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배고파 죽겠어'
문루아가 매일 하고 다닌다는 말 두 개를 이어 붙여봤다. 그래서 문루아는 안된다고 화를 냈고, 미도리는 빵 터져서 웃었다.
"안 돼요!"
문루아가 딱 끊어서 말했다. 신경질은 없었지만 단호했다.
"왜요?"
항상 냉정했던 문루아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제… 프라이버시에요!”
본인이 봐도 별문제 없는 일이여서일 터였다.
"루아 선배가 한 말이라고 말 안 할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음..."
“선배는 어차피 프로니까. 팬들의 눈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테죠?"
그랬다. 문루아는 언제나 쿨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절대 팬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북유럽 왕세녀 같은 쿨한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배고파 죽겠어' 이 가사가 문루아의 말버릇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리가 없었다.
"으이구!”
눈빛으로 문루아가 말했다. '왜 굳이 그런 걸 쓰려는 거에요?'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 사이, 웃음을 그친 미도리는 다시금 의자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나일론 기타였다. 분명 내가 조금 쳐봤을 때는 평범한 소리가 났는데, 신기하게도 프로 연주자의 손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무슨 노래에요?"
미도리가 고개를 저었다. 연주를 손으로 계속하며 말했다.
"그냥 즉흥으로 연주하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어'라는 말을 듣고 느낀 느낌을."
“아하!"
"왜 '배고파 죽겠어'라는 말을 생각한 거예요?”
"아 일단은 루아 선배 말버릇이 생각났고요. 이게 하나의 문장이 되고. 이건 발라드곡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왜요?"
"보통 연인 사이에, 처음 하는 일이 같이 밥 먹는 거잖아요?"
"오호."
미도리의 연주가 점점 긴장감이 더해졌다. 그러면서 계속 내 말에 집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밥을 같이 먹고 싶어. 배고파. 하지만 그 말을 못 하겠어. 뭐 그런 느낌으로 관계가 시작될까 말까 한 시기의 느낌을 보여주면 좋을 거 같아서요."
몇 년 뒤에 유행하는 말인 '썸타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는 뜻이었다.
“좋아요 좋아요. 그럼..."
미도리가 점차 연주를 변화무쌍하게 바꾸었다. 부드러웠던 연주가 쫄깃쫄깃하고 리드미컬한 연주로 변했다.
"아! 이 부분 너무 좋은데요. 방금 이렇게 끊어치는 느낌.”
"오~ 그으래요~. 좋아요."
노트에 미도리가 뭔가를 메모했다. 내가 좋다고 한 부분을 반복되는 리프로 바꾸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배영웅이 우리를 불렀다.
"아침 식사하세요~"
캠핑카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취사도구가 있었다. 배영웅은 재호만큼 뛰어난 요리사는 아니었기에 시리얼과 우유, 과일 등 간단한 요리만 준비되어 있었다. 소위 '컨티넨탈 브렉퍼스트'라고 하는 느낌의 아침이었다.
미도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캠핑카 앞에 왔다. 문루아는 보이지 않았다.
"루아 선배는 어디에 갔을까요?”
미도리와 배영웅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배영웅이 슬쩍 말했다.
"루아 아티스트님은 이런 아침을 드시지 않습니다."
"아..."
미도리가 덧붙였다.
"샐러드를 먹거나. 배가 너무 고프면 방탄 커피 한 잔 마시고 달려요. 루아. 정말 대단해요."
방탄 커피라면 알고 있었다. 버터와 코코넛오일을 넣은 커피로, 아침 대용으로 먹으면 다이어트에 활용할 수 있었다.
정말 그녀는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식사를 할 때부터 유독 배영웅이 자꾸 시계를 봤다. 나도 슬쩍 물었다.
“지금쯤 출발해야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에 갈 텐데요. 괜찮아요 실장님?"
뮤지크 소울차일드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며 물건을 정리 중이던 배영웅 매니저가 말했다.
"그러게요 슬슬 출발해야 다음 도시에 도착할 텐데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 문루아가 돌아왔다. 분명히 조깅 하고 돌아왔는데,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고 땀도 닦은 상태였다.
미도리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문루아가 능숙한 일본어로 미도리에게 말했다.
‘샤워할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었으면 해요.'
'알겠어요 루아짱.'
배영웅이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10분 안에는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미도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쿨가이!"
황당한 닉네임에 내가 픽 웃었다. 배영웅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미도리가 문루아의 콘서트 기타리스트이니만큼, 배영웅도 미도리와 만난 적이 있던 모양이었다.
미도리가 계속 말했다.
"루아짱은 아이돌이라고요! 루아히메에게 시간을 주세요. 10분이라니 너무 짧아요."
배영웅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곧 출발해야 일정이 맞는데요."
"그 일정이란 게 뭐에요?"
미도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LA에 모레까지 가야 합니다. 글로벌 비젼 콘테스트에 가야 하니까요."
"굳이 자동차로 가야 해요?”
"캠핑카밖에 없는 데요."
"아. 그게 문제인 거면 제가 해결할게요."
"네?"
* * *
2시간 뒤 우리는 LA에 가는 자가용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이없게도 미도리의 전화 통화 한 통으로 자가용 비행기가 도착했다.
내가 몰래 문루아에게 물었다.
'미도리, 무슨 재벌 집 딸이에요?'
'몰라요.'
'모른다니요?'
'자기 가족 이야기 절대 안 해요.'
뭔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 비행기를 가지려면 어느 정도 돈이 들까? 비행기 비는? 인건비는? 청소 비용은? 기름값은? 그야말로 엄청날 터였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뭐 그 덕에 편하게 콘서트에 가게 되니 다행이었다.
"이건 뭔가요?"
의자 옆에 뭔가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전화기'였다.
미도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화기잖아요 노으루 군!"
"그거 설마.. 되는 건 아니죠?"
"그럼요. 전화하면 저승에 연결돼서 망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답니다. 누구 불러줄까요? 쇼토쿠 태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아니면 엘비스 프레슬리?"
당연히 농담이었다.
"아니 뭐 그런 재수 옴 붙은 농담을 해요!"
"재수 옴 붙은 게 뭐에요?"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먼저 생각나는 건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동생과는 어젯밤에도 통화를 했었다.
최근에 통화를 못 한 녀석들이 있었다.
"오~ 웬일이야 권노을 전화를 다 하구!"
재호, 그리고 환희. 우리 비원더 멤버들이었다.
"별일 없지?"
"그냥 종일 곡만 쓰고 있지. 기대하라구! 완전히 박살을 내줄 테니까."
"바라던 바다."
틱틱대다 전화를 끊었다.
재호와 환희는 정말 온 힘을 다해서 곡을 쓰고 있었다. 목소리만을 통해서도 그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거는 일종의 협업이지만 대결이기도 했다.
나와 재호, 환희의 솔로곡이 모두 하나씩 실릴 것이다.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중 무엇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는 곡이 될까?
그게 내 곡이었으면 했다.
물론 앨범 전체의 구성이 깨질 정도로 튀면 안 됐다. 하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무조건 사람들의 반응을 최대한으로 낼 수 있는 곡을 쓰고 싶었다.
'다시 슈퍼스타 T 때의 느낌이 드는군.'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다시 녹음해 둔 미도리의 기타 연주 리프를 들었다. 그러면서 편곡을 고칠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 * *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된 후로, 우리의 여행은 한결 쾌적해졌다. 자가용 비행기니, 소인중이 풀어놓은 파파라치를 걱정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곡 작업을 해서 기본적인 틀은 모두 완성했다.
2일간 여정은 다음과 같았다.
그날 밤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실컷 공연을 봤다. 카지노에만 안 가면 라스베가스만큼 저렴하게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LA 교외의, 글로벌 비전 페스티벌 결승전 무대로 향했다.
* * *
결승전이 치뤄지는 공연장은 엄청나게 거대한 풋볼 필드였다. 체육관이긴 하지만, 웬만한 한국의 콘서트장의 다섯 배는 되어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주위였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들이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대체 뭐에요?"
내가 문루아에게 물었다. 문루아가 힐끗 보더니 말했다.
“텐트네요."
"아니 텐트인 건 알죠. 왜 캠핑을 하고 있죠?"
"저기서 공연 보려고요. 봐요, 다들 휴대용 TV 틀고 있죠?”
"아니, 어차피 TV로 볼 거면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보죠?"
"조금이라도 참가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요."
말문이 막힐 정도의 열정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위를 온통 둘러봐도 온통 천막이었다.
미국은 페스티벌의 국가임을 실감하며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뭔가 공기가 달라지는 수준이었다.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태양처럼 눈 부신 조명이 켜졌다. 팬들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마치 온 체육관이 울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쇼타임이었다.
* * *
낯이 익은 사람이 무대에 올라왔다. 나와 문루아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하필 저 자식이…”
사이먼 벅이었다.
금발에 갈색 턱수염, 근육질이지만 군살이 가득 붙은 몸까지, 틀림없는 그 녀석이었다. 거기에 부담스러운 가죽자켓, 카우보이모자까지 썼다. 차라리 말쑥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었던 클럽에서의 모습이 훨씬 잘 어울려 보였다.
카우보이모자에 어울리는 컨트리 음악 전주가 흘러나왔다.
내가 문루아에게 슬쩍 물었다.
"저 사람 원래 록커 아니에요? 웬 컨트리 음악을..."
"요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 컨트리 음악을 하나 봐요.”
"그럼 활동이 되나요?"
"한국으로 치면 나이 들어서 가수가 트로트 곡을 발표해서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는, 뭐 그런 거죠."
"으… 그건 별로네요."
"컨트리 싫어해요?"
"아뇨. 아주 좋아합니다.”
사실이었다. 좀 아저씨 같긴 하지만 트로트나 컨트리 같은 음악에도 그만의 맛이 있었다. 듣다 보면 뭔가 힐링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왜요?"
"그러니까, 저런 놈이 도망치듯 컨트리를 부르면 기분이 좋지 않네요. 가벼운 마음으로 추구해도 되는 싸구려 장르가 아닌데."
"보통 사람들은 노을 씨처럼 진지하게 장르를 고르지 않아요. 그냥 돈 될 거 같은 걸 하죠.”
"선배는요.”
"나요?"
문루아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사이먼 벅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노래였다. 호흡이 딸려서 나까지 불안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마약으로 망가진 몸뚱이에서 무슨 제대로 된 노래가 나오겠어.'
관중들도 환호는 했지만, 순전히 인지도에서 나오는 환호이지, 노래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사이먼 벅이 1절 후렴까지 부르더니 손을 촥 뻗어 무대 왼쪽 구석을 가리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애!드!리!아!나~!"
문루아가 깜짝 놀랐다.
"애드리아나? 그 애드리아나에요?”
우리와 슈퍼스타 T를 함께했던, 바로 그녀였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