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05화 (105/280)

제105화

천채왕의 주선으로 딱 1시간, 귀중한 보컬 트레이닝 시간을 받았다.

저녁 5시 일정이었다. 9시 출국이라 시간이 빠듯했다. 워낙 다급하게 잡은 시간이라, 트레이닝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기대감을 갖고, 배영웅과 함께 보컬 트레이너가 기다리고 있는 스튜디오로 갔다.

스튜디오라기보다는 깔끔한 대학 건물처럼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모든 수속을 배영웅이 대신해 주었다.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배영웅은 스튜디오 앞에 자리를 잡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피아노와 마이크, 그리고 녹음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보컬 코치로 보이는 중년의 백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반가워요~ 엘리자베스 만이에요. 리즈라고 불러줘요. 노엘? 이라고 발음하면 되나요?"

“네네!”

아무래도 앞으로 해외 활동을 목표로 한다면, 외국인이 발음하기 쉬운 활동명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자리에 앉아 그녀를 흘깃 보았다. '리즈'는 전혀 보컬 트레이너로 보이지 않았다. 말해주지 않았다면 회계를 맡은 직원으로 보였을 것 같았다. 보랏빛 나는 정장 차림에, 깔끔한 샤넬 컷을 한 갈색 머리까지, 모든 부분이 반듯했다. 노래를 직업으로 삼은 예술가라고 보이지는 않는 차림이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그랬다. 노래를 잘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항상 낮게 읊조리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럼 노오엘~. 노래 하나 불러 보겠어요?”

“아 노래요? 아무거나 되나요?”

“노오엘 노래는 확인해 뒀어요.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자신 있는 거면 돼요. 영어 가사로 부탁해요. 영어 잘하네요."

"알겠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디션 레퍼토리였던 'Just Come’을 불렀다.

*

한번 단 한 번만

돌아봐 줄 수는 없나요

*

리즈는 눈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노래를 들었다. 후렴부터는 머리를 까딱거리면서 내 노래에 맞춰서 리듬을 탔다.

‘다행이다. 내 노래가 들을 만한 건가?'

리즈가 누구를 가르쳤는지 미리 배영웅에게 공유를 받은 바가 있었다. 경력이 정말 화려했다.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 우승자부터 빌보드 1위까지. 온갖 가수의 보컬 트레이닝을 봐 주었다.

그래서 굉장히 걱정이 되었었다.

저렇게 대단한 가수들을 봐준 사람이 보기에 내 노래가 어떨지 궁금했다.

그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노래는 완전히 타고났네요. 저음부터 고음까지 레인지도 좋고. 호흡도 풍성하고. 음정도 기계 같은 정밀함이 있어서 리스너가 믿음이 가요."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같은 칭찬도 뭔가 영어로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약간 다른 각도로 나를 봐주는 느낌이었다.

"진짜 축복받은 악기에요. 이런 식으로 소리가 나기 쉽지 않은데. 하지만 이렇게 쓰면 조금 더 좋을 거예요. 여기에 힘을 빼보세요."

그녀는 직접 자기 목과 근육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힘을 풀어야 할 포인트를 잡아줬다. 직접 그녀의 예시를 보면서 확인하니 훨씬 더 이해가 쉬웠다. 이래서 세계적인 가수들의 보컬 트레이너인가 싶기도 했다. 가수라기보다는 의료인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 아~ 이렇게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렇게요.”

리즈가 입을 열고 노래 예시를 들려줬다. 엄청나게 깊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말소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묵직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조금씩 내 목소리를 맞춰갔다. 신기하게 목에 부담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리즈가 ‘어때요!'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약간 힘을 뺀 것만으로도 목소리가 한결 편해졌다.

“훨씬 편하네요.”

"앱~솔~루~틀리~. 노오엘은 엔진이 너무 좋아요."

“엔진이요?”

“브레쓰! 호흡 말예요 호흡. 숨을 너무 잘 쉬어요. 힘을 너무 줘서 그걸 다 못써요. 미묘하게 어깨에 힘을 지금보다 빼는 법을 배우면 될 거에요."

사실 리즈의 레슨에 굉장히 새로운 노하우가 있지는 않았다. 대신 약간의 변화인데 마치 벽이 하나씩 '뻥' 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조금씩 실력이 늘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해.'

리즈가 엄청난 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그녀에게 노래에 대해 더 많이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제 내게 충격을 줬던 결승 무대 이야기를 꺼냈다.

"저, 어제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에 갔는데요.”

“원더푸울~! 그거 티켓 구하기 진짜 어려운데요!"

“마, 맞아요. 거기서 보니까. 참가자들이 저랑 뭔가 다른 거 같더라고요.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달까?"

리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노오엘보다 성량이 컸다고요? 음향장비 차이가 아니고요?"

“아,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소리는 솔직히 다들 저보다 작았는데. 이상하게 저보다 잘 들리는 느낌이…”

분명 노래 실력으로는 내가 밀리지 않았다. 분명 조금이라도 더 나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뭔가 나보다 '잘 들렸'다.

“아하.”

그녀가 손으로 아치 모양을 만들며 말했다.

"노오엘은 소리를 좀 일직선으로 내는 편이에요.”

“일직선이요..."

"아크 형으로. 조금 위로 쳐서 휘게 만들면 좀 더 효율적으로 고음이 나와요. 힘을 덜 써도 조금 더 진동이 많은 소리가 나죠.”

"아~ 아~"

소리가 점점 편안하게 났다. 내 노랫소리를 내가 정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내가 바라던 방식이 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리즈는 얼굴 표정이 뭔가 좋지 않았다. 시원섭섭한 느낌이었달까?

“음 노오엘~. 나는 솔직히 지금 목소리도 개성 있다고 생각해요. 오페라 가수라면 정석처럼 발음해서 다 잘 들리게 해야지요. 근데 노오엘은 지금 굉장히 유니크해요. 정석에 가까워지는 게 꼭 방법이 아니에요. 유우~니크 함은 가지고 가면 좋겠어요."

“유니크함이라…”

"솔직히 별로. 노오엘에게는 가르칠 게 많지 않아요.”

“그, 그런가요!"

“기술적으로는 이미 내 이전 클라이언트들이랑 큰 차이 없어요. 노오엘 진짜 스무 살 맞아요?”

"네네."

“무슨 30대 중반 가수 같아요. 매일같이 20년은 단련한 베테랑 보컬리스트인데? 이런 사람은 처음 봐요. 마치 인생을 두 번 사는 거 같은 능숙함이에요."

뭔가 '뜨끔'했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럼 더 늘 구석이 없나요?"

그녀는 우선 기본기 연습은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환영이었다. 아무리 20년간 이전 생에서 연습을 했다 하더라도, 노래에는 끝이 없었다. 계속해서 노래를 갈고 닦아야 했다.

“그리고 노오엘, 너무 음악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요.”

“노래에 투자하는 시간이요?”

"네에~. 이제 노오엘은 악기로써는 거의 세계 탑까지 왔다고 봐야 해요. 이제부터는 기술 경쟁이 아니에요. 창의성 경쟁이지. 그걸 위해서는 연습을 1시간 줄이고! 다양한 걸 경험하는 게 좋아요!"

“다양한… 뭘까요?"

“지금 하는 음악 활동만 빼고 뭐든지 괜찮아요. 이것저것 해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해봐요.”

어째 이게 더 어려운 말인 거 같았다. 창의성을 늘리라니, 많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제는 단순한 스탯으로 올리기에는 한계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마지막 한 발자국만 남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한 발이 모호하다는 게 아쉬웠지만.

* * *

LA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문루아가 내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자 이제 작별이에요."

"어? 선배는 같이 안 가시나요?"

“저랑 미도리는 이제부터 일본 콘서트를 준비해야 해요.”

입이 크게 벌어졌다. 문루아는 벌써 컴백하자마자 도쿄의 스타디움급 공연장에서, 5만 명 넘는 관객과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버스킹만 해본 신인가수인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었다.

뭔가 자극이 되었다.

“음악은 오늘 새벽에 다 완성해서 메일로 보냈어요. 한국 가서 확인해보세요.”

"아, 밤을 새우셨나요! 감사합니다."

문루아가 살짝 하품을 했다.

"재미있었어요. 처음으로 제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 목소리를 상상해서 써보니까. 제가 못하는 테크닉을 막 넣어보고. 음역대도 막 마음대로 써 봤어요."

그 말인즉슨, 어마무지하게 어려운 곡을 썼다는 뜻이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메일로 곡만 덜렁 받는 거 보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면서 곡 쓰니 좋았죠?"

"네. 제목도 마음에 들고요."

“윽!"

문루아가 살짝 장난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본인의 말버릇을 제목으로 만든 ‘배고파 죽겠어'라는 제목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문루아가 살짝 눈을 감고 말했다.

"키미 선생님하고 후 작업 같이 자유롭게 하세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미리 말은 해뒀어요."

"알겠습니다."

문루아와 미도리가 만든 곡을 완성하는 건 이제 나와 키미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미국에서 좀 새로운 걸 봤어요? 그러라고 데려온 건데.”

“음..."

잠깐 눈을 감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강렬한 블루스 음악이 흐르던 시카고의 거리가 보였다. 사이먼 벅이 문루아 선배에게 황당한 짓을 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그리고 콜로라도의 상쾌한 국립공원의 냄새도 느껴졌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웨스트코스트 힙합이 들리던 LA의 길거리의 소리도 들렸다. 글로벌 비전 컨테스트 결승전 무대에 가득한 관중들의 함성과 온몸을 울리는 청중들의 발소리도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고의 보컬 트레이너, 리즈의 꼼꼼한 조언과 그녀의 반전 매력이 있는 콘트랄토(초저음 여성 보컬) 보이스가 들렸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 데뷔 전에 미국에서 홈스테이한 적 있어요. 제가 그 이야기 한 적 있나요?"

“아니요?"

대형기획사 연습생이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하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더 큰 세상을 미리 경험하고 오라고 선생님이 보내 주셨어요.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도움이 됐어요. 아마 노을 씨도 그럴 거예요."

"그… 홈스테이는 어떻게 하셨나요?”

문루아가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걸어 다니는 광고판인 아시아 스타 문루아는 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비싼 시계를 찼다. 항상 소탈한 선배였지만, 그녀가 찬 시계를 볼 때마다 엄청난 가수라는 걸 자각하게 했다.

"지금은 가봐야 해서.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러면서 문루아는 장난스럽게 싱긋 웃더니 가버렸다.

"아..."

고맙다는 말도 남길 틈도 없이 그녀는 휙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문루아가 떠나자 배영웅 매니저가 바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용건이 있었는데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돌아가자마자 일정이 있습니다. 2일 지나고 바로 신곡 회의가 있습니다."

"신곡 회의요?"

"어떤 곡들을 넣을지. 어떻게 배치할지를 결정하는 회의입니다. 회의 결과에 따라, 곡이 빠질 수도 있겠지요."

"곡이 빠질 수도 있다고요?"

의외의 소식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좀 미리 알려줘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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