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문루아 선배보고 곡을 써달라고 하겠다구?"
재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실 생각해보면 간단한 해답이었다. 작사 작곡이 되는 사람들 중, 재호와 환희 외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문루아뿐이었다.
문루아는 실제로 곡을 쓰는 송라이터였다. 작사와 멜로디는 직접 만드는 걸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TYB 직원들과 함께 협업해서 편곡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내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재호와 환희에게는 좀 황당한 선택인 모양이었다.
환희가 쯧쯧거리며 말했다.
“횽. 아시아의 달 문루아라구요. 그런 시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작년에 대상까지 타면서 완전히 다시 대세가 됐는데. 얼마나 바쁘게써여?"
재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당연히 거절 당할 거야."
웬만하면 재호와 환희는 내 음악적인 제안은 다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는 편이었다. 이번 제안만은 정말 유독 황당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둘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니 솔직히 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 말도 자연스럽게 퉁명스럽게 되었다.
"뭐 안 된다고 죽는 거 아니니까 한번 이야기해 보지 뭐."
그때, 우리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동생이 슬쩍 입을 열었다.
“오빠들 진짜 언니 모르는구나."
내가 물었다.
“언니? 루아 선배 말하는 거야?"
"그래."
"왜?"
“언니는 당연히 해주겠지."
"당연히? 왜?”
동생이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튕겼다. 튕긴 손가락은 내 이마에 명중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아야!"
"그건 알아서 생각해. 바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투덜거리면서 일단 문루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통화로 부탁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부탁할 것이 있다고 운을 뗐다. 내 제안을 들은 문루아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차분히 대답했다.
-내일 오후 3시에 잠깐 시간 있어요. 회사 3층 카페서 잠깐 봐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었다.
다행히 그렇게 바쁜 문루아도, 회사는 가야 했다. 같은 기획사다 보니 잠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틈에 이야기하면 일단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뭔가 루아 선배 기분이 좋았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 * *
그날 밤에는 방송사에 출근했다. 당분간 마지막 일정이었다. 비원더 활동이 아닌 단독 활동이었다.
이번 활동에서 내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 스케쥴이 되는 셈이었다.
다만, 내 단독 스케쥴이지만 썩 기분 좋은 스케쥴은 아니었다. 내가 딱히 되게 좋은 팀플레이여서 개별활동이 좋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비원더는 개인 활동도 장려하기로 이미 멤버들끼리 합의한 상태였다.
스케쥴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의 스케쥴은 당대 최고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라디오 극락'이었다. 12시부터 하는 방송임에도 이례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라디오 극락에 나오면 대세가 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2006년은 아직 라디오의 힘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DJ도 썩 마음에 들었다. 오디션 프로 심사위원이었던 넵튠 한이었다. 심지어 같은 기획사 선배였다. 내게는 일종의 친정인 셈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문제는 '누구와 함께 출연하느냐'였다.
‘...하필 저놈이랑 같이 섭외가 되다니.'
오늘 나와 함께 출연하는 사람은, 잇츠쇼타임의 앤젤이었다.
정말 엄청나게 불편했다. 앤젤은 방송 10분 전인데 대본은 안 보고 뚫어져라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도 안 깜박이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슬쩍 넵튠 한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제법 재미있는 기획이네요. 팀이 아니라 잇츠쇼타임과 비원더의 메인 보컬 둘만 초대하다니."
앤젤이 꾸며낸 예의 바른 표정으로 넵튠 한에게 말했다.
“저도 좀 당황스럽더라구요."
나와 단둘이 있을 때의 오만한 말투와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어딘가 어색하긴 했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예의를 지켰다.
넵튠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비원더와 잇츠쇼타임의 라이벌리가 워낙 화제잖아요? 데뷔 시기도 비슷하고. 장르도 닮았고. 그래서 일부러 메인 작가님이 기획해봤어요. 둘이 사실 초면도 아니니까.”
그랬다. 초면이 아니었다. 나도 mp3로 확인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바로 알았어야 했다. 아무리 금발로 염색을 했어도, ‘앤젤'이라는 이름이 본명일 이는 없었다.
그의 본명은 '한승록'이었다. 본명을 들으니 비로소 사람이 기억이 났다. 내가 데뷔했던 오디션 슈퍼스타 T 오디션 당시, 라이브 스테이지까지 갔다가 조작 논란 때 하차했다. 소속 회사 이사가 이윤강 PD를 접대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였다.
결과적으로 법정에서는 이윤강 PD와의 관련점을 찾지는 못하고 있어서 그 이사는 무죄로 풀려났다 들었다. 그 이후 한승록은 소인중 회사로 이적해서 재데뷔한 모양이었다.
“네. 저는 오디션에서 거의 말씀도 못 나눠 봤지만요."
앤젤이 살짝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오 드디어 대갈토… 아니, 머릿속에서 기억이 나셨나 보네. 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말투였다.
“슈퍼스타 T에서는 아쉬웠습니다. 분명히 더 보여주실 게 많아 보였는데. 회사 일이 꼬여서."
“아무도 안 도와주더라고요. 하하. 마치 조작한 방송처럼. 아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농담!”
전혀 농담같이 들리지 않았다.
사실, 앤젤이 한승록이란 사실을 알고 나자, 이해가 쉬워졌다. 저 녀석의 입장에서는 오디션 탈락이 억울했을 것이다.
사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조작 의혹을 아예 뿌리 뽑기 위해 좀 과한 조치를 취하긴 했다. 이윤강 PD가 진짜 조작을 했던 기획사 가수도 있었지만, 단순하게 직원들과 같이 술만 마셨던 회사의 소속 가수들까지도 모두 탈락 처리되었다.
그 애매한 회색 지대에서 희생당했던 게 한승록이었다. 사실 좀 억울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회사만 옮겨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우연히' 슈퍼스타 T의 TOP4 중 3명이 소속된 가수와 비슷한 컨셉으로 말이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일부러 복수를 위해서 의기투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한승록이 '비원더는 원래 4명이라 그랬던 거였어.'
비원더는 원래 4명이란 말은 그런 뜻이었다. 한승록은 그 사건만 아니었으면 자신도 '비원더'의 일원이 됐을 거라고 넌지시 항의했던 것이다.
솔직히,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이전 생에서 조작으로 준우승에 머물렀었다. 정말 억울한 기분이었다.
한승록은 내가 조작 논란을 바로잡은 덕분에 생방송 무대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이지 못하고 조기 탈락했다. 충분히 그 녀석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 녀석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한 녀석이었다.
* * *
정신없이 방송이 종료되었다. 이번 라디오 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서로 곡 바꿔 부르기 대결이었다. 나는 잇츠 쇼타임의 노래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수록곡, '웨딩 칸타타'를 불렀다. 무슨 바흐의 음악 같은 제목이었지만 그건 이름뿐이고, 잔잔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미디엄 템포 팝 곡이었다.
한승록, 아니 앤젤은 그에 반해 화끈하게 우리의 첫 타이틀곡 '남녀본색'을 불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은 노래였다. 나는 일부러 절제하고 목소리로 승부했다. 앤젤은 그와 반대로 본인 스타일대로 화려한 테크닉과 과할 정도로 극단적인 감정으로 승부했다.
앤젤도 앤젤만의 맛이 있었다. 나는 내 노래가 솔직히 더 좋았지만.
녹화가 끝나고, 대기실에서 이례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넵튠 선배가 먼저 인사했다.
"다들 수고했어."
얼른 내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앤젤도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넵."
이후 긴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풀어줄 겸 넵튠이 말했다.
"승록이 머리 멋있다. 이미지 변신 좋은데? 노을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앤젤이 차갑게 말했다.
"이제 앤젤이라고 불러 주세요. 활동명이니까요."
“아, 그래그래."
넵튠 한이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로 대충 가시 돋친 앤젤의 말을 넘겼다. 적당한 입지의 선배라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지만, 넵튠 한은 아시아 최대 대형 가수 중 하나였다. 역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내가 분위기를 조금 따뜻하게 할 겸 말을 이었다.
"저도 선배랑 같은 생각이에요. 솔직히, 슈퍼스타 T에서는 승록 님 외모는 전혀 기억이 안 났는데. 지금은 아니네요. 굉장히 강렬해요."
앤젤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거 칭찬인가요?"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앤젤의 불안정한 감정에 나까지 휩쓸릴 필요 없었다.
"그럼요. 연예인인데 기억에 남아야죠."
"본인은 좀 꾸미면 좋을 거 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TYB인데, 데뷔 전과 후가 똑같아서 되겠어요?"
'지금 내 얼굴이 어때서? 꾸안꾸 몰라? 아, 지금 2005년이지. 알 리가 없군.'
앤젤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뭐 그렇게 대충해도 회사빨로 우리보다 가요 순위 높게 나오니 그럴 만도."
그 말에 이제까지 웃음을 유지하던 넵튠 한의 표정이 바뀌었다.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친구? 선은 넘지 말자 우리. 먼저 데뷔한 게 무슨 벼슬도 아니고. 선배 대접하라는 건 아니지만 인간끼리 예의는 좀 지키자고.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장난질 한 곳이 어딘지 너도 알잖아?"
순간 넵튠 한은 마치 복싱선수와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진짜 한 대 칠 것 같은 살기였다. 앤젤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사과드립니다. 여튼 비원더. 지금 실컷 웃는 게 좋아요. 곧 저희가 엄청난 스케일의 정규를 낼 거니까. 해외 제작진에 피처링에… 글로벌한 앨범이 될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걸? 요?"
앤젤은 자기 할 말만 쏘아붙여 놓고는 우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넵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가 저 친구 뺨이라도 때렸어요? 왜 저리 빈정대."
대충 저 녀석의 억울 포인트가 무엇인지는 느껴졌지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거 같기도 했다. 일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 *
활동이 끝나자 배영웅이 집으로 직접 데려다주었다. 배영웅이 모는 볼보 차량이 이제는 집만큼 편했다. 앨리시아 키스의 데뷔 앨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배영웅 매니저에게 앤젤이 했던 말을 알려주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기 활동 계획을 경쟁자에게 말하다니 조심성 부족한 분이네요. 저희야 환영이지만요."
"그렇죠? 이건 선생님에게 말씀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네 뭐 직접 지금 이야기하시죠? 저도 옆에서 듣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걸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전화를 하지만 왠지 천채왕은 이미 잇츠쇼타임의 활동을 알고 있을 거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 사이 천채왕이 전화를 받았다.
-어 노을아.
"선생님.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 넌 평생 전화해도 돼. 회사 나가도 전화해도 돼.
"아 저.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잠깐 가능해. 10분 후에 신인 걸그룹 런칭 회의가 있어서.
‘해어지화'였던가? TYB의 신규 걸그룹이 곧 나올 예정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알고 있었다. 2020년까지도 가요계를 호령하는 역대급 걸그룹이었다. 새삼 천채왕이 얼마나 엄청난 기획자인지가 실감났다.
"저, 그럼 사양하지 않고… 사실 제가 방금 전에 잇츠쇼타임 메인 보컬 앤젤과 함께 라디오 출연을 했습니다."
-아 한승록 군? 그래. 그래서?
역시나 천채왕은 앤젤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 그분. 그분이 곧 잇츠쇼타임이 매머드급 정규 앨범을 낼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 알고 있어. 대책도 세워 놓았지.
'역시나, 천채왕은 계획이 다 있구나.'
내 예상대로 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