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96화 (96/280)

제96화

정규앨범.

대부분의 가수 지망생에게는 꿈만 같은 이름이었다.

이전 생에서 2020년을 경험했기에 알고 있었다. 2020년쯤 되면 기술의 발달로 정규앨범을 만드는 것도 제법 쉬워졌다. 하지만 그건 2005년 현재는 요원한 일이었다.

2005년만 해도 앨범 만들기는 제법 돈이 들었다. 특히 발라드라면 더더욱 그랬다. 오케스트라라도 들어간다면 그 비용은 폭등했다. 방송 홍보도 해야 했기에 마케팅 비용도 크게 들었다. 한 명의 가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기본적으로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TYB 엔터테인먼트의 이번 행보는 놀라웠다. 풀 렝쓰 앨범을 내준다니,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투자였다. 우리와 정식 계약이 곧 끝이었는데 말이다.

천채왕이 웃으며 말했다.

"뭘 놀래? 음악방송 2위 한 팀인데. 정규앨범 정도는 나와 줘야지."

환희는 씰룩 씰룩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재호는 얼음처럼 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둘 다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둘은 곡을 쓰고, 편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자기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다룰 수 있는 정규앨범이 정말 고픈 친구들이라는 뜻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사실 그런 배고픔은 좀 덜했다. 노래를 10곡 한다는 건 좋았다. 하지만 내게는 앨범 프로듀싱보다는 노래가 더 소중했다. 차라리 공연이 더 내게는 소중한 목표였다. 나에게 앨범은 공연을 하고 팬을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에 더 가까웠다.

다만,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려면 좋은 곡이 많이 필요했다. 정규앨범은 그 좋은 곡을 잔뜩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앨범 제작은 내게도 좋은 반환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야 했다.

"저희는 아직 계약도 연장이 안 됐는데 정규앨범을 내주시다니..."

"여지껏 너희들이 하는 행동을 볼 때, 재계약을 안 할 리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 당장 우리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장기적인 매뉴얼을 만든다며? 그건 나도 5년 차부터나 했던 건데."

공연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피드백을 정리하는 일 이야기였다. 확실히,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벌렸다. 이미 TYB의 스태프와의 협업이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TYB 분들이 너무 일을 잘하시더라고요."

"고맙네. 그러니까 더 일을 많이 같이하면 자연스럽게 재계약 확률도 높아지겠지. 그런 의미야."

사실 천채왕은 아직 우리에 대한 의심도 남아있을 터였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말을 대놓고 우리에게 하고 있다 보는 게 맞았다. 의심은 감추는 대신 믿음은 대놓고 보여 주었다. 이게 천채왕 특유의 운영 방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비원더 입장에서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재호가 내게 강하게 항의한 이후, 우리 3인은 항상 회사 관련해서 수시로 의견을 나눴다. 다들 TYB라는 회사에 만족도가 컸다. 특히 지상파 보이콧이라는 역대급 위기를 겪으면서, 이를 해결하는 TYB의 모습에 나를 포함 멤버 모두가 신뢰감을 느꼈다. 특히 실제로 당시 한창 방송사 1위를 쓸어 담았던 문루아까지 방송사 보이콧에 투입할 예정이었다는 점이 더욱 믿음을 가지게 했다.

거기다가 TYB는 아티스트에게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되려 너무 퍼주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투자했다. 신인 인 데다가 계약이 곧 끝나는 팀인 비원더에게, 우리가 요청도 하지 않은 '정규앨범' 제안을 하는 지금 일도 그 과투자의 좋은 예시였다.

이렇게 소속 가수에게 대우가 좋은 회사는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찾기 어려울 터였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TYB로 정해졌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천채왕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럼 앨범 이야기를 해볼까? 배 실장님. 식사 준비해주세요."

"네넵."

배영웅이 어딘가 연락을 하자 쉐프가 식사를 들고 왔다. TYB 사옥의 식사 또한 훌륭한 회사 복지 중 하나였다. 모든 메뉴가 하나같이 맛있었다. 오늘의 메뉴도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풍성한 샐러드를 곁들인 꼬치구이였다. 신선한 재료들을 꼬치로 꿰서 갓 구워낸 일품요리였다. 요리를 먹으면서 천채왕이 앨범 이야기를 시작했다.

"TYB의 조건은 딱 둘이야. 첫 번째. 곡은 우리들도 수급해오겠지만 그 전에 '앨범 전체 서사'를 너희들이 만들어볼 것."

환희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서사를 저희가여?"

"그래. 환희 너는 가사를 쓰니까 전체의 이야기를. 재호는 편곡을 하니까 전체 사운드의 컨셉과 흐름을 대충이라도 만들어보면 좋겠어. 어떤 장르의 음악을 쓸지, 어떤 정서의 가사를 붙일지. 그리고 그 흐름이 어떨지를 나와 같이 짜보자는 이야기야. 결국 마무리는 내가 하겠지만 처음 시작은 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거야."

재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저희가 선생님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한다고요? 그건 좀… 그렇지 않나요? 저희는 아직 신인인데 선생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요."

"그럼 뻔한 앨범이 나오지. 그러려면 굳이 TYB가 비원더에 투자할 이유가 없어."

일리가 있었다. 이미 TYB에도 '천군신단' 멤버들의 솔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발라드 프로젝트들이 존재했다. 천채왕이 다시금 주도적으로 프로듀싱 한다면 그들과 비슷해질 위험이 있었다. 발라드는 댄스보다 더 뻔해지기 쉬운 장르였으니 더욱 문제였다.

"싱어송라이터 그룹인 비원더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TYB가 최대한 이끌어내서, 최고의 품질로 청자들에게 전달할 생각이야."

재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말에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바랬던 일이었겠지만, 막상 실현이 되니 고민거리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곡을 안 쓰니까 별 과제는 없겠네. 주는 곡을 잘 소화하면 되니까 당분간은 좀 여유가 있으려나?'

마치 내가 잠깐 나태해진 걸 눈빛으로 눈치챈 것처럼 천채왕이 내게 말을 걸었다.

"노을이 너도 과제가 있다."

"저도요?"

"이번 앨범, 각 멤버의 솔로곡을 하나씩 수록했으면 좋겠어."

"아!"

그 말인즉슨…

"재호랑 환희야 곡을 쓰니까 작업이 좀 수월할 텐데. 너는 보컬리스트니까 좀 어려울 거야. 곡은 우리가 구해줄 수 있으니까. 어떤 스타일의 곡이나 어떤 작곡가랑 작업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봐."

그랬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스로 내 솔로곡을 기획해야 했다.

사실 솔로곡은 환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이끌어서 온전히 완곡 하는 재미가 분명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솔로 앨범도 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솔로곡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몰랐다. 사실, 비원더는 재호와 환희가 내부에서 완벽하게 곡 작업을 끝낼 수 있는 시스템이라 좀 방심한 측면도 있었다. 나는 곡 작업에 굳이 참여할 이유가 크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오디션 프로의 커버곡이 아닌, 내 이름으로 나오는 첫 정식 오리지널 음원이었다. 허투루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었다. 정말 좋은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 * *

내 고민과는 상관없이, 비원더의 앨범 제작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비원더 3인이 내 집에 모여 앨범 기획 마라톤 회의를 시작했다. 여기라면 배영웅 매니저도 안심하고 우리끼리 내버려 둘 수 있었다. 우리 셋도 내 집에서 모이는 게 제일 편했다. 자연스레 우리 집 거실이 비원더의 회의실이 되었다.

재호는 나와 함께 빌보드에 있는 음악을 싸그리 확인해서 분류, 정리했다. 그리고 그 중,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음악들만 추려 보았다.

그 결과물은 좀 뻔하게도, 최신 경향의 알앤비 음악이었다. 그중에서도 뭔가 힙합 느낌이 강하게 밴 리듬에, 북유럽 느낌이 나는 풍성한 신시사이저 멜로디를 가미한 사운드를 추구해보기로 했다. 미국에서 이제 막 조금씩 유행이 시작된 스타일의 음악이었고 앞으로 2~3년간은 빌보드와 한국 차트를 지배할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미래를 아는 내가 봐도 충분히 먹힐 법한 방식의 음악이었다.

앨범 전체의 서사도 착착 진행되었다. 환희가 일종의 영화 시놉시스와 비슷한 이야기를 짜 왔다.

"대학교 친구가 둘 이써요. 근데 이 둘이 사실 온라인 동호회에서 단짝인 거져. 현실에서 둘은 그냥 남매 같은 친구인데, 온라인 동호회에서 눈이 맞아여.”

"온라인 동호회인데 눈이 어떻게 맞냐?"

"아 걍 말이 그렇다는 거져! 여튼. 그래서 오프라인에서 만나려고 하는데, 약속 장소에서 남자가 먼저 여자가 자기 친구란 걸 알아차리고 도망쳐 버려요."

재호가 혀를 차며 말을 보탰다.

"쓰레기네."

"너무 당황해서 도망갔나 보죠! 좋아하는 감정이 너무 크니까! 여튼. 그다음에는 남주가 서서히 친구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고. 마지막에는 둘이 이어지게 된다, 그런 이야기에여. 남자 시선에서 로코 느낌으로 짜봐써여."

내가 시놉시스를 읽으며 말했다.

"여자가 아프니까 따끈한 수프를 들고 기숙사 앞으로 간다… 이건 제법 괜찮은 설정 같네. 가슴 아픈 발라드도 있고. 기존 타이틀곡 '남녀본색'과도 딱 어울리는 서사 파트가 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환희는 굉장히 뛰어난 작가였다. 별거 아닌, 로코 드라마에서 어딘가 많이 본 설정인데도 환희가 적으니 뭔가 보고 싶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대로 진행되는 앨범이라면 나도 듣고 싶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갑자기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밥 먹고 해요~~"

동생이 피자와 콜라를 들고 왔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밤 8시였다. 다섯 시간 넘게 회의를 하다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괜히 동생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하러 먹을 거 사 왔어. 편하게 혼자 먹고 오지."

"내가 이거 먹고 싶어서 사 왔어. 돈 줘."

"아."

사실상 강탈당하듯 돈을 줬다.

"가아암사합니다아~,"

겉으로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동생에게 용돈을 주는 기분이 이렇게 째질 수가 없었다.

이전 생에서, 가난한 가수 지망생이었던 나는 피자 한 판 사줄 돈이 없었다. 그러던 놈이 이제는 어엿한 가요 프로그램 2위를 해본 가수가 돼서 동생에게 웬만한 물건은 척척 사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학기 등록금도 가뿐했다.

이것만 해도 대박 확실한 행복. 대확행이었다.

'아 그런 말은 없나? 어쨌든.'

피자를 씹어 먹으면서도 재호와 환희는 계속 앨범에 대해 논의했다.

환희가 먼저 우물거리며 재호에게 말했다.

"횽 이번에도 실내악 편곡 가능하게써여? 현악 4중주 정도 규모에 클래식 기타, 잼베랑 쉐이커 정도의 소규모 구성으로요."

재호가 눈을 감고 대답했다. 환희의 질문이 실현 가능한지 그 여부를 따져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해본 적 없는데. 그래도 잼베랑 쉐이커가 있으면 드럼 역할을 해줄 수 있으니까 쉽지. 그래도 어렵다구. 왜?"

"제 솔로를 그런 편곡 방향으로 해보고 시퍼서여.”

“약간 맥스웰의 MTV 라이브 앨범 같은 간지로?"

"그죠 그죠!"

재호랑 환희와 앨범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었다. 이 둘은 정말 음악에 미친 놈들이었다. 앨범 작업을 일단 시작하자, 정말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작곡과 편곡, 그리고 가사만 생각했다. 창작에 대한 집중력에 감탄만 나올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확실히 노래를 부르는 데는 흥미가 있었지만 음악을 만드는 데는 그 정도의 전문적인 강도의 재능이나 관심은 없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재호가 불쑥 내게 물었다.

"아 노을이 너는 혹시, 정했어? 솔로곡 누구한테 부탁할지?"

"정했지."

딱 한사람밖에 없었다. 나를 잘 이해하고, 재호나 환희 못지않게 음악 만드는 일에 미쳐있는 사람이 딱 하나 지구상에 한 명 더 존재했다.

“문루아 선배에게 부탁하려구.”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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