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88화 (88/280)

제88화

천채왕 통화 내용은 담백했다.

-3시간 뒤에 회의하자. 사무실로 와.

이 말이 전부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전화 통화 하나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회의가 당연히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재호와 환희가 한숨을 쉬었다. 뭔가 희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별다른 말이 없어 실망한 모양이었다.

운전 중이던 배영웅 매니저가 말했다.

“천채왕 선생님은 의미 없는 회의는 하지 않으세요.”

재호가 말을 살짝 흐렸다.

"그 말씀은..."

"뭔가 대책이 있으실 거 같아요."

환희가 한숨을 쉬며 말을 뱉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네여."

운전을 하던 배영웅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3시간 남았는데요."

잠시 고민했다. 오늘 스케쥴은 이미 끝나 있었다. 신문사 인터뷰였다. 그 외에는 일정이 없었다. 방송 스케쥴이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사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뮤직넷에서 만든 뮤직비디오와 음악 제작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예능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타이틀곡 ‘남녀본색'을 포함한 미니앨범도 반응이 좋았다. 싱글에 담긴 각 멤버들의 솔로곡 3개도 호평이었다. 신곡 4개에 타이틀곡의 리믹스와 인스트루멘틀 버전밖에 없는 조촐한 앨범임에도 판매량도 주간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좋은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역시나 문제는 지상파였다. 지상파 방송을 통해 멤버들을 알리는 과정이 불가능해졌다. 뮤직넷을 보지 않는 다수의 시청자들은 비원더를 볼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도 문제였다. 예능 출현이 적으니, 자연스럽게 TV 프로그램 말미에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도 어려워졌다. 뮤직비디오의 노출이 줄어든 셈이었다. 기껏 외국까지 가서 찍은 뮤직비디오가 무소용이 돼버렸다.

뮤직비디오 노출이 줄어들자 또 하나 문제가 생겼다. 음악방송 순위였다. 음반 점수와 투표 성적이 매우 뛰어났음에도 뮤직비디오 점수가 낮아서 음악방송 순위가 높지 않았다. 애초에 지상파 음악방송에는 초대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수혜를 본 그룹이 있었다. 잇츠쇼타임이었다. 잇츠쇼타임은 지상파 방송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다. 특히 메인 멤버인 '앤젤'에 대한 푸쉬는 좀 심할 정도였다. 좀 뻥을 보태서 하루걸러 한 번씩 TV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연예인적인 인기를 발판으로 음악방송에도 출연했다. 방송 3사의 무대 모두 좋은 시간을 배정받아 푸시를 받았다.

<루루루루루~ 워~>

마침 자동차 내 라디오에서 '잇츠쇼타임'의 데뷔곡, '홀릭'이 흘러나왔다. 배영웅이 불쾌한 듯 혀를 차며 라디오 채널을 클래식 채널로 돌려 버렸다. 클래식 채널에서 선곡한 국악이 울려 퍼졌다.

<북천~~이 밝았거늘~>

내가 배영웅에게 말했다.

“조금 미리 사무실 근처에 가도 될까요? 가서 마음속으로 정리를 좀 해보고 싶어서요."

배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회사 사무실에 빈방을 준비해두겠습니다."

* * *

순식간에 3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재호는 묵묵히 신문들을 읽었다. 환희는 태평하게 낮잠을 잤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그의 본체는 섬세하고 예민한 주하늘이니까.) 나는 새벽마다 mp3를 통해 얻었던 정보들을 연결해서 내가 할 제안들을 다듬었다.

시간이 되어 천채왕 프로듀서의 사무실 방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한강뷰가 보이는 고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천채왕 프로듀서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 왔니? 편한 자리 앉아."

자리에는 천채왕 프로듀서가 편안한 블랙 니트에 블랙 면바지 차림으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천채왕이 물을 우리에게 따라주려 하자 배영웅이 잽싸게 대신 물을 따라주었다. 천채왕이 말을 시작했다.

"아 고마워요 배 실장. 이게 엄청 좋은 물이야. 오염 물질이 나오기 어려운 곳이 따로 있거든. 이게 빙하에서 나온 물인데..."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에도 천채왕의 건강 음식 사랑은 죽지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 믿을 수 있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 이유를 들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눈치를 주자 비로소 천채왕 심사위원이 본론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그래. 사실 좀 분위기가 무겁다 보니까.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좀 풀어보고 싶었어. 어때?"

재호와 환희는 침묵했다. 둘 다 천채왕 프로듀서만 만나면 긴장하는 타입들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대화를 이어가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네 아무래도. 요새 스케쥴이 별로 없다 보니 걱정이 다들 많습니다. 차라리 몸이 바쁘면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할 텐데요."

“그러게. 너희들, 좀 바빠도 괜찮겠어?"

환희와 재호가 잽싸게 '네!'라고 대답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지금은 바빠지고 싶을 때지. 신인이니까. 우선 지상파랑은 내가 직접 담판 중이야.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오늘도 이 미팅 끝나면 바로 방송사 간부들 만날 거고. 당분간은 내가 좀 바쁠 거니까, 무대 피드백은 배영웅 실장에게 좀 맡길게."

배영웅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여지까지 천채왕은 우리의 모든 방송을 상세하게 본 다음 하나하나 피드백을 해줬다. 너무 상세해서 완벽주의자인 재호도 놀랄 정도였다. 노래와 멘트는 물론, 노래 끝나고 손을 어느 자리에 둘지 각도까지 꼼꼼하게 의견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기주장을 강요하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정확하게 우리의 의견과 본인의 생각에 중간 지점을 찾아냈다. 그렇게 완성된 천채왕 프로듀서의 제안을 그대로 다음 무대에 따르니, 정말 우리가 보기에도 이전 무대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괜히 가요계 최고의 프로듀서가 아니다 싶었다.

이제는 그 피드백을 당분간 배영웅 매니저가 대신할 예정이었다. 천채왕이 계속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지상파에 출연할 수 있을 리는 없지. 그래도 1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아무리 2005년이라고 해도, 1주일의 방송 공백은 큰 타격이었다. 이미 앨범이 한창 탄력을 받고 있는 참이었다. 이 중요한 일주일간 딱히 할 일이 없다 하니 캄캄했다. 뭔가 해야 했다.

재호가 담담하게 물었다.

“만약 1주일 안에 담판을 지으셔도, 그 이후에 섭외를 하고 방송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렇지. 그것도 문제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넘게 걸리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올해는 선거 같은 이슈가 없어서 방송은 그대로 진행되니까."

'선거라…’

그때 뭔가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버렸다.

"선생님 그동안 저희 선거 유세처럼 활동해보면 어떨까요?”

“선거유세? 무슨 뜻이야?”

"TV가 우리를 막아서 팬들을 못 본다면. 팬들에게로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 어떨까 싶어서요. 버스킹처럼."

"버스킹이라… 연예인이 그런 거 할 수 있겠어?"

"저희는 신인입니다. 연예인이어서 방송 무대만 설 수 있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렇지?"

이것만은 재호와 환희도 동의했다. 재호가 말했다.

"무대가 고파서, 동네 노래방이라도 가고 싶을 지경이라구.”

천채왕이 파하하 웃었다.

"야 니들 순간 시청률 30% 돌파한 오디션 한 애들이야. 쫀심이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환희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쫀심보다 무대가 먼져니까여!"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천채왕이 배영웅 매니저에게 말했다.

"배 실장님."

"네."

“얘들 제대로 길거리 공연, 버스킹으로 스케쥴 채워 줘요.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성 이사한테 이야기해서 라디오, 신문, 잡지 일정을 채워줄게요. 지상파 방송국 외에는 다 괜찮을 거니까.”

성 이사라고 하면 말로만 듣던 TYB의 홍보 이사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뭔가를 수첩에 적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천채왕은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도 지시를 했다.

"버스킹을 하려면 어쿠스틱 편곡의 레퍼토리가 엄청나게 많아야 해. 해봐서 알고 있지? 돌발상황도 많고,"

그러고 보니, 이전에 베네치아에서 했던 버스킹은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오히려 선곡이 쉬웠다. 이제는 아니었다. 어디에서 할지 모르지만 그곳의 분위기, 연령대, 성별, 취향 등을 모두 대비해야 했다. 우리를 아예 모르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어떤 장르까지 선곡 범위를 넓힐지 그 기준도 따져야 했다. 연주와 노래 준비할 생각을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없었다.

배영웅이 모두에게 말했다.

“버스킹 밴드 최소한 인원으로 준비하고, 밴드 연습실 준비하겠습니다."

* * *

몸이 바빠지니까 한결 살만했다. 역시 막연한 불안이 문제였다. 불안할 틈도 없이 뭔가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베네치아에서 함께 연주했던 문루아의 밴드가 바로 섭외됐다. 버스킹 위주의 한결 가벼운 악기 구성이었다. 함께 비원더 3인의 노래와, 각자 부를 노래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60대 이상을 위한 트로트부터, 혹시나 모를 어린이 및 미취학 아동을 위한 애니메이션 주제가까지 온갖 선곡을 준비했다. (마법 소녀 노래를 해봤던 경험이 또 도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배영웅 실장은 그사이에 전국 지자체에 연락해서 온갖 스케쥴을 잡았다. 하루에 두 번씩 전국을 횡단하는 강행군 스케쥴이었다. 심지어 돈도 안 되는 스케쥴이었다. 오히려 자동차와 배영웅 매니저,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니 돈이 나가는 스케쥴이라 보는 게 맞았다.

그래도 배영웅은 오히려 우리를 다독여주었다.

“어차피 처음에는 다 투자니까요. 무대만 생각해주세요."

우리도 더욱 무대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바로 우리는 첫 버스킹 무대를 잡았다. 무대는 홍대였다.

* * *

홍대 거리 중심에는 놀이터가 있었다. 나도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갔던 곳이다. 2010년대에 수많은 스타 가수들이 홍대 놀이터에서 공연을 하며 실력을 쌓았었다.

오늘, 우리도 이곳을 첫 버스킹 장소로 정했다. 다양한 옵션이 있었지만 내가 좀 고집을 부렸다. 미래를 아는 나로서는, 이곳에서 첫 버스킹을 시작하면 나중에 이곳이 버스킹의 상징이 될 운명이기에, 상징적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비원더 3인과 기타리스트 미도리, 그리고 잼베와 퍼커션에 박찬용 드러머. 5인의 단촐한 구성이었다. 모두 롱패딩에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일단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였다.

나는 이전 생에서 몇 번인가 홍대 놀이터 버스킹을 해본 적이 있었다. 능숙하게 가장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악보대를 폈다. 박찬용 드러머를 도와 악기 세팅을 도왔다. 박찬용 드러머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인디밴드라도 해봤나. 어떻게 이렇게 버스킹 준비를 잘하나?"

“그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

‘이전 생에서 많이 해봤습니다 하면 미친놈 소리 듣겠지.'

세팅이 완료되었다. 배영웅 매니저 및 스태프들도 안전을 위해 배치가 완료됐다.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비원더 3인이 일제히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고 10초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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