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93화 (93/280)

제93화

“그래 소인중이.”

“뭔 약점이요?"

주하늘은 환희와는 달리 포커페이스가 아니었다. 표정에 두려움이 잔뜩 보였다.

“너, 그때 외국인 여성이랑 시시덕거리고 그랬잖아. 소인중 보는 앞에서.”

"아!”

그랬다. 연애는 당연히 신인 가수에게 치명적 약점이었다. 그 꼬리를 소인중에게 이미 잡힌 셈이었다.

“증거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미 너는 소인중에게 약점을 잡힌 셈이야. 기자들에게 슬쩍 던져줄 수도 있지 않겠어?"

“부… 분명 그렇겠네요."

“애초에 너 왜 그렇게 연애를 해대는 거야?"

"왜요?"

“너 본 모습은 딱히 연애 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어…”

진짜로 주하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녀석 대답은 황당하게 싱거웠다.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나?”

"주환희라는 캐릭터를 만들면서 만든 컨셉인 거 같은데."

"같은데?"

“어느새 제가 컨셉에 잡아 먹혔다고 할까 버릇이 됐다고 할까. 뭐 그르네요?"

"얌마! 신인가수가 하고 싶지도 않은 연애를 위험하게 하고 있던 거야? 당장 그만둬."

"그런가? 역시 그렇겠죠?”

“그래.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직업이잖아. 주환희로 연애는 그만둬. 차라리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 주하늘일 때 하던가.”

"네에…”

이걸로 주환희의 연애 편력은 일단 끝났다.

물론 알고 있었다. 이걸로 끝날 리가 없었다. 주환희의 버릇은 몇 년간 쌓였다. 그게 저리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또 문제가 생기면 이게 있으니까.’

오랜만에 mp3를 만지작거렸다.

* * *

그리고 드디어 첫 지상파 방송 녹화일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사에 들어왔다. 매번 TV 화면으로만 봤던 BBS 방송국 사옥에 들어가니 왠지 떨렸다. 팬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기다리고 와서 우리를 응원해줬다.

그렇게 뭔가 축복을 받는 듯한 좋은 기분으로 메이크업을 받았다. 메이크업도 지상파 메이크업은 괜히 달라 보였다. 뮤직넷에서 매번 받았던 방송용 메이크업이지만 왠지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2006년에는 지상파와 케이블의 방송국 위상 차이는 비교 불가 수준이었다.

메이크업을 받다 슬쩍 눈을 떴다. 거울을 무심코보다 갑자기 기분을 잡쳤다.

특징적인 금발 단발의 남자… 앤젤이 뒤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도 오늘 출연이야? 아오!'

앤젤의 얼굴은 다급해 보였다. 이전에 여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자기들이 앞서갈 당시, 가끔 뮤직넷에서 우리를 볼 때마다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이 앨범 판매량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여유도 사라졌다. 지금은 입술을 꼭 깨물고 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출세했네. 지상파도 다 오고."

“덕분에."

앤젤이 혀를 찼다.

"네놈들한테는 안 질 거야. 안 져."

뭐라 한마디 하려 했는데, 그 순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타인이 들어오자 앤젤은 잽싸게 꾸벅, 내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만 있을 때는 막말하는 타입이었지만 스태프들 눈치는 보는 모양이었다.

‘머리는 좋은 놈이네.'

연예인 중 하수들은 잘 나가는 연예인에게 아부한다. 진짜 고수는 다르다. 대신 스태프를 조심한다. 연예인은 연예계에 남고자 하는 한, 연예인은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나쁜 소문을 퍼트릴 수는 없었다. 연예계에서 계속 살아야 하니 말이었다. 스태프는 훨씬 더 자유롭다. 스태프가 퍼트리는 소문은 훨씬 다양한 채널로 퍼진다.

스태프의 눈치를 볼 정도라면 상당히 냉정한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저 녀석들과 함께 '대결 5천 곡'에 출연한다니. 뭔가 고생문이 훤하게 열리는 느낌이었다.

* * *

메이크업을 받고 재호, 환희와 함께 스튜디오 무대에 올라왔다. 깔끔한 화이트 톤의 스튜디오 한가운데 거대한 화면이 보였다. 저 화면에 노래방 화면을 띄워놓고 노래를 부를 모양이었다. 방청객이 생각보다 가까운 부분에 앉아 있어서 멤버들과 말하기에도 신경이 쓰였다.

옆에 환희가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횽 이거 관객분들이 바로 옆에 있네여 말도 잘 못 하게써여.’

‘그냥 우리가 하는 말 다 듣는다고 생각해. MC가 말할 때마다 리액션 많이 하고.'

'네 횽.’

실패한 가수 지망생이던 이전 생에서 깨달은 점이 있었다. 예능에서 내가 돋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대결 오천 곡'처럼 참가자가 많은 방송이라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점수가 있었다. 바로 리액션이었다. 별로 웃기지 않아도 사회자의 리액션에 바로바로 웃어주면 리액션으로 잔잔하게 계속 화면에 나올 수 있었다.

사회자 농담에 일부러 텐션을 끌어올려서 리액션을 했다. 사회자는 적당히 농담을 섞어서 룰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었다.

'대결 오천 곡'의 룰은 간단했다. 8강, 4강, 그리고 결승까지 3번 대결했다. 8강은 룰렛 대결, 4강은 테마별 노래 부르기 대결이었고 결승은 5천 곡 중 랜덤 대결이었다.

슬쩍 주변을 살펴봤다. ‘잇츠쇼타임' 외에도 유명 중년 가수 부부, 개그맨 듀오, 5인조 댄스 그룹, 방송국 소속 신인 아나운서 등 온갖 종류의 연예인들이 모여 있었다. 전형적인 2천년대 유행했던 백과사전식 예능이었다.

여성 MC가 우리를 호명했다.

"다음 순서는~ 너어무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주는 팀이지요. ‘비원더'를 무대에 모실게요."

재호 환희와 함께 성큼성큼 준비되어 있는 간이 무대로 올라왔다. 환희가 마이크를 잡아 내게 주었다. 노래는 내가 부르기로 결정했다.

MC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간단한 대화를 걸었다.

"요새 비원더의 '남녀본색'이 화제에요. 저도 너~무 좋아합니다."

냉큼 환희가 꾸벅 인사하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동안 나는 봤다. 옆에 게스트 석에 앉아 있던 앤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확인했다.

사실 앤젤은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최대한 착한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미처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앤젤이 제일 나았다. 나머지 3인은 모두 '우' 소리를 내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 등, 초딩 같은 리액션 중이었다.

‘저래 가지곤 저 녀석들 오래 못 가겠는데.'

속으로 웃으며 인터뷰를 계속했다. MC가 환희에게 말을 걸었다.

"이 곡의 가사, 환희 군이 쓰셨다면서요. 너무 놀랐어요. 이런 가사를 어떻게 이렇게 젊은 분이 쓰세요? 생각이 참 깊으신가 봐요."

"아, 아네요. 횽들이 워낙 잘 도와줘서..."

환희는 언제나처럼 한국말 잘 못 하는 교포를 능숙하게 연기했다. MC의 관심이 바로 재호로 향했다.

"재호 군도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이번 곡의 편곡을 주도하셨다고요.”

재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회사에서 많이 도와주셨구요. 앞으로 더 독창적인 음악. 저희다운 음악을 준비 중입니다."

관객석에서 '꺄악!'하고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제작진이 지시해서 나온 '자본가 리액션'이 아니었다. 찐 리액션이었다. 확실히 화보집 이후로 재호를 중심으로 인기가 눈덩이처럼 불어 오르고 있었다.

인터뷰는 나보다는 곡을 쓴 재호와 환희 위주로 진행되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멤버들의 인지도와 인기가 올라가면 갈수록 팀의 밸런스가 맞아질 터였다.

'게다가, 좀 건방진 생각이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나의 동료에 걸맞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굳이 이 프로에서 돋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이 방송은, 완전히 나만을 위한 무대였으니 말이었다.

“그럼! 비원더. 원하시는 곡이 나올 때 '멈춰!'를 외쳐주세요!"

예선은 슬롯머신처럼 여러 가지 곡이 나오고, 참가자가 ‘멈춰!’를 외쳤을 때 멈춘 곡을 부르는 랜덤 곡 대결이었다.

랜덤곡으로 나온 노래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신명 나는 트로트 곡, '남원열차'였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원행 열차에~>

만인의 노래방 히트곡답게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뭔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관객들의 표정이 얼었다.

관객은 신경 쓰지 않고, 내 느낌대로 그대로 끝까지 불렀다. '대결 5천 곡'은 1절만 부르면 되기 때문에 완급조절도 필요 없었다.

<만날 순 없어도~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떠나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짠짠짠! 하는 반주 소리에 맞춰 노래를 끝냈다. 그런데 어째 ‘딩동댕' 소리가 안 나왔다.

'가사를 절었나? 다 정확했던 거 같은데?'

3초 정도 지난 다음에야 PD가 실로폰으로 '딩동댕동' OK 사인을 보냈다.

"토, 통과!”

MC도 뭔가 어설픈 느낌으로 우리에게 합격 선언을 했다.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가 멤버들에게 투덜댔다.

“왜 나만 합격 발표가 이리 늦지?”

재호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니는 니 노래가 어떤지 모르지?”

"내 노래?”

"니 노래 처음 듣는 사람은 대개 저런 반응이야. '뭐 저딴 노래가 있냐' 이런 거.”

옆에 앉자마자, 중견 가수 부부 중 여성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 너 노래 되게 잘한다! 너 이름이 뭐니? 깜짝 놀랐네."

"아 네. 감사합니다.”

“백만 번은 들어 본 노랜데. 니처럼 가슴 저리게 부른 사람은 처음이다 얘. 게다가 성량은 또 왜 이리 좋아? 너 성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돌 소속사서 팀 하기에는 아무래도 아까운데?”

“하하."

아무래도, 이번 예능에 주인공은 내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비원더는 결승까지는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나는 장르 불문 노래는 다 좋아했다. 가사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 노래 대결은 내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결승 상대는 역시나 잇츠쇼타임이었다. 잇츠쇼타임 중에서도 노래는 메인보컬인 앤젤만 불렀다. 필연적으로 나는 앤젤과 대결할 운명이었다.

뭔가 악연의 상대란 느낌이었다.

선공은 잇츠쇼타임이었다. 앤젤이 무난하게 포크송을 소화했다. 노래를 잠자코 듣고 있던 환희가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횽.'

'말조심해.'

‘알게써여. 근데 저거 너무한 거 아녜여?'

‘뭐가?'

'너무 노래 대충 부르자나여. 가사 안 틀리려고 감정은 아예 없이 부르는데.'

'그러게.'

'저거 반칙 아니에요?'

나는 환희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러더니 피식 웃고 말했다.

'뭐 그러라 그래. 우린 우리 식대로 하면 되지.'

후공인 우리 차례가 되었다. 1~5000번 중 번호를 골라야 했다.

"1111번이요."

왠지 느낌 좋은 1111번을 골랐다. 감미로운 80년대 발라드 ‘끝인가요'가 흘러나왔다. 상당히 좋아하는 노래였다. 목놓아 열창했다.

<그댄 정말 어떤가요~ 나를 생~각하나요~>

이번에도 MC와 제작진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횽 조금 살살해요.”

“괜찮아."

재호가 툭 나를 치더니 말했다.

“니가 노래 부르는 동안 슬쩍 봤는데, 관객들도 다들 얼이 빠졌더라."

"그래?”

"그래. 처음에는 웃으면서 보다가 점점 입을 벌리고 경악하던데? 권노을 발라드를 라이브에서 처음 들으면 보통 그런 반응이지.”

그러면서 재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멤버들의 자부심이 되는 기분, 썩 나쁘지 않았다.

대결은 계속되었다. 앤젤은 미꾸라지처럼 가사를 틀리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나도 간신히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댄스곡, 디스코, 록까지 온갖 장르를 다 소화했다.

“잇츠쇼타임 통과!"

'얄미운 녀석.’

환희 말대로 잇츠쇼타임의 앤젤은 탈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또박또박 가사를 발음했고,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가사를 기억하는데 우선했다. 노래도 잘 아는 편인지, 아직까지 빈틈이 거의 없었다.

“비원더 다음 번호 불러주세요."

“0001번입니다.”

1번, 왠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번호라 느낌이 쎄했다.

강렬한 기타 전주와 함께 노래가 나왔다.

씨익 웃음이 나왔다. 오창선 선배의 노래 ‘너가 함께라면'이 나왔다. 코러스를 하면서 천 번은 불러 본 곡이었다.

가스펠 느낌의 곡이라 한껏 가창력을 발휘하기 좋았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지금부터 나와 함께해줘

이제 과거는 던져버려>

온몸을 실어서 노래했다. 원래는 내가 불렀던 코러스 부분은 노래방에 맡기고, 오창선 선배가 불렀던 메인보컬 애드립 파트에 집중했다. 가스펠 합창단의 리더처럼 자유롭게 노래했다.

항상 오창선 선배의 노래를 들으면서 상상했다. 내가 메인보컬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오히려 나는 오창선 선배보다 살짝 낮은 음들을 써서 애드립을 했다. 그렇게 해야 오히려 마지막의 최고음이 더 돋보일 것 같아서였다. 노래의 감정에도 더 맞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 고음은 내 영혼을 다해 불렀다.

<지금 던져버려~>

관객들과 연예인 패널들의 감탄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노래는 나를 위해서 부르는 노래였다.

“땡!"

“아이구!”

“가사는 '바로 던져버려~'였습니다. 아쉽네요. 우승은 잇츠쇼타임입니다. 축하합니다!! 수상 소감 말해주세요."

애드립과 감정에 너무 취하다 보니 사소한 가사 실수를 두 번 한 모양이었다.

앤젤이 의기양양하게 수상 소감을 하는 동안, 우리는 슬쩍 돌아가서 게스트 자리에 앉았다. 환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 아쉬워써요 횽. 거의 다 왔는데.”

재호도 투덜댔다.

“아! 그거 조금 냉정하게 부르지. 잘 아는 노래 같던데. 너무 잘 부르려다가 가사 틀린 거지?"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긴 거니까."

재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우리 졌어."

"두고 봐."

그리고 5일 후, 비원더와 잇츠쇼타임이 출연한 '대결 5천 곡'이 방영되었다.

내 예언대로, 진짜 승자는 비원더가 되었고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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