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너만을 원하는데
무엇을 더하겠어>
노래를 부르면서 내 과거를 상상했다. 음악을 원하는데, 음악을 하지 못했던 이전 생을 떠올렸다. 음악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간절함을 그대로 음악에 담았다.
재호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눈썹을 치켜올리는 게 보였다. 재호와 환희 모두, 내 노래에 놀랐다는 티가 났다. 어제보다 더 깊어진 내 감정 표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팬들이 탄성을 질렀다. 반응이 좋았다. 스탯이 오른 효과가 바로 느껴졌다.
오창선 선배의 조언이 맞았다. 노래를 잘하려면 글을 쓰라니, 얼핏 보면 말도 안 되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과거에 내 감정을 자세하게 적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감정을 적다 보니 내 과거의 수많은 경험이 새롭게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자기들끼리 새롭게 연결하고, 새로운 맥락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남녀 본색'은 남자 화자가 여자친구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고백하는 곡이었다. 겉보기에는 태연한 척하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이 곡이 보다 보니 나와 음악의 관계와 비슷했다. 매일 음악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음악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고 있었다. 뭔가 티를 내면, 사실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전혀 다른 감정이지만, 이를 덧붙여보니 오히려 노래가 깊어졌다.
"꺄~~~"
팬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어느새 노래는 2절을 넘어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점점 미칠 것 같아
참을 수 없어.
너를 사랑하는 것
그건 본능이야>
비트가 조금씩 쌓였다. 메인 보컬인 내가 서서히 노래를 클라이맥스로 끌고 갔다. 키보드와 드럼이 켜켜이 겹치면서 음악을 강하게 끌고 갔다.
절정에서 우리는 또 하나, 새로운 기술을 썼다. 드럼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악기를 지웠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비원더 멤버 3명의 목소리로 채웠다.
<우우우~ 우우우우우우~>
비원더 3인의 화음이 깨끗하게 퍼졌다. 발음부터 바이브레이션, 심지어 숨 쉬는 방법까지 모두 서로에게 맞췄기에 가능한 온전한 하모니였다.
'이게 우리만의 특기지.'
이전에 '잇츠쇼타임'의 무대를 보면서 느꼈다. 개개인의 자질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앤젤은 우리 3인과 대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팀워크가 없었다. 4명의 잘하는 보컬이 서로 누가 노래 잘하나 경쟁하는 대결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비원더는 팀이었다. 서로 단순히 양보하는 게 아니었다. 다들 자기 개성은 최대한 살리면서도, 3명이 섞여서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기도 했다.
그 덕분에 우리의 노래는 3인의 합보다 컸다. '잇츠쇼타임'에는 없는, 비원더만의 강점이었다. 이 하모니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인 셈이었다.
다시 마지막 후렴 파트였다. 이제는 환희가 후렴을 불렀다.
<너만을 원하는데
무엇을 더하겠어>
재호는 가성으로 절묘하게 화음을 섞어주었다. 나는 위에서 애드립으로 다른 가사를 불렀다.
<무엇도 당연하지 않은걸
이 순간 너가 내 구원이야
비춰줘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단 하나에 빛으로>
관객의 소리가 조금 더 커지나 싶었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노래가 우리가 들어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노래에 몰입해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해 사랑해>
마지막, 읊조리는 듯한 3인의 하모니로 노래가 끝났다.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폭풍 같은 환호 소리가 들렸다.
"끼야아아아아아!"
* * *
함성 소리를 들으며 대기실로 들어왔다. 잇츠쇼타임 멤버들과 소인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배영웅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무 훌륭했습니다. 여기서 나가죠."
내가 물었다.
"왜죠?"
배영웅이 귓속말로 대답했다.
'적에게 정보를 알려주기 싫어서요.'
그대로 우리는 나갔다. 배영웅이 속삭이듯 말했다.
"무대 반응은 정말 좋았습니다. 잇츠쇼타임보다 훨씬 폭발적이었어요."
재호가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음 몇 개 나가서 걱정했는데."
사실 그 정도의 실수는 감정의 흐름을 깨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틀리는 게 더 사람들을 자극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았다. 기계처럼 완벽한 음정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다.
나도 이제는, 감정 표현에 이끌려서 가끔은 조금 계산보다 더 길게 음을 끌거나, 조금 더 세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전체 하모니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섞이는 약간의 변화에 오히려 사람들이 더 환호했다.
배영웅이 내게 물었다.
"노을 아티스트께선 어떠셨나요?"
"저요?"
"노을 님만 아무 말도 제게 안 하셔서요."
"아."
그러고 보니 재호가 말한 이후로 환희가 계속 들떠서 뭐라 뭐라 말을 했었다.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배영웅이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 있으셨나요?"
"아, 아닙니다. 그냥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대는 좋았습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역시 팬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각별하네요. 제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에 관객이 다 반응하고 피드백을 보내주니까요."
배영웅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부담스러우셨나요?"
"전혀요! 오히려 좋았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재호가 말을 보탰다.
"이번에는 또 다르더라구."
내가 재호에게 되물었다.
"뭐가?"
"여지까지는 오디션 프로였잖아. 다들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이었던 거지. 어쩌면 환호하는 게 당연한 거거덩~. 버스킹 할 때는 한 절반 정도는 우리가 나와도 시큰둥 했다구. 근데 이번은 달랐어. 우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까 한 명씩, 한 명씩, 우리 노래에 집중해주기 시작하더라. 마지막에는 거의 대부분 우리 노래에 집중했어. 그런 변화가 좋더라구."
환희가 옆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
"횽은 심지어 제일 헷갈리는 화음이 많으면서 그런 걸 다 봐써여? 저는 노래하느라 하나도 안 보이던데.”
재호가 핀잔을 줬다.
"니가 단순한 거거덩? 반응을 살펴야지."
"음악에 몰입해서 미쳐서 불러야죠 횽!"
‘...또 시작이구만.'
그러고 보니 오디션 때는 무대 준비 때마다 재호랑 환희는 티격태격했었다. 대개 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다퉜다. 음악을 준비하면서 환경이 바뀌어서 좀 소강상태인가 싶더니 다시 시작이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둘 다 서로의 음악 실력과 노래에 존중은 갖고 있으니까 팀을 할 수 있었겠지만, 둘은 그냥 너무 다른 타입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팀의 중심이란 뜻이었다.
갑자기 재호랑 환희가 나를 쳐다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노을이 넌 어떻게 생각해?"
"횽! 횽 의견은 어때요?"
“야, 왜 내게 불똥이 튀는 거야?”
마침 뮤직넷 출구에 도착했다. 출구 앞에는 낯익은 녀석이 서 있었다. 단발의 금발 머리의 남자, 앤젤이었다.
앤젤은 풍선껌을 짝짝 씹고 있었다. 나나 재호만큼 큰 키에, 긴 금발 장발까지 한 남자가 풍선껌을 씹고 있으니 한층 건방져 보였다. 풍선을 불고 있기까지 했다. 카메라 앞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니, 그래도 방송국인데 팬들이 보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하긴 지금은 안 보이긴 하네.'
그때 앤젤이 말했다.
"노래 잘하시던데? 아.주.잘.들.었.습.니.다."
뭔가 미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배영웅이 대답했다.
"잇츠쇼타임에 멤버시죠? 데뷔 무대 잘 봤습니다."
"그야 뭐 저희 무대가 워낙 훌륭하니까요. 아니다. 솔직히 저만 괜찮았죠. 나머지는 그냥 그랬으니까. 맞죠?"
나는 물론, 재호랑 환희까지 침묵을 지켰다. 뭔가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오만하면 모르겠는데 은근히 자기 에고를 드러내서 뭐라 말을 얹기도 껄끄러웠다.
앤젤이 내게 말했다.
"왜 대답이 없어? 나 말곤 그냥 그랬잖아?"
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가 말 안 하면 계속 뭐라고 지껄일 것 같아서.
"다들 노래 잘하시던데요."
"무슨 소리야. 니들처럼 실력이 삐까삐까 해야 하모니를 하지. 그놈들이랑은 하모니 못 맞춰. 어차피 안될 놈들은 짓밟아야지. 그게 시장이잖아? 왜 그래? 뭐 할 말 있어?"
말이 매우 싸가지가 없었다. 솔직히,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악에 차 있는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환희가 욱해서 뭐라 말하려 했다. 제지하고 대신 내가 말했다.
“우리 구면이던가요? 왜 초면에 반말을."
“내가 누군지도 몰라?”
"모르겠는데요."
앤젤이 얼굴을 구겼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나와 구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딱히 기억이 없었다.
앤젤은 우리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더니 '쳇'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는 체념한 듯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까마귀 고기를 드셨나? 기억력이 안 좋군."
"기억력?"
재호와 환희 얼굴을 슬쩍 봤다. 둘 다 뭔 엉뚱한 소리냐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출구로 나가자 바로 우리를 위해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볼보 차량에 앉자마자 환희가 우리에게 말했다.
"방금 그 사람 뭐예요? 반말을 찍찍하고. 그래 봐야 우리 나이대 정도인 거 같고 데뷔 동긴데. 게다가, 우리랑 구면이라고요? 기억에 전혀 없는데."
재호가 환희에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와 별개로 그 녀석. 노래 잘하던데."
환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퉁이긴 하더라구요 횽. 근데 다들 아는 사람이에요?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
"나도 초면이라구.”
묵묵히 둘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저런 녀석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그 녀석, 우리에게 뭔가 악감정이 있어 보였다. 단순하게 성격이 나쁜 것 이상의 뭔가 사정이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mp3로 시간이 날 때 확인해봐야겠다 싶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배영웅 매니저가 말했다.
"뭔가 걱정이긴 하네요. 정황상 소인중 씨가 우리 데뷔 일정을 알고 서둘러서 비원더를 저격하는 팀을 짜서 비슷한 시기에 낸 거 같거든요?"
내가 물었다.
“그렇게 빨리 가능한가요?"
"미리 준비되어 있는 팀이 있고, 기획을 조금 바꾸거나 하면 가능하죠. 여튼, 그렇다면 단순히 저희랑 활동이 겹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아요. 더 대놓고 뭔가 훼방을 놓을 거 같네요. 지금 생각하면, 저희가 지상파 방송 잡는데 고생하는 것도 소인중 씨가 배후에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강한가요? 최대 기획사 TYB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글쎄, 꼭 그의 힘이 전부라기보다 그렇게 되도록 '구도를 기획했다'는 것에 가깝겠죠. 여튼 뭔가 느낌이 좋지 않네요."
그리고 배영웅 매니저의 나쁜 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후 3일간 비원더의 일정이 전혀 잡히지 않고, 이미 있던 일정도 모두 취소되었다. 오디션 프로를 함께 했던 뮤직넷만이 의리로 기존에 준비했던 예능과 리얼리티 쇼를 예정대로 방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방송 일정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없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라디오 방송 하나 못할 판이었다.
'인디밴드도 아닌데, 인디 정신 지키게 생겼네.'
그렇게 다들 마음이 복잡해질 때쯤, 천채왕 프로듀서의 전화 연락이 왔다.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었다.
'역시나,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은 언제나 계획이 있는 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