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5일 후, '도전 5천 곡' 방영 날.
첫 방송이니만큼 셋이 모여서 함께 방송을 보기로 했다. 재호랑 하늘이는 죽어도 자기 집에서는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모였다.
동생한테 좀 미안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말이었다.
슬쩍 동생을 봤다. 동생은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TV 앞 밥상을 닦고 있었다.
내가 핀잔을 줬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냐?"
“오빠가 뭔 상관이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는데 생글생글 웃으니까 웃겨서."
"웃기시네. 오빠야 오후까지 처자니까 꼭두새벽이지."
“너는 안 그래?”
“내가 오빠랑 같냐? 난 맨날 평일이랑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거든?”
하긴, 그러고 보니 나는 일주일에 딱 한 번, 일요일에만 mp3고 뭐고 다 풀어헤치고 늘어질 때까지 잤다. 보통 일어나면 빨라야 12시였다.
"그래서 뭐가 그리 좋아."
"맨날 나 혼자 시리얼이나 먹다가 시끌시끌하니까 좋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작 주인인 나와 동생은 가만히 있었고, 손님들이 열심이었다. 환희는 흥얼흥얼 치즈와 크래커를 그릇에 담고 있었고, 재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둘 다, 이제 자주 우리 집에서 모이다 보니 마치 자기 집에서 모이는 듯 편안해 보였다.
뭔가, 가족이 둘 늘어난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때 동생이 모두를 불렀다.
"오빠들! 방송 시작해요.”
환희와 재호가 밥상에 앉았다. 샐러드와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치즈와 크래커가 놓였다.
언제나처럼 재호의 요리는 감탄이 나왔다. 내 입에서 저절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레스토랑 파스타 같은 맛이 나냐?"
“셀러리를 넣었어.”
"그러면 이 맛이 나냐?"
"갈은 소고기랑 같이 넣어서 볶으면 레스토랑이랑 똑같다구."
진짜 보면 볼수록 재호는 (06년에 쓸 표현을 써보자면) 킹카였다. 지금 얼굴만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는데, 이제 곧 리얼 버라이어티들에 나와서 요리 실력과 패션 센스를 보여주면 얼마나 더 큰 인기를 얻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실제로, '대결 5천 곡' 편집도 온통 재호 위주였다. 좀 민망할 정도로 ‘외모신동 원재호'만 보여주었다.
재호가 민망한 듯 말을 꺼냈다.
"왜 나만 보여주냐. 부담스럽네.”
환희가 쿡쿡 찌르며 말했다.
"횽이 제일 잘생이니까 그렇죠! 제가 봐도 다르네여.”
내가 슬쩍 물었다.
"질투 나지 않냐 너? 너도 제법 생겼잖아."
“데뷔했지. 지상파 나오지. 저는 굳이 여기서 더 인기 있고 싶진 않아여. 너무 인기 많으면 가사 제 맘대로 쓰는 데 방해 되거든여.”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작가들 중에는 일부러 창작의 자유를 위해 지나친 명성을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긴 뭐, 재호가 이렇게 인기를 얻으면 우리 팀이 좋은 거니까."
환희는 여유 있게 가져온 탄산수를 까더니 꿀꺽꿀꺽 원샷했다. 환희는 음료수를 한번 따면 한 번에 다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다 마신 후 환희가 말을 이어갔다.
“그럼여. 재호 횽 덕에 곡 대박 나면 좋겠네여! 제 저작권 수입도 함께 잭팟!!"
하긴 뭐 환희는 스타가 아니라 ‘프로듀서'이자 ‘작사가'가 꿈인 녀석이었다. 데뷔만 한다면 그 이후는 인기에 시기심을 받을 타입이 아닌 듯했다.
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세계 최고의 가수'였다. 노래로 유명해지고, 가수로 유명해지기 위해서, 재호라는 외모 멤버가 초반에 치고 나가는 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메인보컬에도 관심은 넘쳤다. 썩 마음에 드는 분업이었다.
그 사이, 내 노래가 시작됐다. 예선에서 불렀던 '남원열차'였다. 노래는 항상 내가 불렀던 노래였고, 굳이 말하자면 음악 전문 채널인 뮤직넷이 진행했던 ‘슈퍼스타 T' 때보다 음질은 더 안 좋았다. 다만 주변인들 리액션 컷이 재미있었다. 뭔가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리액션 컷을 보면서 무심코 웃어 버렸다. 내가 말했다.
“내가 노래 부를 때 무섭냐? 왜 저리 벌벌 떨어?"
재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섭지. 무섭다구.”
“뭐가?"
"저런 성량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무섭지.”
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도 파스타를 한 그릇 더 담아 먹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난 맨날 오빠 방송 봤으니까. 매~엔날 오빠 노래 처음 듣는 사람 표정은 똑같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무슨 귀신을 본 거 같더라?”
역시나 내 계획대로였다.
방송이 계속 진행되면서 노래가 한 곡 한 곡 나왔다. 화면으로 봐도 차이가 확연했다. 나와 앤젤이 우승 후보였고, 가장 많은 곡을 불렀다. 하지만 그중에서 더 반응이 좋았던 건 내 노래였다. 앤젤은 틀리지 않으려고 모든 곡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부르다 가사를 틀렸고, 탈락했다.
잠자코 앤젤과 '잇츠쇼타임'이 우승하고 소감을 말하는 장면을 보던 환희가 말했다.
"근데 횽들. 뭔가. 차라리 더 잘된 거 같지 않아여?"
"내가 뭐랬어. 우리가 진짜 이긴 거랬지."
앤젤은 지나치게 경쟁심이 강했다. 그게 오히려 독이었다. 앤젤은 당장 프로그램에서 지는 걸 참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기를 쓰고 당장 '대결 5천 곡'에서 이기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뭐?'
대결 5천 곡 우승하려고 가수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본질은 홍보였다. 그러려면 당장 이기려고 드는 것도 좋지만, 노래를 최선을 다해 불러야 했다. 노래로 승부를 봐야 했다.
앤젤은 당장 눈앞에 승부를 이기려고 정작 본질을 버렸다. 그 대가를 컸다. 방송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방송 이후, ‘대결 5천 곡' 방송 게시판은 물론, 온갖 방송 게시판이 비원더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지상파 심야 음악 방송부터, 음악 순위 프로그램까지 싹 다 ‘비원더 왜 안 나오냐'는 항의로 가득했다.
제목: 비원더는 왜 초대 안하나요?
내용: 라이벌이고, 앨범 판매량은 더 적은 잇츠쇼타임은 이미 특별구성으로 밀어줬는데. 비원더는 왜 안돼요?
ㄴ 몰라서 물어? 소속사랑 딜했으니까 그렇지.
ㄴㄴ 비원더는 제일 큰 TYB인데 왜 안됨?
ㄴㄴㄴ TYB랑 지상파들이랑 대판 싸웠었다는 소문 파다함. 요새 문루아도 KBC 안 나왔었자나.
ㄴㄴㄴㄴ 헐대박
ㄴㄴㄴ 그거 다 옛날 이야기잖아여. 요샌 잘나옴.
아무튼 화제가 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인터넷뿐 아니라 기사들도 하나같이 비원더에 주목했다.
[비원더 권노을 가창력 폭발. 트로트까지 점령?]
[권노을, 오창선의 뒤를 잇는 슈퍼 보컬의 탄생인가!]
[비원더의 버스킹 라이브, 벌써부터 입소문 퍼지기 시작]
* * *
'대결 5천 곡’이 방영된 바로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음악방송 '쇼 뮤직 클래스'를 찍기 위해 KBC 방송국에 다시 출근했다. 출근길 우리를 반기는 팬이 확연하게 지난주보다 많아 보였다. 주말 사이에 큰 화제가 된 게 효과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손에 잡히는 숫자가 달라졌다. 앨범 판매량이었다. 분명 10만 장을 넘는 판매량도 신인에게는 굉장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20만 장을 가뿐히 넘겼다. 이대로는 올해 앨범 판매량 TOP5에 들을 수 있을 법한 페이스였다.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도, 모두가 뭔가 평소보다 들떴다. 특히 환희는 자꾸 펄쩍펄쩍 뛰었다.
재호가 툭 말을 뱉었다.
"침착해 침착해. 아직 우리 1위도 아니야. 오늘은 1위 후보도 아니라구.”
환희가 베베 몸을 꼬며 말했다. 메이크업을 받아야 하니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앨범 판매량이 너무 쩔자나여 횽! 게다가 일정도 꽉꽉 차기 시작했고!"
"그건 좋긴 하지. 나도 딱 내 맘에 드는 스케쥴이 하나 잡혔거덩~."
이제 비원더는 따로 또 같이 일정을 잡을 정도의 섭외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번 인지도가 쌓이기 시작하니 눈처럼 방송 스케쥴이 불어났다.
이제까지는 주로 3인이 함께 하는 방송 위주로 출연했다. 단독으로 제안이 오는 건 '외모신동' 재호 정도였다.
재호가 뜨뜻미지근하게 '갈까?’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무슨 소리냐며 재호를 밀어줬다. 재호라도 방송에 많이 나와야 팀의 인지도도 올라갈 터였다.
그러다 이번에는 내가 ‘대결 5천 곡'에서 큰 주목을 받자, 본격적으로 방송 섭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음악 관련 활동이나 라디오가 많이 들어왔고 재호는 10대~20대 초반 타깃의 케이블 광고가 몰려왔다.
내가 물었다.
“환희 너는 좀 스케쥴이 적은데 초조하지 않냐?”
"저는 좋아요 횽. 여자 만나기도 편하구.”
나와 재호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환희가 ‘움찔'했다.
“아, 조크에여 조크! ‘주환희는' 절대 여자 안 만나여!”
재호가 끌끌 혀를 찼다.
일단 지금까지는 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내 기대대로 천채왕 프로듀서는 지상파 보이콧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재호는 내 생각보다도 더 스타성을 보여주면서 팀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에는 넉넉하게 잇츠쇼타임보다는 높은 순위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영웅 매니저가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했다.
“무대 30분 남았습니다. 준비 완료해주세요.”
재호가 물었다.
“저희 이번 활동 이제 딱 1주일 남았죠?”
"맞습니다."
1주일이라고 하면 음악방송이 딱 한 번 남은 셈이었다. 그사이에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5위권 내에 있는 ‘잇츠쇼타임'은 따라잡고 싶었다.
내 표정을 읽은 듯, 배영웅이 내게 말했다.
"추세대로라면 다음 주에는 무조건 우리 순위가 잇츠쇼타임보다 높을 거예요."
“네."
단순히 경쟁심이 아니었다. 잇츠쇼타임은 지나치게 비원더와 컨셉이 비슷했다. 직접적인 경쟁자라는 뜻이었다.
어떻게든 비슷한 카테고리에서는 비원더가 1위여야 앞으로 활동이 수월해질 수 있었다.
모니터를 보니, 잇츠쇼타임이 무대를 진행 중이었다. 무대를 지켜보던 환희가 말했다.
“저 메보는 그새 실력이 늘었네여.”
재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게.”
계속 활동하면서 잇츠쇼타임의 무대를 지켜보면서 확신했다. 잇츠쇼타임은 우리처럼 오랜 기간 준비한 팀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부분 록이든 발라드든 솔로 가수 프로젝트였다. 심지어 3명 정도는 노래를 잘하는 댄스 가수 지망생으로 보였다. 노래 부를 때 동작이나 스텝을 밟는 모습을 보면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음을 맞추는 하모니도 없었고, 노래에 통일감도 없었다. 각자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노래를 잘 하는 거 같았지만 실제로는 노래가 전혀 화합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올스타이긴 한데, 한 팀이 되진 못한 느낌이구만.’
그에 비해 비원더는 오디션을 함께 거치면서 한 팀이라는 팀워크가 확실했다. 벌써 가족처럼 끈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셋이 미묘하게 장기가 달라서 겹치는 캐릭터도 없었다. 내가 기획했지만, 좀 잘 빠진 팀이었다. 흐뭇했다.
“자! 이제 스탠바이하겠습니다."
방송을 위해 무대로 걸어갔다. 언제나처럼 복도에서는 팬들이 함성과 환호성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셋 다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재호 오빠 멋져요!"
“노을아 오늘도 노래로 죽여줘!"
"잘생겼다 주환희~”
팬들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가득 받아 무대로 향했다.
환희가 어떤 수상한 병을 들고 있었다.
“그건 뭐냐?”
“아 팬이 줬어여. 목마른데 지금 마시고 가야겠다.”
오렌지 소다 병이었다. 환희가 뚜껑을 따고 마시려는 순간, 나는 재빨리 환희에게서 소다 병을 뺏었다.
환희가 항의했다.
“아 횽 왜 그래여! 팬이 저 준거란 말예요."
저 녀석 눈에는 이게 음료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
이건, 독약이었다.
"이거 입에 절대 대지 마. 그리고 매니저님. 지금 당장 경찰 불러주세요. 지금 바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