 샘플링이 섞였다.

분명히 우리 비원더의 가창력을 보여줄 수 있는 슬로우잼 알앤비면서도, 라운지에서 살짝 어깨춤을 출 수 있는 정도의 절묘한 리듬감이 배합되었다.

이 곡,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의 만듦새였다.

멜로디도 굉장했다. 간단명료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훅이 반복됐다. 거기다 각 멤버들의 특성도 완전하게 이해하고 만들었다. 환희를 위해서는 화려한 알앤비 보컬이나, 약간 랩처럼 멜로디 없이 가사를 리드미컬하게 내뱉는 부분을 만들었다. 재호를 위해서는 섬세한 코러스와, 소울풀한 중저음을 뽐낼 수 있는 부분을 적절하게 붙였다. 게다가 곡의 절정에서는 환희의 랩이 깔리면서 내가 화려하게 고음 애드립을 부르는 파트까지 나와 있었다. 굳이 파트 배분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의 장단점을 완벽하게 계산해 재단했다. 마치 우리에 몸에 딱 맞춘 맞춤 정장과 같은 노래였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역시 가사였다.

마지막 후주를 장식하는 파트는 재호의 코러스와 환희의 랩, 그리고 나의 고음 애드립의 조화였다.

곡이 끝났다.

"어때?"

천채왕이 씨익 웃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능청스러운 웃음이었다.

재호가 먼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쩌네요."

"푸훗!"

나와 환희는 물론, 심지어 항상 쿨한 표정이었던 키미까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재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제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처음에 저희들이 이야기하며 만들었던 곡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셨네요."

천채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누구 의견을 엎었다기보다. 더 좋은 길이 없을까 수백 번 엎고 또 엎은 거야. 내 의견도 몇 번이나 취소했어.”

“아니요. 정말 그러신 거 같구요. 이건 진짜 '비원더'라는 음악 장르를 만들어주신 느낌이네요."

“그렇게 이해해주니 너무 고마운데?"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적당히 가요스러운 대중성이 있었고, 또 적당히 팝과 같은 세련됨이 있었다. 너무 슬프지도 않고 너무 들뜨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이거라면 우리 세 멤버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었다. 중저음에 소울과 코러스가 특기인 재호, 정통 흑인 알앤비 보컬과 힙합에 가까운 리듬감 있는 테크닉이 특기인 환희, 그리고 정통적인 고음 보컬인 나까지 모두 자기 특기를 살릴 수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비원더 활용법의 정석'이었다.

"근데 가사가… 좀..."

그리고 재호는 뭔가 말을 어려워했다. 언제나처럼 재호는 윗사람에게 나쁜 말 하기를 어려워했다. 대신 간절한 표정으로 나와 환희를 쳐다봤다.

'왜 또 나냐…’

환희도 빙빙 둘러 말했다.

"근데.. 쩔어가 있는 말인가여?"

아직은 이 말은 신조어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2007년쯤 최고 히트한 유행어였던 것 같기도 했다.

"가사가 좀 싫지?"

"예."

"그쵸."

재호와 환희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천채왕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절대 잊혀지지는 않겠지?"

"그렇기는 하져."

환희가 힘없이 대답했다. 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천채왕.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야."

재호와 환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정규앨범 타이틀곡이 '넌 정말 쩔어'라는 제목이란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일부러 침묵을 깨려 입을 열었다.

“저는 이해합니다.”

재호와 환희 모두 나를 바라보며 '무슨 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노을이는 이해해주다니 고마운데. 일단 이거는 내 감을 믿어줘."

"하, 하지만!"

그리고 환희와 재호가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TYB를 2020년까지 봐왔다. '쩔어'뿐 아니라 '킹왕짱' '어서 와, 루비는 처음이지?' '너님 좀 짱인 듯' ‘이거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임'까지. 온갖 유치뽕 가사들로 매번 성공했다.

...그러고 보면, 세련되지만 평범해서 잊혀지는 가사보다는 ‘너님 좀 짱인 듯'으로 시작해서, 모두가 비웃으면서도 기억에서는 영원히 지우지 못하는 가사가 흥행에는 더 나을지 몰랐다.

타이틀곡에서는 나는 천채왕의 감을 완전히 신뢰했다. 미래에 그 결과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멤버들의 솔로곡을 발표하는 자리가 되었다.

환희는 예상대로 정통 흑인음악, 알앤비 곡을 준비했다. ‘악마의 열매'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주술적인 그루브의 베이스 연주를 중심으로 환희가 춤을 추듯 화려하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묘한 대중성이 있는 노래였다.

키미와 천채왕은 들으면서 꼼꼼히 피드백을 메모했다. 그리고 곡이 끝나고 환희에게 말해주었다. 모두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조금 더 영어 가사를 줄일 것, 그리고 조금 더 한국 사람들에게 먹힐 단어를 써올 것 등이었다.

다음은 재호의 노래였다. 재호는 매우 강렬한 발라드곡을 준비했다. 곡 제목은 ‘바이러스'였다.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자신에게 옮겨붙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곡이었다. 심플한 피아노와 스트링 속에서 재호는 1절은 절제하는 중저음 소울 보컬을 보여주었다. 2절에서는 갑자기 30인조 대형 가스펠 코러스로 변신, 자신이 직접 편곡하고 부른 화려한 화음의 코러스와 함께 강렬하게 곡을 마무리했다.

노래가 끝나고, 이번에는 키미가 디테일하게 편곡을 봐주었다.

"이 부분은, 악기를 빼버려야 콰이어 소리가 살아요. 잠깐 아카펠라가 되는 거죠."

"아, 그러면 더 좋겠네요."

"코러스 잘 짰네요."

"아, 감사합니다."

좀처럼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키미에게서 칭찬을 받자 재호도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천채왕은 두 사람의 곡 모두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 다음 곡 발표는 나였다. 좀 쫄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했다.

그럴 만했다. 나는 저 두 사람이 곡 준비를 하면서 놓친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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