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완벽하게 균형이 맞춘 하모니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나와 재호, 환희의 볼륨이 밸런스가 잡혀 있었다. 세팅을 정확하게 잡은 덕분이었다.
싱긋 웃음이 나왔다. 재호와 환희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카드챕터 베리' 주제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욱 능숙해져서 시작부터 끝까지 화음과 하모니로 가득 채웠다. 제법 아카펠라 팀 같은 느낌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바로 함께 인사했다.
"Let's Be Wonder! 안녕하세요 비원더입니다!”
짝짝짝 관중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함성은 덤이었다. 환희가 능숙하게 마이크를 잡고 대화를 시작했다.
“캄사합니다! 저희가 홍대는 딱 일주일 만이네여. 그동안 저희 많이 보고 시프셨나여?”
"네에에~"
"왜냐면 저도 보고 싶었거든여!"
꺄아아 소리가 들렸다. 내가 보기엔 상당히 느끼했는데. 관객들은 좋아하니 뭐 됐다 싶었다. 꺄르르 웃는 관객을 향해 환희가 계속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요즘 시즌에 맞는 커버곡을 준비해씁니다.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인데여. 여러분 모두 따뜻한 기분 느끼시라고 '네 손길 따쓰한 뱅쇼처럼’ 준비해씁니다."
모두가 잘 아는 히트곡이 나오자 다시 와~ 하고 박수가 울려 퍼졌다. 바로 미도리의 기타 전주와 함께 무대를 시작했다. 박찬용은 잼베 하나만으로 드럼 부럽지 않은 리듬감과 그루브를 더해 주었다. 환희가 능숙하게 랩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다들 많이 늘었네.'
매일같이 공연하고, 연습하고, 이를 회의로 반성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먼저 한 제안이지만, 내 생각보다 10배는 더 빠른 성장이었다. 무대 사운드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부터 환희의 진행, 선곡 방향까지 모든 부분이 일취월장했다.
그 효과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공연의 위력이었다. 바로 눈앞에 관객이 우리의 무대에 반응했다. 그 환호 소리, 그 눈빛, 그 침묵까지 모든 부분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피드백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관객이 좋아하는구나, 저렇게 하면 관객이 좋아하지 않는구나를 바로바로 반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배영웅 매니저가 정리해서 회의에서 우리에게 전달했다. 덕분에 우리는 다음 무대에서는 이전에 했던 좋은 부분은 남기고, 별로였던 부분은 삭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점점 무대가 좋아지니, 무대는 물론 회의까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관객의 환호 소리를 들으니 이 무대가 영원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빨리 무대가 끝나고 회의를 하면서 반성하고, 더 나은 무대를 준비하고 싶었다.
물론 그 전에, 더 좋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공연이 끝나고 앵콜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앵콜 앵콜!"
"권노을 잘생겼다~~~"
공연이 끝나고, 함성과 환호가 이어졌다. 이전에 함성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좀 더 오랜 기간 이어졌다. 1주일 전에는 처음에 우리를 보는 반가움에, 연예인을 보는 반응을 보였다면 지금은 우리의 공연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는 박수였다.
* * *
공연이 끝난 다음 날, 점심시간 즈음에 모두가 TYB 회의실에 모였다. 전날 공연을 정리하는 회의를 위해서였다.
회의 참여자는 단촐했다. TYB 멤버 3인과 배영웅 매니저가 전부였다. 그리고 보고서를 전담으로 작성하는 직원이 한 명 추가되었다. 그녀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보고서만 전달했다.
'그렇다곤 해도 정말 딱 맞는 분을 데려왔단 말이야. 이게 TYB의 힘인가?'
인턴 직원의 이름은 김나리였다. 대학생 인턴을 학교생활과 병행 중이라고 했다. 그전에는 천채왕 프로듀서 직속 팀에서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배영웅 매니저가 지금 비원더 상황에 딱 맞다며 섭외해 왔다.
그녀의 특기는 '매뉴얼화'였다.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녀는 페이퍼 워크에 달인이었다. 그녀가 전달한 보고서에는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반응이 좋지 않았는지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3쪽짜리 '공연 매뉴얼'을 매일 리뉴얼해서 전달했다.
첫 페이지는 공연 전에, 두 번째 페이지는 공연 중에, 마지막 페이지는 공연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깔끔하게 한쪽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게 우리 공연이 일주일 만에 급격히 좋아진 비결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일주일간 분석한 결과도 더 들어 있었다.
[비원더의 공연은 초반에 3인의 하모니를 맞추는 부분과, 메인 보컬 권노을 아티스트가 강렬한 발라드를 부르는 부분에서 관객 반응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후로는 완만한 하향세를 보입니다. (각주 17)]
각주를 확인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세세하게 기록한 관객 반응 차이 기록이 적혀 있었다. 관객의 환호 데시벨부터, 박수 소리의 크기와 지속 길이까지, 모든 부분의 데이터가 보고서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비원더 3인이 화음의 팀워크로 압도하거나, 내가 메인 보컬로 가창력을 보여주는 부분이 확실히 가장 임팩트가 컸다.
환희가 이를 토대로 공연 셋리스트를 다시 짜보겠다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 셋이 하모니를 짜는 부분과, 노을횽이 강렬한 발라드를 부르는 부분. 이 두 개를 중심으로 짜야 할 거 같아여. 공연의 처음과 클라이맥스를 책임져주는 부분이어야 할 거 같네여."
재호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동의의 표시였다. 재호가 말을 이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나랑 환희 너까지 둘은 잔잔한 발라드 선곡보다는 노을이랑 차별화되는 선곡이 좋을 거 같구. 비슷한 노래면 비교되거덩."
"마자요 횽. 저는 좀 비트가 강렬한 힙합 같은 곡을 골라볼게여. 팝송에다가 가사만 한글로 개사한 곡도 조흘거 같아여."
"그럼 나도 나만 할 수 있는 걸 해볼게. 노을이는 알앤비 발라드. 환희 너는 힙합 비트의 알앤비니까 나는 월드뮤직이나 아예 변주를 줘도 좋겠네.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만돌린을 써볼까?"
배영웅 매니저가 거들었다.
"재호 아티스트님. 뭔가 필요한 악기가 더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시면 일본에 직원을 보내서라도 공수해 오겠습니다. 말씀만 주세요."
"아! 그럼 저 다른 건 괜찮구. 우쿨렐레가 하나 있음 좋겠는데요."
배영웅은 바로 직원에게 전화해 고급 우쿨렐레를 주문했다.
내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척척 비원더의 공연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이 공연 브랜드가 우리의 무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내 선택이 옳았다. TYB는 연예 기획사 중에는 이례적으로 '회사의 힘'이 강했다. 연예인이 아닌, 직원들의 힘, 시스템의 힘이 있었다. 이게 TYB가 다른 여타의 연예 기획사보다 오래 가는 비결 중 하나였다.
레전드 가수 오창선과는 이전 생에 함께 세계 최고의 밴드, U2의 공연을 간 적이 있었다. 의외로 멤버들 나이가 나이인지라 연주 자체는 그냥 그랬다.
하지만 공연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매 공연마다 치밀한 컨셉이 있었다. 게다가 공연하는 국가의 맥락과 상황에 맞춰 조금씩 무대도 바꿨다. 이 모든 것은 U2 멤버들의 유능함이라기보다는 그 밑의 직원들의 실력이었다.
오창선이 공연 끝나고 내게 해줬던 말이 귀를 아른거렸다.
"야 노을아 명심해. 비틀스도 매니저 사망 이후로 그냥 해체했어. 가수 혼자 위대한 게 아냐. 직원까지 포함한 팀이 위대한 거야. 직원한테 주는 돈 아까워하지 마."
"하하 형님. 저는 데뷔도 못 했는데요."
"니는 분명히 데뷔 할 거야. 니처럼 노래 잘하는 놈은 데뷔해. 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뭐 다음 생이라던가?"
"아 그럼 안되죠!"
...그러고 보면 오창선 선배의 장난 같은 말이 좀 예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여튼, 오창선 선배의 조언이 맞았다. TYB는 대형 기획사이니만큼 회사가 가져가는 돈 비율도 낮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유능한 직원들이 많았다. 그 직원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벌써부터 깨닫고 있었다. 대학생 인턴이 이렇게 공연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문서 작성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되겠어,.'
그렇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트롤러'가 없는 회의는 이만큼이나 쉬운 것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내 멘탈이었다. 최대한 안 보려 했지만, '잇츠쇼타임'이 계속 눈에 밟혔다.
잇츠쇼타임은 비원더가 참여하지 못하는 지상파 방송을 그야말로 폭격했다. 3사 음악방송은 물론 온갖 유행하는 예능방송에 죄다 출연했다. 순식간에 인지도를 쌓았다. 음악 순위도 순식간에 올라 1위를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앨범 판매량도 50만 장을 순식간에 넘겨, 30만 장을 넘긴 비원더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판매량을 자랑했다.
물론 언젠가는 우리가 넘길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지시한 대로 사진집이라도 나오면 반전의 계기가 생길까?’
사실 그 정도로는 어려워 보였다. 뭔가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그때, 배영웅이 우리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오늘은 지하에 메인 녹음실로 가 보실까요?"
무심코 내가 물었다.
"지하 녹음실이요?"
환희가 핀잔을 줬다.
"오늘 녹음한다고 했었잖아요 횽."
“아 그러고 보니. 무슨 녹음을..."
배영웅이 항상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직접 가 보시면 알 겁니다."
* * *
지하 녹음실은 처음이었다. 새카만 암흑이었다. 전등을 키자 비로소 미니멀한 녹음실이 보였다. 얼핏 봐도 이전 녹음실보다 훨씬 녹음 시설이 좋아 보였다.
미도리와 박찬용이 이미 나와 있었다. 가진 것은 단촐한 잼베와 어쿠스틱 기타뿐이었다. 여기에 공연을 하면서 재호는 셰이커, 환희는 탬버린을 추가했다. 딱 버스킹 밴드 멤버 구성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둘에게 인사를 걸었다.
"또 뵙네요. 거의 매일 뵙는 거 같습니다."
박찬용이 툴툴대며 대답했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돈을 많이 줘서 오는걸세."
"네네 선배.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슬쩍 미도리를 봤다. 근데 뭔가 미도리도, 박찬용도 기색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 웃음을 참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녹음실인 건 사실이고. TYB의 사옥인 것도 사실이고. 거짓말을 할 게 있나?'
슬쩍 배영웅을 쳐다봤다. 만약 뭔가 몰래카메라라도 있다면 그와 관계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전혀 아무런 수상한 기색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지만 뭔가 사무적인 태도였다. 전화로 키미 녹음 디렉을 봐줄 키미 프로듀서를 호출했다.
키미는 화려한 와인색 더플코트 차림으로 녹음실에 들어왔다. 들어 오자마자 그녀가 우리에게 말했다.
"자자 녹음하겠습니다. 오늘은 원테이크로 할 거예요. 현장감 살릴 겁니다. 긴장해서 해주세요."
환희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원테이크여? 안 돼여. 저 가끔 음 틀린단 말예여. 쌤 봐주세여~,"
키미가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안됩니다. 선생님이 신신당부했어요. 게다가…”
키미가 손짓을 했다. 갑자기 휙! 소리가 나더니 우리 녹음실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벗겨졌다.
알고 보니, 우리 녹음실은 개방형 방음 유리로 둘러싸인 구조였다. 큰 검은 천으로 덮어서 검은 방으로 보였던 것이었다. 검은 천을 열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비원더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걸로 볼 때 우리 팬으로 보였다.
“꺄아아아아아!"
함성이 진동이 되어 방음 유리를 뚫고 녹음실 안으로 전해졌다.
키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겠죠?”
'녹음을 빙자한 공개 팬미팅이었던 거냐!'
아니, 그건 좋은데 깜빡이 좀 키고 해달라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