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어느새 녹음실은 공개 팬미팅 장소로 변했다. 배영웅은 슬쩍 사라져서 바깥에 나가서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팬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키미 프로듀서가 녹음을 진행했다.
"자, 첫 번째 곡 '남녀본색'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환희군, 그 전에 팬미팅 스크립트 읽어주세요, 가사지 옆에 있을 겁니다."
환희가 악보대에서 미리 준비한 팬미팅 스크립트를 발견했다. 팬미팅도 진행은 환희의 몫이었다.
환희가 스크립터를 보더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아.. 안냐세여. 죄송합니다. 저희, 오늘 미팅 몰라써가지구여. 좀 당황했네여.”
팬들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괜찮아요' ‘멋지다!’ ‘잘생겼다!' 뭐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거대한 호의를 받아보다니, 뭔가 황송하다 못해 책임감까지 생겼다.
팬미팅은 확실히 버스킹 공연과는 느낌이 달랐다. 버스킹 공연 때는 불특정 다수기에, 우리가 하모니든 성량이든 무언가로 감동을 시켜야 비로소 관심을 보였다. 그냥 지나치는 행인들도 많았다.
팬과의 콘서트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 100% 집중했다. 너무 오랜 기간 집중하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 집중만으로도 어떤 관계가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 레퍼토리 중 하나인 오창선 선배의 '돌아서겠소'를 부를 때, 다른 관중들은 내가 어떻게 부르는지에만 신경을 썼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팬들은 내가 평소와 조금 다른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애드립을 하는 등등에 일일이 반응했다. 나의 이전 무대를 모두 꼼꼼하게 살펴봤다는 걸 리액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세하게 내 모든 고민을 알아보고 그 결과에 환호해주니 저절로 신이 났다.
단순 관객이 아닌 우리의 '팬'과의 공연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감탄이 나왔다.
준비한 모든 곡이 끝났다. 하지만 팬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앵콜'이 녹음실에 울려 퍼졌다.
환희가 우리를 쳐다봤다.
“어쩌죠 횽들? 우리 남은 곡이 없는데."
내가 씩 웃고 말했다.
"그거 있잖아 그거."
"횽… 그거라면 설마…"
"그래 그거. 카드캡터 베리 주제가."
재호도 내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곤 슬쩍 연주자들에게 물었다.
"카드캡터 베리… 되시겠어요?"
눈치 없게 박찬용이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내가 드럼 친걸세. 미도리 씨가 알진 모르겠지만."
환희가 언제나처럼 엉터리 오타쿠 일본어로 미도리에게 물었다.
"미도리, 카드캡터 베리 주제가 알았으려나?”
미도리가 깔깔대며 말했다.
“그 곡 알아요! 비원더 세 분이 한 거죠? 혹시 몰라서 코드 따 놓았어요."
재호와 환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네. 팬들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
환희가 목을 가듬고는, 마이크에 대고 팬들에게 말했다.
"딱 한 곡. 앵콜 하겠습니다. 마지막 곡은… ‘카드캡터 베리’ 입니다!"
바로 우리는 마지막 무대를 시작했다. 팬들의 뜨거운 함성에 녹음실 유리 벽이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 * *
폭풍 같던 팬미팅이 끝났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우리는 팬들과 유리벽을 두고 소통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둔 팬미팅도 제법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위험한 팬들이 있다 해서 걱정했는데, 다들 젠틀해 보이는데?'
비원더의 팬에 자랑스러움이 생겼다. 팬이 있던 적도 없으니, 팬을 직접 본 것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팬들을 위해서 노래한다는 것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녹음실로 돌아왔다. 팬들은 모두 돌려보낸 상태였다.
"고생하셨어요. 팬들 앞이라 그런가, 여지껏 공연 중에 제일 좋던데요?”
내가 대답했다.
"말씀이 맞을 거 같습니다. 팬들은 뭔가 기이한 에너지 같은 걸 주더라고요."
"잘됐네요."
재호가 물었다.
"녹음은 어쩌죠? 팬들 만난 건 처음이라 그냥 막 불러 버렸는데요."
배영웅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히려 현장감 있고 좋았어요. 그쵸 프로듀서님?"
키미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주 크게 틀린 부분만 고칠 거에요. 엔지니어랑 이제부터 철야해야죠. 본인이 틀린 부분 있으면 자수해요. 찾는 수고 덜게.”
환희가 냉큼 대답했다.
"아 쌤. 저 사실 '카드캡터 베리' 주제가는 준비를 안 했던 곡이라 초반에 실수가 조금 마나써요."
환희와 재호가 키미 프로듀서와 이런저런 고치고 싶은 부분 이야기를 했다. 나는 딱히 다시 부르거나 고치고 싶은 부분은 떠오르지 않았다. 후회 없이 불렀다. 둘이 노래를 하는 동안 슬쩍 박찬용과 미도리에게 갔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박찬용이 허허 웃었다.
"그냥 일일 뿐일세. 그나저나 참 대단한 인기구만."
“아 이 정도면 대단한 건가요?”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팬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요."
박찬용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만 피식 웃었다.
“실없는 친구구만."
미도리 또한 녹음실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한 공연이라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이 환호해줘서 현장감은 또 있어서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녹음 경험이 풍부한 박찬용에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녹음이 잘 됐을까요? 관객들 환호가 느껴지던데요."
"녹음실에서 한 녹음이니 괜찮지 않겠나? 다만 원테이크이기도 했고, 약간 유리벽도 울려서 최선의 음원이 나오진 않을걸세."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 걸 팔아도 되나요?"
“그거야 채왕이가 알아서 하겠지."
천채왕 프로듀서 이름이 나오니 흠짓, 했다가 둘이 사실 동년배 친구 사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현직 드러머와 가요계의 제왕이 동년배 밴드 출신이라니, 아직도 잘 익숙해지지 않았다.
* * *
그날 밤은 오랜만에 비원더 3인이 함께 우리 집에서 잤다. 재호의 제안이었다. 아무래도 그사이에 재호와 환희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간단한 다과와 함께 소주를 마셨다.
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TYB에 믿음이 강했던 하늘이도, 지상파 출연이 어려워지자 걱정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환희는 멤버들 하고만 함께 있기에, 원래 모습인 주하늘로 돌아왔다.)
내가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늘. 우리 팬들이 있다는 건 확인 했잖아?"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두. 우리가 대중가수가 될 수 있을까? TV도 못 나오는데?"
“팬이 있는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니라구. 잇츠쇼타임 애들은 쭉쭉 대형 예능 나와서 존재감을 불려가는데. 우리는 전혀 그런 맛이 없잖아."
확실히 '잇츠쇼타임'의 존재가 거슬렸다. 우리랑 장르부터 뮤비 컨셉까지 죄다 비슷했다. 비슷한 그룹 하나가 지상파 방송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순위까지 올리고 있다 보니 확실히 초조함이 들 만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뭘 한들, 지상파 보이콧이 풀릴 리는 없잖아?”
재호도 그 부분은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우리 탓도 아니구. 설마 오디션 프로로 데뷔했다구 보이콧을 할 줄이야…”
“꼭 그런 건 아닐 거야. 어쩌다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된 거지.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건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하늘이가 말했다.
“이건 뭐 어쩔 수 없죠. 기도빨이라도 세워서 천지신명에 기도라도 올리는 수밖에.”
재호가 피식 웃었다.
"너 그런 거 믿냐?"
하늘이는 우리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노트에 뭔가를 적으며 말했다.
“뭐 딱히 방법이 없잖아요? 이건 그야말로 외부 상황이니까. 하늘이든 운이든 무엇이라도 풀어주는 거를 기다릴 수밖에 없죠. 저희들이 잘해서 될 게 아니니까요.”
갑자기 성당에서 간절하게 뭔가를 기도하던 문루아가 떠올랐다. 뭔가 무력감이 들었다.
노래를 잘하는 건 얼마든지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계략이나 위험에서 피하는 것도 내 능력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시기에 방송국 3사가 합심해서 하는 보이콧을 일개 가수가 막기는 불가능했다. 진짜 종교나 미신에라도 기대고픈 상황이긴 했다.
그나마 오늘, 팬들의 성원을 보지 않았으면 진짜 절망했겠구나 싶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는 재호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니네 집 절 다니지 않냐?”
"말도 말라구. 엄마는 지금도 어디 사찰에서 절하는 중이야. 우리 아들 지상파 나가게 해달라구."
“하하."
“그런 게 뭐 효과가 있겠어?"
효과가 있든 없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기는 했다. 여튼 문루아 말대로 기도는 상황이 안 바뀌더라도 나를 돕기 위해 하는 거니까 말이었다.
하지만, 재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상황을 바꾸는 방법이 필요했다.
사실 그래서 천채왕의 TYB에 들어온 거였다. TYB는 2020년까지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국내 최고의 기획사였다.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해줄 능력이 있었다. 다만 지상파 3사의 공동 보이콧이라는 특수한 문제가 생겨 해결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우리가 취해야 할 일이 확실히 보였다. 내가 재호와 하늘이에게 말했다.
"일단은 선생님을 믿어보자. 그러려고 TYB에 들어왔던 거니까.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뭔가 계획이 있어 보였잖아?"
재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니 말이 맞긴 한데. 이걸루 될까?”
“뭐 딱히 방법이 있는 거도 아니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나도 재호의 말에 동감했다. 여하튼, 음질이 좋지 않은 라이브 공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의 전략이지만 걱정이 들었다.
* * *
1주일 후.
내가 괜한 걱정을 했었다. 머리를 땅에 박고 반성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했습니다.'
천채왕 프로듀서의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의 전략은 그야말로 역발상이었다.
음질이 좋다기보다 적당한 음질에 현장감을 대폭 살린 음원을, CD도 아니고 MP3는 더욱 아닌, 카세트테이프에 팔겠다는 작전이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카세트테이프를 들어?' 내가 틀렸다. 그건 2020년의 생각이었다. 2006년은 아직 카세트테이프의 시대였다.
천채왕은 한정판 테이프를 발매했다. A면에는 일반적인 비원더의 '남녀본색' 싱글을, B면에는 라이브 실황 음원을 담았다. 카세트테이프고, 음질도 매우 좋지는 않다 보니 되려 희귀한 소품이 되었다. CD로 발매하지 않아서 mp3로 발매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다른 데서는 들을 수 없는, 팬과의 첫 번째 만남이 담긴 음원이라니 팬들은 놓칠 수 없었다. 팬들이 득달같이 카세트테이프를 산 덕에 앨범 판매량도 껑충 뛰었다.
카세트테이프 뿐만이 아니었다. 앨범 판매량이 오르자,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1주일간의 홍보 활동이 연쇄 작용을 일으켰다.
우선 사진집이 또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내심 근육질인 환희가 큰 관심을 받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화제의 중심이 된 건 재호였다. 재호의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외모가 사진 보정을 받으니 시너지가 엄청났다. 인터넷에서 사진집을 찍은 이미지들이 그야말로 초대형 화제가 되었다.
-재호는 대체 왜 이렇게 생긴거야… 영원히 사랑해주고 싶게. ㅠㅠ
ㄴ나도나도 재호오빠 더럽
ㄴㄴ 몇살인데 재호가 오빠임?
ㄴㄴㄴ알려 하지마 알면 다쳐.
-보란듯이 행복하자 원재호! 나만 봐~
ㄴ 나도 외모신동 행복 빌거거든?
ㄴㄴ 니 보라고 쓴거 아니거든?
ㄴㄴㄴ 님들 왜 싸움? 이거 웬 황당한 시추에이션?
‘하하.'
뭔가 2006년식 철 지난 유행어들이 섞였지만, 재호가 좌우지간 겁나게 인기가 많아졌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일단 외모가 화제가 된 다음에는 팬들의 적극적인 홍보로 재호의 연대 공대 학력까지 화제가 됐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신동' 소리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는 일화까지 널리 퍼졌다. 그렇게 재호는 '외모신동'으로 통하는 스타가 됐다.
재호가 뜨면서 생긴 또 하나의 나비효과가 있었다. 지상파 TV 출연이었다. 재호의 외모가 화제가 되자, 대체 왜 비원더가 지상파 TV에 나오지 않느냐 화제가 되었다.
-외모신동 원재호는 대체 왜 TV 안 나와요?
ㄴ 뮤직넷 출신이라 그럼. 케이블은 나와요. 거기서 보삼.
ㄴㄴ아 몰라 우리 집은 뮤직넷 안나온다고요. 왕짜증.
이런 대화가 인터넷에서 서서히 퍼졌다. 결국 이 불만이 지상파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해서 음반 판매량도 당당하게 주간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면서 더더욱 지상파의 '비원더 보이콧'이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음반 판매량 1위 가수, 하지만 지상파는 못 나온다고?]
-케이블 오디션 성공이 배 아픈 방송사의 태클 걸기
-시청자의 '볼 권리' 침해라는 말 있어
처음부터 우리와 괜찮은 관계였던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에서도 우리를 지원했다. 재호가 ‘얼굴을 볼 수 없는' 라디오에 계속 출연하는 것도 효과가 있었다. 재호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재호 팬들이 그야말로 사연 '테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지상파는 굴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