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천채왕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천채왕은 공식적으로는 10인조 슈퍼 걸그룹 '해어지화' 제작에 전념 중이었다. 회사에서도 비원더의 정규앨범이 1분기 내에 최단기간에 준비해서 나올 예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생각이야.
TYB는 워낙 큰 회사였다. 직원도 많았고 거래처 및 외부인도 많았다. 소문이 빨리 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알기에. 천채왕은 마치 자신이 신인 제작자이던 시절처럼, 자신의 기획을 최소한의 사람에게만 알렸다.다 이를 통해서 소인중이 비원더의 일정을 알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되도록 우리끼리 앨범 작업을 하라는 거였군. 키미나 베이비 같은 TYB의 유명 스태프, 연예인들이 움직이면 더 눈에 띌 테니까.'
아마 그렇게 되면, 비원더가 '휴식 기간을 갖는구나'라는 소문이 회사에 퍼질 터였다.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싱어송라이터들이 성공적인 활동을 마치고 3~6개월 정도 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비원더는 2개 활동만 약속된 상태였으니 한숨 돌리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연막작전이었다. 사실 천채왕과 비원더 3인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더더욱 온 힘을 다해서 달릴 예정이었다. 심지어 팬들을 위해 싱글이 아니라 10곡 이상 꽉꽉 눌러 담은 정규앨범을 낼 계획이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 자기부터 속이자는 거지.
"그렇군요."
-그리고 혹시 몰라서, 나도 소인중 주변에 정보원을 좀 붙였어.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정보원이요?"
-나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여튼 몰라서 당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좋은 음악만 만들어주면 돼.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 되도록 대면 회의는 줄이고 통화로 이야기하지. 배영웅 매니저 말고 다른 직원에게는 가급적 보이지 말고.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배영웅 매니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와는 이야기가 된 내용인 모양이었다.
정보원이 있다고 하니 조금 더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내가 mp3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Mp3를 보면 볼수록, 중독성이 있었다. 사실 이 mp3에 기대는 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슈퍼스타는 이런 능력에 기대는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다른 능력은 그렇다 쳐도 미래의 기사를 읽는 능력이 걸렸다. 미래를 이미 알고 있으면, 그만큼 삶의 재미가 없었다.
당분간 mp3로 미래를 확인하는 일은 없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바로 그날 밤에 깨졌다.
* * *
[삐이 삐이 삐이 삐이~]
"뭐야!"
새벽 세 시쯤에 mp3에서 갑자기 엄청난 알람이 울렸다. 이전에 한 번 들어 본 소리였다.
'경고 메시지.'
이 정도의 큰 경고 메시지는 사람의 목숨이 걸릴 때만 울렸다. 이번에도 아마 마찬가지일 터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mp3를 확인했다.
* * *
[경고]
노자경 씨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앞으로 60분 후 스스로 생명을 끊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확인하세요.
* * *
이전에, 문루아 선배의 부모님이 위독하셨을 때 처음 봤던 바로 그 경고 메시지와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사유가 달랐다. 자살이었다.
노자경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잇츠쇼타임의 4인 멤버 중, 유독 존재감이 없던 멤버의 이름이었다. 짧은 흑발에, 딱히 잘생기지도 않았다. 목소리 또한 안정감은 있었지만, 뭔가 애매했다. 그나마 185 정도 되는 키가 재산이었지만 그 외에는 존재감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살이라니, 너무 황당했다. 비원더와 달리 잇츠쇼타임은 숙소 생활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4인이나 되는 팀에서 한 명이 새벽에 단독 행동으로 자살을 할 수 있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은 가봐야 했다. 잇츠쇼타임이 잘되는 걸 별로 바라진 않지만,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다면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다행히 아예 늦은 새벽 시간이 되어 택시가 좀 잡혔다. 택시를 타고 바로 mp3에서 알려준 주소로 갔다. 성수동 모처의 빌딩이었다.
빌딩의 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옥상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다.
여기서 오늘, 2006년 1월 15일 새벽 4시 23분에 노자경은 스스로 생을 마감할 예정이었다. 옥상 빌딩에 유서를 두고는 그대로 허공에 몸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하필 엘리베이터도 없어 옥상으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헉헉! 헉헉!"
체력을 나름 댄스그룹 멤버만큼 올려 뒀음에도 10층짜리 꼬마 빌딩을 한 호흡에 오르는 건 쉽지 않았다. 사람 생명이 걸려 있다 생각하니 더 다급해졌다.
10분이 어느새 3분으로 줄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옥상이 보였다. 철문이 잠겨 있었다.
'제길!'
별수 없이 문을 마구 두드렸다. 쾅쾅 소리가 빌딩을 울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급하게 옆을 쳐다봤다.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을 더 세게 두드리는 걸로는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온 동네 떠나가라 이름을 불렀다.
“노자경! 멈춰!"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반응이 좀 있었다.
덜컹하는 소리가 철컥으로 바뀌었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눈물이 가득 덮인 노자경의 얼굴이 보였다.
"히익! 누… 누구?”
노자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문을 두드렸을 때 한번 놀랐고, 그 사람이 나란 걸 확인했을 때 또 한 번 더 놀란 모양이었다.
“잇츠쇼타임 노자경 씨죠? 왜 이런 짓을 하려는 겁니까?”
* * *
노자경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심호흡을 하게 두었다. 그러자 간신히 좀 진정이 되었다. 진정한 뒤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인중이 제작한 그룹, 잇츠쇼타임의 분위기는 굉장히 차가웠다. 멤버들 인기를 매일마다 계산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멤버들을 끊임없이 경쟁시켰다. 차별 대우는 기본이었다. 조금만 소인중 말을 거스르면 바로 추위에 벌벌 떨며 거실 마룻바닥에서 자야 했다.
최고 인기 멤버인 엔젤은 언제나 호텔 스위트룸급의 대우를 해줬고 말이다.
인기뿐 아니라 노래 실력, 예능…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잔혹하게 멤버들을 몰아붙이다 보니 점점 영혼이 좀먹어졌고. 결국 이런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게 된 걸로 보였다. 지금도 판매량 기여도가 제일 낮다고 숙소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아무리 해도 순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자 패닉 상태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빌딩 옥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냥 회사 그만두면 되잖아요?”
‘굳이 죽을 필요는 없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노자경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는데..."
"했는데?"
"부모님이… 그래도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저, 너무 무서워져서. 저도 모르게.”
그리고 다시 노자경은 엉엉 울어 버렸다.
"으이그.”
겉보기에 회사 사장인 소인중이 워낙 스펙이 좋다 보니, 그냥 꾹 참고 다니라고 부모님이 말한 모양이었다. 의도는 좋았겠지만, 자녀를 코너로 내모는 행위였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새로 시작하면 되죠."
노자경이 훌쩍이며 말했다.
“저 같은 놈이, 뭐라도 할 수 있을까요?"
“노자경 씨가 뭐 어때서요?"
“저, 노래도 못하고. 얼굴도 어정쩡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일단 키 크잖아요. 얼굴 멀끔하고. 원래 댄스 가수 하려고 한 거죠? 딱 보면 알겠네요."
“네... 네."
그러니까 노래는 뭔가 좀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노자경 잘못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자경에게는 다른 능력이 많았다.
"세상일에도 관심 많아서 매일 신문 보죠? 춤도 잘 추고? 안무도 막 만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 그걸 어떻게… 혹시 당신! 스토커?"
"미쳤어요?”
스토커 따위가 아니었다. 미래를 봤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보컬 그룹 멤버라고 해서 헷갈렸다. 얼굴을 직접 보고 확인한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던 그 노자경이 맞았다.
노자경. TYB의 전설의 안무가. 수많은 가수의 곡을 만들어준 뛰어난 인재였다. 안무뿐 아니라 무대 연출에도 재능이 있어 TYB 엔터의 무대를 도맡아 했었다. 미래의 이야기다.
그가 원래 가수로 데뷔해서 실패했었다고는 들었는데… 왜 갑자기 자살 소동을 일으키는 걸로 운명이 바뀌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원래 죽지 않고 승승장구할 운명이던 이들이 내가 회귀하며 바꾼 현재로 인해 죽게 되어 알람이 울렸는지도 몰랐다.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이 사람이 허무하게 인생을 끝내는 일은 막아야 했다. 재능 이전에,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인생이었다.
“자! 여튼. 당신 스태프 일 해보면 어때요? 무대 연출이라던가… 안무가라던가...”
“스태프를 하라 해도… 갑자기 누가 시켜 주나요."
노자경이 안경을 옷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제 울음은 그쳤다. 많이 안정감을 찾은 듯했다.
“마침 이분이 스태프 뽑고 싶다 했어요.”
노트에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그곳에는 오창선 선배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이건?"
“오창선. 가수 오창선 씨 연락처에요. 라이브 공연 유명한 거 알죠? 거기서 공연 스태프 신입 뽑는다고 하니까 연락해 봐요. 이 형, 춤 무지하게 못 추는데 춤 욕심 있으니까 잘 좀 가르쳐줘요. 제 소개로 왔다 하면 잘해줄 거에요.”
“아…"
“포기하지 말고. 당신, 무조건 잘 될 거니까."
“..."
노자경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힘이 없어요? 같이 오창선 선배한테 가줘요?”
"아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나 싶어서…"
"사람 도와주는 데 이유가 필요해요?”
‘게다가 당신, 세계적인 무대 연출가가 될 거야. 그럼 내 무대는 당신이 연출 해주는 거야. 미리 찜해놓은 셈이지.'
물론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 정말 좋으신 분이시네요, 하지만. 하지만.”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예전에 이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지금 노자경은 심각한 '인간 불신' 상태였다. 워낙 나쁜 놈들에게 당하다 보니 남의 호의를 순수하게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내 조금 이기적인 의도를 적당히 보여주면 어떨까? 그걸로 되려 경계심이 풀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
“만약 잘 나가면, 제 무대 꼭 도와주세요. 아무 조건 없이. 이건 이제 내가 당신 믿고 투자하는 겁니다. 됐죠?"
내 말을 듣더니 노자경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꼭, 해낼게요!"
노자경은 고개를 90도로 굽히고 인사하더니 성큼성큼 떠났다. 뭔가 걷는 뒷모습이 조금 힘차 보였다.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았다. 일단은 그걸로도 충분히 뿌듯했다. 내가 뿌린 씨앗을 미래에 거둘 생각을 하면 심지어 마음도 든든했다.
이제는, 당장 내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끌 차례였다.
* * *
당장 비원더 앨범에 들어갈 내 곡을 구해야 했다. 그것도 바쁘디바쁜 월드 스타인 문루아 선배에게 말이다.
노자경을 구하느라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문루아 선배와 약속 장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회사 내부 커피숍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좋은 아침~”
“그래요. 아, 말 끊어서 미안해요. 요즘 너무 피곤해서…"
딱 보니 엄청나게 피곤해 보였다. 그럴만했다. 문루아는 ‘슈퍼스타 T'에서 준우승하고, 가요 대상까지 탈 정도로 큰 인기였다. 그야말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쉬지도 못하고 몇 개월째 활동 중이었다.
내가 직접 곡을 달라고 물어보기도 미안했다. 하지만 일단 물어보기 위해 약속까지 잡은 이상, 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뭐에요 용건이?"
“아.”
“부탁할 게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 같은데요? 딱 표정 보니까 알겠어요. 뭐에요?"
문루아가 살짝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뭔가 좀 윤활유를 치고 들어가려 했지만 문루아는 역시나 눈치가 빨랐다. 바로 내 의도를 눈치챘다.
나는 간단하게 내 요청을 말했다. 우리가 직접 앨범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만 곡을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솔로곡은 항상 함께 작업하는 재호나 환희가 아닌 다른 작곡가에게 곡을 받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저를?”
“네. 루아 선배는 저를 잘 알고, 곡도 잘 쓰시니까요.”
“푸훗."
"왜 웃으시죠?"
"엉뚱하잖아요. 보통 저 같은 댄스 가수에게 곡을 달라고 하나요?"
“지난번 곡도 직접 쓰셨잖아요.”
“저는 작곡가가 아니라구요. 제 곡만 쓴 거죠. 그것도 전문가 도움을 잔뜩 받아서.”
“그래도 꼭 선배 곡을 받고 싶습니다.”
문루아는 재호와 환희를 제외하면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작곡가였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있었다. 꼭 곡을 받고 싶었다.
“음..."
문루아는 잠시 고민했다. 문루아는 단호한 성격이었다. 고민할 정도면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할 수 있다면, 문루아는 해줄 터였다.
“좋아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문루아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근데 그럼 같이 미국에 가야 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