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선곡 회의.
일반적으로는 다양한 임원들과 팀장들이 함께 모여, 어떤 곡을 넣고 뺄지 이야기를 할 터였다. 중심은 음악을 기획하는 A&R 팀이 될 것이고 말이었다.
하지만 비원더는 일반적인 TYB의 제작이 아니었다. 그래서 천채왕이 직접 회의를 주도하기로 전달을 받았다. 천채왕과 김나리, 단둘이서. TYB의 프로듀서들, 그리고 멤버들과 함께 회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멤버들의 의견 위주로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하십니다. 저희 회사가 10년 만에 처음 만드는 싱어송라이팅이 되는 팀이니까요."
그리고 이 선곡 회의에서, 곡의 수록 순서와, 곡의 수록 여부가 결정됐다.
이때까지, 최대한 내 곡을 잘 만들고, 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도 설득력 있게 만들어야 했다. 프레젠테이션을 문루아에게 요청할 수는 없으니, 내가 직접 준비해야 했다.
“끄응..."
작곡은 내 적성도 아닌데, 갑자기 느닷없이 곡 마무리 작업은 물론, 곡 발표까지 해야 할 처지였다.
"내일모레까지 잘 준비 부탁드려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알려 주시고요."
"저, 실장님."
"네?"
"혹시, 제 솔로곡이 탈락하면. 저는 솔로곡 없어지는 건가요?"
배영웅이 예의 실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탈락이 걱정되세요?"
"혹시나 싶어서요."
"천채왕 프로듀서가 새 곡을 주문하거나. 아니면 솔로곡이 없어지기도 하겠죠? 어차피 노을 아티스트님 노래를 단체곡에서도 실컷 들을 수 있기도 하니까요."
"그렇군요..."
사실 솔로곡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기껏 미국까지 가면서 고생하며 만든 곡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이걸 잘 키워서 가꿔야 했다.
* * *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배영웅 매니저가 볼보 자동차로 나를 집에 태워다 주었다. 비행기에서 계속 잠을 자다 보니, 밤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거 왠지, 시차 적응에도 며칠 걸릴 거 같네.'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자연스럽게 생각은 선곡 회의로 갔다.
그 중에도 '둘은 어떤 곡을 선보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계속 붙어 있어서인지, 금방 대충 짐작이 갔다.
우선 재호. 재호의 음악 취향이라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호라면 앨범 전체의 ‘균형'을 생각하리라는 것도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재호는 분명, 자신의 특기인 '편곡'을 무기로 삼을 터였다. 아마 화려한 편곡과 코러스를 무기로 삼아 애절한 발라드곡을 써올 터였다.
비원더의 타이틀곡은 애절한 정통 발라드라기보다는 슬프지만 약간의 비트가 있는 곡이었다. 묵직한 감정의 발라드곡 하나가 중심을 잡아주면 좋았다. 아마 재호는 그런 곡을 가져올 터였다.
다음은 환희의 곡이었다. 하늘이의 음악적 취향은 찐한 미국식 힙합, 알앤비였다. 타이틀곡이나 TYB 작곡가들이 쓴 곡보다 훨씬 더 진한 알앤비 느낌의 곡을 가져올 거라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두고 나니 내 곡이 어떤 방향이어야 할지 딱 느낌이 왔다. 내 빈 곳은 오히려 전형적인 '미디엄 템포 알앤비'였다. 약간 호소력 있지만, 밝은 톤의 곡이었다. 실제로 지금 문루아와 미도리가 만들어준 곡이 적당한 리듬감을 가진, 그렇다고 너무 슬프지 않은 알앤비 곡이었다.
이걸 좀 더, 템포가 있게, 신나면서도 감성을 담은 황금비율로 담아내면 선곡 회의 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슬슬 생각을 멈추고 잠에 들려던 순간,
[띵동]
핸드폰에 무언가 메시지가 왔다.
"어? 이 사람은?"
* * *
다음 날 12시.
나는 키미 프로듀서와의 회의를 앞두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TYB 사옥 1층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깜빡 잊고 있었어.'
내게 연락을 준 사람은 노자경이었다. 그를 오창선 선배에게 소개한 지도 1주일이 거의 되었었다. 오창선 선배에게서 '오케이'라는 응답만 받고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한국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구만.'
한국에서는 크나큰 난리가 났다. 그럴 만했다. 갑자기 인기를 끌던 신성 보이그룹 '잇츠쇼타임'의 멤버가 교체되었으니까 말이었다. 기사에서 소인중 대표는 교체의 이유는 ‘개인 사정'이라고 적당히 둘러댔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노자경은 얼마 전, 자살 시도를 했었다. 지나친 회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걸 저지하고, 대신 원래 자신의 특기인 '댄스'를 살려, 안무가가 되어보라고 제안한 것이 나였다.
'뭐, 노자경이 위대한 안무가가 된다는 미래를 알고 있어서 했던 제안이지만.'
"저어..."
노자경은 인기 멤버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멤버 교체 기사는 잊혀졌다. 이후에 노자경의 사정은 전혀 기사화되지 않았다. 비인기 멤버의 사정 따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씁쓸한 현실이었다.
"저어어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씁쓸하게 오늘 자 신문을 살피는 사이에, 어느새 노자경이 앉아 있었다.
"에유 저. 자꾸 관심 안 주실 거면 지금 갈게요."
"아아 잠시만요."
"아니. 지금까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그러신 거예요? 은인이라서 봐 드리는 겁니다!"
"아아… 네네."
노자경은 나보다 한 살 많았다. 그래서 나는 형이라고 이제는 부르겠다 말했다. 하지만 그는 '어찌 은인에게 동생이라 부르겠냐'며 서로 존댓말을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뭔가 이상한 박력이 있는 사람이구만.'
아무래도 이전에 만났을 때 노자경은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고. 원래는 지금이 노자경의 본 모습인 듯했다.
"아니 노을 씨. 참 듬직하고 좋은 사람인데. 조금 정신머리가 읍서! 사람이 앞에서 말을 걸면 들어야지!”
...왠지 왜 회사에서 트러블이 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기 센 소인중이나 엔젤이 노자경 같은 타입을 좋아할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뭐 괜찮았다. 세계적인 안무가가 될 운명의 사람인데, 뭐 그 정도 오만함(?)이야 걱정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많아도 기어이 존대를 하겠다는 기이한 오만함이었다.
"앞으로는 잘 들을게요. 그래서. 어떠세요?"
"뭐가요?"
노자경이 TYB 카페에서 내려온 카푸치노를 마시다 말고 물었다.
“오창선 선배가 자경 씨 출근 시작했다고 연락하던데."
노자경 표정이 바뀌었다.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사실 그래서 오늘 만나 뵙자고 한 겁니다."
"뭐가요?"
"잘 소개해주셔서 우선 취직은 됐어요. 무대 보조 겸 안무로."
"와 축하드려요."
“저 같은 놈이 이런 기회를 얻은 게 뭐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노을 씨 덕이죠. 감사합니다."
뭔가 거친 말투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은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 모두가 케어해주는 가수셨는데. 갑자기 직원으로 어찌 보면 강등되신 건데, 밝아 보이시네요?"
“아이구~. 모르시는 소리예요 노을 씨. 거기는요. 너무 빡세. 가시방석이었어. 지금이 훨씬 마음 편합니다. 다 노을 씨 덕분이에요."
"아우 아닙니다. 잘됐네요."
"뭐라도 드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나는 수란을 곁들인 샐러드를 시켰다. 노자경은 내 머리통만 한 티본 스테이크에 오므라이스를 추가했다.
나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작게 시킨 거였다면, 노자경은 너무 많이 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우걱우걱 우걱우걱!”
식사가 나오기가 무섭게 노자경은 오므라이스를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리고 바로 쉴 틈 없이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너무 잘 먹어서 그걸 보는 나까지 배가 불렀다.
"엄청 잘 드시네요. 그렇게 먹어도 몸 관리에는 문제 없으신가 봐요.”
우걱우걱 먹던 노자경이 잠시 물을 한 잔 마시고 한숨 돌리더니 대답했다.
“저야 뭐 보시다시피. 춤만 추는 놈이라서요. 다이어트는 필요 읍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워낙 다급한 상황에서 봐서 잘 몰랐는데, 노자경은 탄탄한 몸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무채색의 후드티에 추리닝 바지, 바이닐 모자의 후줄근한 차림이었음에도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제대로 핏을 살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항상 몸을 쓰는 일을 하시니까 다이어트는 저보다는 훨씬 편하시겠네요."
갑자기 노자경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뭐가요?"
"저는 댄서에요. 잇츠쇼타임 활동할 때도 그래서 힘들었어요. 노래만 하시는 분들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
'엔젤 이야기인가.'
"그래서요?"
"제가 내일까지 안무를 하나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게 오창선 사장님 안무거든요?"
"오… 진짜 빠르시네요."
설마 설마 했는데 취직하자마자 안무 디자인을 맡기다니, 상당히 노자경을 높게 본 모양이었다. 미래에야 최고의 안무가지만 지금은 그저 실패한 가수 출신의 공연 스태프였는데 말이었다.
“저… 그게 사실..."
노자경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은 청소 등의 잡일만 하는 보직을 받았었다. 그런데 무대를 정리하는 도중, 오창선이 자연스럽게 자기 미발표곡을 틀었었다. 청소하던 노자경은 자연스럽게 오창석의 신곡에 맞춰 춤을 췄다.
'야! 이놈 물건인데? 너 이거 한 번 안무 만들어봐. 나도 할 수 있게!"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바로 내일까지 오창선 선배 안무를 만들게 된 거군요?"
"네."
“대박 기회네요! 축하드려요. 근데 춤을 열심히 만드시지 왜 여기서 저랑 밥을 드세요?"
"바로 그겁니다. 저는 발라드 가수들이 대체로 어느 정도까지 춤출 수 있는지 감이 읍서요."
"아하.”
한마디로 너 같은 몸치들이 어느 정도 춤을 추는지 몰라서 안무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사장님 불러서 '어이 형씨! 이 동작 돼요?' 이럴 수도 없고. 그래서 노래만 하시는 분 중에 그나마 제가 연락할 수 있는 분이 노을 씨라. 부탁 좀 드리러 왔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쇼!”
"하하."
'뭐 도와줄 수는 있는데, 나도 갈 길이 바쁜데요. 나도 지금 음악을 만들어야… 음 잠깐?'
갑자기, 내 뇌 속에 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살짝 스쳤다. 바로 얼마 전 미국 여행에서 보컬 트레이너 리즈에게 들었던 조언이 생각났다.
[지금 하는 음악 활동만 빼고 뭐든지 괜찮아요. 이것저것 해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해봐요.]
즉 간단히 말하면 '나랑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 보아라'는 뜻이었다.
대체 노자경, 이 사람만큼 나와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좋아요. 지금 당장 해보죠."
"지금 당장이요?"
정작 말을 꺼낸 노자경이 약간 당황했다.
"여기 지하에 남는 연습실 많아요. 안무 알려 주세요. 제가 어디가 어려운지 다 알려줄 테니까."
"지금 그래도 되나요? 곧 오후인데, 하실 일 읍서요?”
"대신… 자경 님도 이거 끝나면 하나 도와주세요."
노자경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랗게 변했다.
“뭘요?"
'나 같은 일개 기획사 직원이 가수인 당신에게 뭘 해줄 게 있겠냐'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노자경은 큰 쓸모가 있었다. 그가 신곡 회의에서 나의 비밀 병기가 될 예정이었다.
* * *
그리고 2일 뒤.
내 곡의 수록 여부가 갈리는 선곡 회의가 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