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글로벌 비젼 콘테스트. 이제 미국 예선 파이널이잖아요!"
“아!"
애드리아나가 참여했던 그 대회였다.
애드리아나는 문루아와 나, 그리고 비원더 멤버들과 함께 '슈퍼스타 T' 오디션에 참여했었다. 사실은 실력으로는 우리와 함께 최후반까지 갔어야 했지만, 조작 논란에 휘말려 억울하게 탈락해버렸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상황을 깨닫고 난 뒤 부활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미 그사이에 애드리아나는 아는 언니들과 함께 팀을 구성, 글로벌 비젼 콘테스트 예선에 통과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결국 결승까지 갔다구요. 대박! 대단하지 않아요?"
"음… 저… 그..."
"왜 말을 못 해요?"
솔직히 물어보기 좀 쪽팔린 질문이 있어서였다.
"그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몰라요?"
문루아가 살짝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항상 쿨한 페이스인 문루아 기준으로 저 정도면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사실 저 음. 뭐랄까. 아주 자세히 보진 않아서."
"그렇게 노래를 좋아하면서요?"
"저는 알앤비, 흑인음악을 좋아하지. 솔직히 다른 음악은 별 관심 없거든요."
"그래서요?"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는 온갖 장르가 다 나오잖아요? 우승은 보통 밴드가 하고. 요새 조금씩 흑인음악 뮤지션도 우승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했어요."
"노래 월드컵이죠 뭐. 딱 그거에요. 우승자는 언제나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한다고 하니.."
"허..."
그러고 보니, 글로벌 비젼 콘테스트 우승자 노래는 나도 웬만하면 알았다. 그만큼 전 세계인의 화제가 되는 대회란 뜻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그중에서도 최강의 우승 후보죠. 사실 전체 우승의 절반을 독식했으니까요."
"뭐어… 팝 음악의 국가니까요."
실제로 미국과 영국이 매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곤 했다.
그 가장 유력한 강국인 미국에서, 애드리아나가 결승까지 올라간 셈이었다. 과연 굉장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설사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예선에서의 활약만으로도 미국에서 수준급의 가수로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애드리아나 응원하러 가는 거예요. 몰랐어요?"
"선배하고 배 실장님이 '그냥 우리한테 맡기고 시키는 대로 따라만 오라'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렇다고 설마 그 정도로 모를 줄은… 에휴."
그러면서 문루아가 이리저리 우쿨렐레를 뜯었다.
"자 이거다 싶으면 말해줘요.”
"네?"
"우쿨렐레로 이거저거 쳐볼 테니까. 괜찮은 구성 있으면 알려줘요."
그렇게 문루아의 연주를 이거저거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문루아는 내가 '이거요'라고 말하면 바로 그걸 수첩에 꼼꼼하게 적었다.
"이렇게 해서 곡이 나와요?"
“저는 이렇게 했어요. 보통 미도리랑 같이했지만. 지금은 미도리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놀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나 문루아는 경험이 많았다. 능숙하게 곡 기획을 시작했다. 이거저거 적으면서 내게 말했다.
"근데 가사는 생각한 거 있어요?"
"가사요? 그건 멜로디 나온 다음에 쓰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알기로 대부분 반주가 제일 먼저 나오고, 그다음이 멜로디였다. 마지막에 덧붙여지는 것이 가사였다.
문루아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디테일한 가사야 그렇겠지만. 곡 컨셉. 기획이 있어야죠. 뭐 대단한 게 아니라 키워드 하나라도. 뭐 없어요?”
"음… 딱히 생각한 건 없네요."
"에휴. 그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봐요."
그사이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배영웅이 우리를 불렀다. 어느새 그는 현지 직원과 함께 힘을 합쳐서 그럴듯한 바베큐 식사를 준비했다.
배영웅이 앞치마를 푸르며 말했다.
"바베큐입니다. 이거라면 문루아 님도 드실 수 있죠?"
문루아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둘이 싱긋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나지막이 물었다.
"뭐가… 오랜만인가요?"
배영웅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말씀을 안 드렸던가요. 제 첫 담당 아티스트가 문루아 님이었습니다."
문루아가 꼬치에 꽂혀 있는 바비큐를 접시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진짜 생고생하셨죠.”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배영웅은 평소의 쿨한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고생을 하셨나요?"
문루아가 대답했다.
"당시에는 TYB가 일본 진출 초기였어요. 회사도 처음 세웠고. 일본 법인 대표님도 신입에 가까웠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죠. 엉망진창이었어요. 그런데 짠! 하고 배 실장님이 나오신 거예요.”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죠.”
문루아는 신나게 배영웅과의 초기 활동 이야기를 했다. 정말 별의별 고생을 다 했었다. 신주쿠 길거리나 오사카 강가에서 20명 앞에서 라이브를 하지를 않나. 갑자기 1주일 만에 태국 콘서트를 해야 해서 어설픈 태국어로 모든 일정을 준비하질 않나. 천채왕이 가져온 북한 콘서트 참석을 위해 다급하게 법적 검토를 하질 않나. 가수고 매니저고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배영웅이 즐겁게 추억하며 말했다.
"그때는 즐거웠죠 그래도. 뭔가 회사가 커가는 느낌이었는데요. 지금도 회사는 커지고 있지만. 그래서 이전처럼 개인이 뭔가 해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는 어려워졌을지 몰라요."
"그래도 지금이 좋죠?"
“사실 지금은 비원더 덕에 그런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아하.”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비원더는 3인조 알앤비 보컬 그룹이었다. 이런 본격 보컬 그룹은 TYB에서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배영웅 입장에서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터였다.
‘그래서 배영웅 실장급에게 굳이 우리 같은 신인 가수를 맡긴 건가?’
뭔가 천채왕의 용병술이 무서워졌다.
그때 문루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들어가 볼게요."
"아.... 아직 사프란 라이스도 있고. 더 맛있는 거 많은데요!”
배영웅이 나를 눈빛으로 제지했다. 문루아가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문루아가 캠핑카로 들어가고, 모닥불 앞에 나와 배영웅만 남자 배영웅이 입을 열었다.
“문루아 님이 뭐라 말하셨는지 아시나요?”
"? 모르겠습니다."
“'배고파'에요."
“아…"
"문루아 님은 댄스 가수입니다. 게다가 원래 체형도 길쭉길쭉한 편이죠. 케이팝 댄스를 하려면 거의 발레리나 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해야 해요. 초인적인 다이어트를 매번 하고 있는 겁니다."
"아, 몰랐어요. 항상 티를 안 내셔서.”
그러고 보니 문루아가 샐러드 외에 무언가를 먹은 걸 본 적이 있던가? 거의 없던 거 같았다. 그나마 가끔 간하지 않은 조류, 혹은 생선이 전부였다. 오늘도 바베큐라고는 하지만 옥수수 등에는 손도 안 대고 야채와 고기만 조금 먹었을 뿐이었다.
"아마 TYB에 오신 후로… 10년 넘게 하루에 1천 칼로리를 넘기신 적이 없을 거예요."
“1천 칼로리!"
지금 나도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 편이지만 하루 1천 칼로리라니 무리였다. 급식 밥 한 끼 먹으면 금방 1천 칼로리였다.
정말 엄청나게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영웅이 우아하게 구워진 브로콜리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문루아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배고파'와 ‘죽겠어'였죠. 평소에 만성으로 밥을 못 먹으니까 ‘배고파'. 운동하고 무대 준비하면서 몸이 부서져라 운동하면서 '죽겠어'라고."
"구도자의 길 같군요…”
그러고 보니, 성당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던 문루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했다. 연애는커녕, 맛있는 음식, 탄산음료와 같은, 모든 이가 누리는 쾌락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무대 위의 수도승에 가까웠다.
“월드 클래스 가수가 되려면 그 정도의 결단은 필요하죠."
“'결단'이라. 사이먼 벅은 딱히 없어 보이던데요."
“하하! 날카로운 분석이시네요. 처음에는 열심히 했을 겁니다.”
아마 그 말이 맞을 터였다. 처음에는 누구나 열심히 한다. 이미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 그다음에는 뭔 짓을 해도 예뻐해 준다. 그때 인기에 취하면 사이먼 벅처럼 마약이나 여자에게 뿌리려 하는 놈으로 타락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랬겠죠. 저도 사이먼 벅 초창기 음악은 좀 좋아했거든요."
"대단했죠.”
"지금은 배도 나오고 목소리도 많이 무너졌지만.”
그 사이 배영웅은 식사를 끝냈다. 입을 닦으며 말했다.
"세계에 가수는 무수히 많아요. 그중에서 세계 최고급 가수? 각 장르에서 많아야 10명이죠."
"맞습니다."
사실 10명도 너무 많이 봐준 거였다. 알앤비를 좋아하는 내가 보기에, 한 시대에 한 장르에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가수는 기껏해야 3명이었다. 문루아는 분명히 세계 3위 안에 들었다.
그러려면 저 정도의 초인적인 자기희생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각오가 되어 있을까?'
* * *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도저히 시간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텐트에서 배영웅이 가져온 휴대용 TV를 틀었다.
마침, 채널을 돌려보니 '글로벌 비젼 콘테스트' 광고가 보였다. 애드리아나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수많은 가수들이 자기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솔직히, 해볼 만 해 보였다. 나보다 노래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나보다 유려한 면도 있었다. 미국 본토만이 느낄 수 있는 리듬감도 존재했다. 하지만 왠지 내가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나와 다른 점이 있을 거야.’
지금 나는 영어도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거기다 가창력도 S급, 누구랑 붙어도 자신이 있다 자부했다. 하지만 분명 나와 월드 스타들의 차이가 있을 터였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그 차이를 이번에는 공연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세계 최고 가수를 노리는 사람들과 내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 * *
다음 날 아침,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바깥 캠핑장 벤치에서 누군가 기타를 뜯고 있었다.
텐트 바깥에 나갔다. 낯익은 여성, 미도리였다. 그 옆에는 편한 츄리닝 차림의 문루아가 앉아 있었다.
"굿모닝~~”
미도리가 나를 보며 반가운 듯 눈으로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열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다. 다양한 주법으로, 별의별 코드를 다 짚고 있었다. 거의 프리 재즈에 가까운 화려한 연주였다. 싱긋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기타를 잡은 손의 움직임은 정말 격렬했다.
연주가 끝나자, 비로소 그녀가 내게 악수했다.
“반가워요 노으루 군!"
“지금 오신 거예요?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덴버에서 조금 자고 왔어요. 캠핑카는 안 맞아서요.”
미도리가 살짝 하품을 하며 말했다.
문루아가 말했다.
"미도리랑 작곡에 도움을 많이 줄 거에요. 연주자니까. 그래서 여행에 같이 오라고 제안했어요.”
"그렇군요…”
미도리가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노으루 군! 아직 가사 아이디어 없었다면서요! 그러면 안 돼요!”
"앗."
혼났다.
“기술은 제가 채워줄 수 있어요. 경험은 루아가 채워줄 거에요. 하지만 아이디어는 아무도 못 채워준다고요. 중심이 없으면 누가 채워주겠어요? 하다못해 후킹한 단어 한두 개라도 있어야 해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왜 미리 곡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었다.
'문루아 선배처럼 가수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참 너무 한가한 건가...'
그때, 뭔가 벼락처럼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말해 버렸다.
그 반응은….
"장.난.해.요? 안! 돼! 요!"
문루아는 정색했고,
"꺄하하하하핳! 대박 대박! 꼭 그거 해요!”
미도리는 깔깔 웃었다.
‘아니 이게 그렇게 황당한 아이디어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