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92화 (92/280)

제92화

첫 버스킹 공연을 하고 딱 3주가 되는 날, 천채왕의 전화가 왔다.

"보이콧 풀렸다."

“예스!"

비원더 3인 모두 환호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었다. 천채왕이 말을 이어갔다.

“이제 시작이야. 다만 처음부터 아주 인기 프로를 풀지는 못하고, 적당한 중소규모 방송으로 간을 볼 모양이야. 마침 펑크 낸 팀이 있다고 해서 바로 잡았다."

천채왕이 받아 온 첫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은 '대결 5천 곡!'이었다. 나도 여전히 기억하는 프로였다. 5천 개의 곡을 랜덤하게 정해서 가수들이 팀을 정해 부르는 프로였다. 모르는 곡이 나오면 탈락이었다.

천채왕이 알려 준 녹화 일자는 바로 4일 뒤였다. 갑자기 바빠졌다.

하지만 기분 좋은 바쁨이었다.

* * *

천채왕은 바로 전화로 우리에게 예능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지시했다.

우리는 이미 음악프로에서 데뷔했던 적이 있었다. 그전에는 오디션 프로에도 출연했다. 큰 준비는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큰 착각이었다. TYB에서는 예능을 위해 온갖 의상부터 헤어스타일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했다. 아이돌 기획사인 TYB에서는 온갖 아이돌을 기획하며 얻은 노하우를 우리에게도 활용하려 했다.

매니저를 통해서 우리에게 헤어스타일과 의상안이 올라왔다. 나는 갈색으로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했다. 의상은 무난한 파스텔 톤의 정장 차림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을 하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방송 때 컨셉이에요. 저희 팀에서 음방 제외하고 첫 방송이라 힘 좀 줬어요.”

별생각 없이 의상과 헤어스타일 초안을 살펴봤다. 그러다 슬쩍 옆을 쳐다봤다.

“......"

어째 재호 얼굴 표정이 썩어 있었다. 엄청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뭔가 불안한데?’

* * *

아니나 다를까, 그날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호가 전화를 걸었다.

"뭐냐? 차에서 말하지."

재호가 퉁명스럽게 내게 질문했다.

-노을이 너 맘에 드냐?

"뭐가?"

-의상 말야 의상. 맘에 드냐구.

"아하."

역시나 재호는 의상에 맘이 안 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럴 만했다. 일단 나는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환희는 원래 TYB의 연습생이었던 만큼, TYB 특유의 스타일링에 거부감이 없었다. 평소에도 TYB에서 주는 의상과 비슷한 과격한 컨셉의 옷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

문제는 재호였다.

재호는 항상 확고하게 자기만의 패션 감각이 있었다. 곡을 쓸 때 그에 맞는 무대의상을 회사와 상의할 정도였다. 렌즈나 안경 브랜드부터 양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자신을 스타일링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재호는 회사에서 준 의상이 마음에 안 들만 했다.

TYB는 좋게 말하면 도발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과한 의상을 즐겨 활용했다. 그런 면에서는 아이돌 기획사다웠다. 환희는 강렬한 가죽 재킷 중심으로 록커 느낌을 냈다. 나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피처럼 붉은 크림슨 컬러의 수트에 블랙 셔츠 색 배합이 범상치 않았다.

압권은 재호 의상이었다.

-아니, 나는 평생 염색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갑자기 탈색 후 연두색 염색을 하라구? 거기다가 프릴이 잔뜩 달린 의상은 뭐야. 너무 촌스럽그덩?

아무래도 재호가 '외모신동'이라는 닉네임으로 온라인에서 부터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멤버이니만큼, 나름대로 힘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슬쩍 봐도 재호의 컨셉은 확실히 과했다. 프릴이 잔뜩 달린 셔츠를 달아서 무슨 모차르트 시대의 음악가 같았다. 거기다가 요란한 밝은 형광색의 초록빛 염색까지 넣어서 엄청나게 튀었다.

“뭐 좀 독특하긴 하네.”

-아 나는 이런 컨셉으로 하기 싫은데. 어떻게 안 되나?

“직접 니가 매니저한테 말하면 되잖아."

-이거 천채왕 선생님이 직접 해주신 거잖아?

우리가 제작한 이후, 천채왕 프로듀서에 대한 호칭은 '선생님'으로 낙점됐다. 모든 TYB의 가수는 다 천채왕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래?"

-그렇다고 매니저님이 말했어.

“아 그랬냐."

'대결 5천 곡' 준비를 위해 계속 노래 공부를 하다 보니 매니저 말을 놓친 모양이었다.

-휴우.

그러고 보니 재호는 뭔가 윗사람에게 항의하는 일을 어려워하는 타입이었다.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재호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재호는 내가 회사와 이야기해서 의상을 바꿔주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전화해줄게."

-짜식…

“맨날 곡 작업한다고 철야 작업하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알고 있었다. 재호는 정말 음악에 진심이고, 이 팀에 진심이었다. 그 증거로, 재호는 함께 하는 방송 스케쥴이 잡힐 때까지 아무런 단독 스케쥴도 잡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을 우리 팀을 위한 음반 작업에 투자했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재호가 원하는 거라면 그까짓 전화 정도 해줄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천채왕이 딱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인 7시쯤에 전화를 걸었다.

-어 노을이! 무슨 일이야?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그… 의상 컨셉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아 그거. 소율이… 주소율 이사가 특별히 신경 쓴 거야.

아차 싶었다. 역시나 재호 컨셉은 회사가 크게 신경 쓴 컨셉인 모양이었다.

“저 그게… 저희 활동곡과 잘 맞을까 재호가 고민인 모양이더라구요.”

-재호가?

"네. 음악은 엄청 진중한데… 꼭 의상은 화사한 아이돌 같아서요.”

-노을아. 그게 나름 우리들은 주소율 이사를 주축으로 고민해서 만든 거야. 예능에서는 음방이랑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을 거고. 무대에서야 음악에 녹아드는 의상을 해야 하지만, 방송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너희들 개인의 캐릭터를 잘 잡아주고 싶었던 거지.

아마 천채왕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 봤을 터였다.

TYB에서 데뷔하는 다른 아이돌은 기획사에 이런 발언권을 갖지 않았다. 처음 3년 정도는 기획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비원더는 일반 아이돌과 조금 달랐다. 3명 중 2명은 연습생 출신이 아니었다. 곡도 멤버들이 기획사와 상의해서 만들었다. 절반 정도는 아이돌이지만, 절반 정도는 기획사와 대등하게 계약한 아티스트였다.

그래서 이런 식의 논의를 할 때면 뭔가 천채왕 입장에서 다른 신인 그룹을 대할 때와 달라서 조심스럽게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천채왕 프로듀서가 내게 말했다.

-그래. 그럼 재호 의견대로 하자.

뜻밖에 대답이 너무 시원해서, 내가 당황했다.

“아… 정말요?"

-그래. 비원더가 뭐 억지로 하기 싫은 머리 하고 그럴 레벨은 아니지. 아티스트인데. 다른 멤버들은 괜찮은 거 같으니까 재호를 주소율 이사 비주얼 팀이랑 미팅하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내 예상은 기껏해야 머리 색깔 정도 바꾸는 걸 고민해보겠다… 정도였는데 너무 생각보다 좋은 결과였다.

거기에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역시나 천채왕은 사업가였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만,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

* * *

"하아…"

뭔가 혹 떼려다 혹 붙인 느낌이었다. 천채왕 프로듀서의 부탁 때문이었다.

'환희 말이야. 걔 사생활 문제 알지? 지금까지야 문제가 없었지만 그거, 그대로 두면 분명 문제가 될 거야. 회사 입장에서는 심각한 리스크야. 그만둬야 해. 내가 말하는 거보다는 노을이 네가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잊고 있었다. 주환희 그놈의 치명적인 약점 말이었다.

여.자.관.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환희는 완벽한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노래 실력은 기본이고, 외모, 춤, 심지어 작사 작곡 능력까지 갖췄다.

그런 그가 데뷔를 못 한 이유는 아마도,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처음 내가 만났을 때부터 그는 끊임없이 여자를 만났다. 그것도 항상 외국 여성이었다. 국적도 다양해서 내가 환희를 봤던 몇 개월 동안 이미 환희는 오대양 육대주 출신 여자들을 다 만난 듯했다.

천채왕의 방침은 확고했다. 분명 비원더는 아이돌 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인 가수인 건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발라드라도 신인 가수에게 과한 연애는 위험이 될 수 있었다.

최소한 팬들에게 활동 초반에는 가수의 연애를 보여주면 안 된다고 천채왕은 판단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 연애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나도 공감 가는 말이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연애를 마음껏 하고 다니는 신인 가수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음악의 길, 팬과 함께하는 길에 정진해도 시간이 바쁜데 연애가 웬 말이란 말인가. 게다가 유명인이니만큼, 연애를 하다 사고가 날 위험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환희 이 녀석은 분명히 연애 중독에 가까운 놈이었다. 이런 녀석이 갑자기 연애를 그만둘 수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하늘이었다면 편했을 텐데. 연애 따윈 안 했… 응?’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나가 떠올랐다. 주환희는 너무나도 잘 만든 이미지였지만, 결국 '가짜'였다. 그의 본체는 주하늘이었다.

천채왕은 대충 주환희가 진실한 본인의 모습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주하늘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나는 주하늘과 동고동락하며, 그리고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질투의 감정까지 확인하며 주하늘이 어떤 사람인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 주하늘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 * *

시간이 지나, 어느새 '대결 5천 곡' 출연 전날 저녁이 되었다.

동생은 대학교 기숙사로 떠났다. 집은 내 차지였다. 덕분에 이제는 부담 없이 남을 초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초대한 건 다름 아닌 주하늘이었다.

“왔어요 형."

주환희와는 달리, 주하늘은 인사부터 힘이 없었다.

"왔냐.”

주하늘이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재킷 어디다 두면 돼요?"

“아무 데나 편한 곳에 둬. 니만 안 잊으면 되지."

"에이 그래도..."

좋게 말하면 주하늘은 정말 예의 발랐다. 나쁘게 말하면 참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니까 분명히, 설득은 더 쉬울 거란 말이지?’

생각해보면 연애 중독의 구제 불능 바람둥이는 가짜인 '주환희' 이야기였다. 주하늘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이 갭을 활용하면 충분히 설득이 가능해 보였다.

“근데 갑자기 왜 형 집에서 자고 가라는 거에요?"

"그게 더 편하잖아? 어차피 꼭두새벽에 배영웅 실장님이 데려다주실 건데. 동생 없어서 부담도 없고."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뭐가 미안해. 밥이나 먹자.”

다이어트에 문제없는 닭가슴살 요리를 우걱우걱 먹었다. 먹으면서 힐끔힐끔 쳐다봤다. 하늘이의 심리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뭐 문제 있어요 형?"

역시나 주하늘은 굉장히 예민했다. 바로 내 눈빛을 알아챘다.

"뭐… 글쎄.”

"엄청 걱정스러운 눈으로 절 쳐다보던데요?"

“솔직히 하나 있긴 하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준비한 말을 할 차례였다.

걱정이 하나 있긴 하지.

"뭔데요 횽?"

"소인중 말야. 네 약점 하나 잡은 거 같아.”

하늘이가 포크를 접시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눈 크기도 두 배가 되었다.

“네에? 소인중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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