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89화 (89/280)

제89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놀이터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생각보다 빠른 페이스였다.

오랜만에 사람 없는 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던 예측은 완전히 어긋났다. 심지어 옆에서 무대를 하던 인디밴드도 연주를 멈추고 우리 무대를 보기 시작했다.

환희가 마이크에 대고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비원더입니다."

엄청난 함성 소리가 들렸다. 귀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

환희가 당황한 티를 최대한 없애고 말을 이어갔다.

"감사합니다. 바로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미도리가 통기타 줄을 튕기는 걸 신호로 연주가 시작됐다. 비원더 3인이 함께 불렀던 레퍼토리인 '오명'이었다. 이전의 클래식 느낌이 나던 곡을 이번에는 어쿠스틱 기타 하나, 젬베 하나의 미니멀한 편곡으로 준비했다.

<나를 떠나지 말아줘,>

재호가 잔잔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바로 내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너를 사랑해. 말하지 못했지.>

나를 포함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다. 평소에는 전문 공연장에서 엔지니어가 맞춰준 음향 세팅에서 불렀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없었다. 길거리 버스킹 상황에서 날것으로 노래를 들으니, 내가 다른 둘보다 성향이 좀 많이 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열쇠를 어디에다 둔 거야.

가르쳐줘. 그러면 내가 찾겠어.>

재호의 성량은 B+, 재호는 B에 불과했다. 내 목소리가 다른 멤버를 죽일까 봐 조심조심 부르다 보니 노래에 집중이 안 됐다.

'이거 이렇게 하다간 관객들이 관심을 끊겠어.'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바로 환희에게 부탁해 다음 곡 선곡을 바꿨다.

내가 요청한 곡은 내 솔로곡 레퍼토리인 'Just Once’였다. 오디션에서 처음으로 불렀던 그 곡이었다.

곡 소개 없이, 바로 잔잔한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관객들이 쥐죽은 듯, 내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혼자 부르니 훨씬 마음 편하게 내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 * *

다행히 첫 버스킹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팬들이 엄청난 함성과 함께 다가왔다. 짧게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배영웅과 함께 대기 중인 차로 들어갔다. 차에 들어가자마자 환희가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을 걸었다.

"횽 진짜 대박이어써요! 'Just Once' 반응 너무 좋던데요?"

재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걱정했는데. 환희 솔로곡부터 관객들이 완전히 우리 무대에 몰입하기 시작하더라구."

물을 꿀꺽 삼킨 후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사실, 태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무대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처음이다 보니 어쩔 수 없던 면은 있었다. 하지만 들뜰 정도의 무대는 전혀 아니었다.

슬쩍 배영웅 매니저 얼굴을 봤다. 대형 기획사 소속 매니저 경력자니 객관적인 반응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배영웅도 약간 설레이는 듯,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쩍 배영웅에게 질문했다.

“매니저님 뭔가 기분이 좋으신 거 같네요?"

배영웅 매니저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파람으로 본인이 틀어 놓은 스티비 원더의 'Superstition'의 기타 연주를 카피하는 중이었다. 내 질문에 그는 휘파람 부는 걸 멈추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는 봤어요. 환희 아티스트님."

"뭘요?"

"관객들 입이 '딱!' 벌어지는걸요. 노을 아티스트님 처음 노래를 시작했을 때. 그 톤에 테크닉에 무엇보다 성량. 아예 짐작도 못 한 모양이던데요?"

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That's right. 그럴 쑤 있겠네여. 저도 처음에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었거든여. 방송에서는 음향을 깨끗하게 다듬으니까 듣긴 좋은데. 횽 성량이 잘 전달은 안된 거 같아여."

재호도 말을 보탰다.

"실제로 듣는 거랑은 현장감이 다르니까. 나도 맨날 듣지만 놀라거덩~. 처음에는 뭔가 싶지. 노래에 압력이 느껴지니까."

내 노래 실력이 인정받으니 당연히 기분은 좀 좋았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면 안 됐다. 단점이 너무 많은 공연이었다.

"고맙습니다. 근데 그래서인지 조금 저희들 음향 밸런스가 안 맞더라고요.”

배영웅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조금 손을 대고, 재호 아티스트께서 세팅을 바꿔 주시긴 했는데 여전히 좀 어색하더라고요."

바로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슬쩍 모두에게 제안했다.

"저희, 앞으로 모든 무대 끝나면 회고 회의하면 어떨까요?"

배영웅 매니저가 되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했다.

"회의요?"

* * *

음악은 예술만이 아니었다. 업무기도 했다. 이전 생에서 레전드 가수 오창선의 콘서트 투어에 코러스로 참여하면서 느꼈던 생각이었다.

공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무대 장치부터 스크립트, 조명, 연주 등등 다양한 요소가 합쳐진 종합 예술이었다. 이건 가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오창선은 동고동락한 매니저가 오창선의 1인 기획사의 대표로 모든 부분을 진두지휘했다. 밴드와 코러스 등 음악적인 부분만 오창선이 맡았고, 그 외에 모든 분야에서는 매니저가 책임을 졌다. 둘의 콤비 플레이가 오창선의 공연이 훌륭했던 이유였다.

이를 보며 나는 느꼈다. 우리도 하나의 체계가 필요했다. 이를 통해서 비원더라는 회사가 점점 더 개선되어야 했다.

이런 의도를 멤버들과 배영웅에게 말했다. 이전 생에 대한 이야기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재호와 환희도 듣고 난 후에는 금방 납득했다. 배영웅은 대답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운전 중이었다. 더 이상 휘파람도 불지 않았다.

일단 그가 원하는 만큼 시간을 주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스티비 원더의 앨범을 한 바퀴 거의 다 들었을 때 즈음, 배영웅이 입을 열었다.

"회의 준비를 어떤 직원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하지만 너무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선생님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승낙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말을 이어갔다.

"아 그러면… 괜찮은 거지요?"

배영웅이 완전히 자기 페이스를 되찾은 듯, 평소의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원더 만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개선하려면 풀타임 직원이 적어도 하나는 필요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는 건, 재계약은 무조건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시스템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요. 괜찮으시겠어요?"

슬쩍 재호와 환희에 눈을 봤다. 둘도 승낙의 분위기였다. 사실, 이미 이전부터 우리는 TYB만 원한다면 TYB와 하고 싶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미리 멤버들의 마음을 확인한 상태였다.

내가 배영웅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미리 계약서를 다시 쓸 수도 있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에게 한결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어차피 시스템을 개선하려면 안정적인 인력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재계약은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첫 공연은, 처음치고는 괜찮았다. 처음치고는 이란 말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TYB는 한국에서 가장 큰 대형 기획사 중 하나였다. 경험도 풍부했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 R&B 보컬 그룹 제작은 처음이었다. 최근 10년간은 아이돌 댄스 그룹 제작에 치중했다.

게다가, 음악방송을 못 나오는 신인이라니, 이런 상황도 처음 겪어보는 일일 터였다. 지금부터 우리가 헤쳐나가는 일은 TYB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최초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더 보람이 있는 법이지.'

지금부터가 진짜 본 게임이었다.

* * *

이후 1주일간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선 하루에 한 번씩 공연을 했다. 장소가 잡히면 바로 버스킹을 진행했다. 비는 시간에는 노인정이나 고아원, 병원 등 공연이 필요하다는 곳을 자진해서 찾아가서 기습 자원봉사 공연을 다녔다. 홍보 기사는 절대 내지 않았다. 비밀리에 갔을 때, 관객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다른 세팅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일주일 만에도 공연이 익숙해졌다. 천채왕의 권고로 주 1회는 공연을 쉬면서 목을 쉬게 했다.

홍보 활동도 계속해 나갔다. 지상파 방송이 안 되니, 잡지부터 신문까지 온갖 인쇄 매체는 죄다 나갔다. 라디오 활동도 계속했다. 때로는 3인 완전체로, 때로는 1명씩 나누어서 가능한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우리를 알렸다.

천채왕의 제안으로 책도 준비했다. 책이라고는 하지만 잡지나 사진집에 가까웠다. 베네치아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사진과 슈퍼스타 T 촬영 당시 사진들을 잔뜩 모았다. 여기에 우리가 앨범 작업하면서 찍은 사진들도 잔뜩 포함했다. 환희의 가사 노트들과 아직 가사로 사용하지 않은 메모들도 잔뜩 담았다. 이 사진집도 가능한 한 빠르게 인쇄해서 홍보용으로 배포하겠다고 천채왕이 제안했다. 아직은 인쇄 매체가 영향력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니 뭔가 파괴력은 아쉬웠다. 뭔가 더 강한 계기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왠지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이라면 뭔가 비장의 한 수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정도 뻔한 미래는 굳이 mp3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많이 버스킹이 익숙해졌다. 하루 쉬니 컨디션도 최고조였다.

이번에는 한 번 해봤던 곳에서 다시 하는 공연이었다. 바로 홍대 놀이터였다. 이미 익숙한 곳이다 보니 더 마음이 편했다. 왠지 오늘 공연이 이제까지 공연 중 최고의 공연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비원더 3인 멤버는 언제나처럼 배영웅이 운전하는 볼보를 타고 하오대 놀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강남 TYB 본사에서 홍대까지 건너가는 중이었다. 전국을 돌다 보니 한강이 내 방처럼 편안했다. 차 안에는 디안젤로의 'Devil's Pie'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재호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늘하고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죠?”

배영웅이 미소를 띤 채로 대답했다.

"버스킹이 전부입니다. 내일은 녹음 일정이 있어서 공연은 없습니다."

환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했다.

"녹음이여? 당분간은 싱글 앨범 활동만 하는 거 아닌가여?"

"선생님의 '비장의 무기'를 녹음하신다고 하네요. 되게 잘할 필요는 없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라 하셔도… 녹음은 긴장이 되네요. 게다가 TYB의 녹음이라면 더더욱."

배영웅이 하하 웃더니 나를 위로했다.

"아아. 이번에는 정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시니 마음 편히 먹으시면 될 거 같아요. 그보다는 당장 공연 준비에 집중 해주세요. 5분 내에 도착합니다."

벌써 합정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곧 도착이었다. 간단하게 립트릴로 목 워밍업을 하면서 어제 회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대로만 하면 문제없었다.

문이 열렸다. 바로 비원더 3인은 자기 장비를 챙겨서 홍대 놀이터로 올라왔다. 박찬용과 미도리 및 스태프도 착착 무대 세팅을 끝내 놓았다. 1주일 만에 훨씬 체계가 잡혔다.

앉자마자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에는 한결 여유 있게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벗자마자 우리는 마이크에 대고, 한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길거리를 걷던 행인들의 시선이 단숨에 우리에게 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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