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86화 (86/280)

제86화

무대에는 4인조 그룹이 서 있었다. 4명 모두 멀끔한 미남이었다. 순백의 턱시도를 입고 청혼가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우리랑 비슷했다. 아카펠라 위주의 보컬 그룹에, 미디엄 템포 알앤비 장르, 심지어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 편곡에 참여한 싱어송라이터 그룹이란 사실도 비슷했다.

그야말로 판박이 그룹이고, 다른 점은 멤버가 한 명 늘어났다는 점뿐이었다.

환희가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랑 너무 똑같잖아여? 심지어 옷도 비슷한데!”

내가 대답했다.

“그러게. 심지어 컨셉도 유럽이야. 아무래도, 우리랑 의도적으로 비슷한 컨셉을 가져 왔다고 볼 수밖에 없겠네."

화면 속 그룹의 무대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해 갔다. 점점 노래의 감정도 고조되었다. 4명의 멤버가 모두 자기 가창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애드립과 고음을 냈다.

그중에서도 딱 한 사람, 눈에 확 띄는 사람이 있었다. 4명 모두 어두운 머리카락이었는데, 딱 한 사람, 금발이 있었다. 그 금발 멤버가 매우 돋보였다.

무대를 보던 재호가 감탄하며 말했다.

"저 블론드 멤버, 장난 아닌데? 나머지 멤버들을 압도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블론드 멤버는 다른 멤버들과는 조금 달랐다. 더 풍성한 성량을 갖고 있었다. 리듬감도 달랐다. 다른 멤버가 교과서적으로 정박을 타고 있다면, 블론드 멤버만 살짝 느린 듯 정확하게 리듬을 타서 교묘한 리듬감을 주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노래만 윤기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모든 멤버가 경쟁적으로 고음을 터트렸지만, 결국 가장 돋보이는 고음 부분은 모두 블론드 멤버에게 몰빵이었다. 그는 매우 화려한 애드립을 넣어 파트를 소화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노래 잘한다."

환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횽이 더 잘해요."

"진짜?"

"...여지까지 본 사람 중 제일 횽이랑 근접한 거 같긴 한데."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적어도 나랑 비슷한 또래의 사람 중에는, 내가 이제껏 본 사람 중 제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리듬감이나 테크닉 같은 경우 나보다 더 나은 면도 있어 보였다. 스탯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시간이 나는 대로 바로 mp3를 켜보고 싶었다.

그 사이 무대가 끝났다. MC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팀명은 '잇츠쇼타임'이었다.

배영웅 매니저 얼굴이 굳어졌다. 재호가 물었다.

"실장님 무슨 문제 있으세요?"

배영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인중 씨… 소속사네요."

“소인중....!"

재호뿐 아니라 우리 모두 얼굴이 구겨졌다. 이탈리아에서까지 우리를 스토킹하고 다녔던 소인중이, 하필 우리와 똑 닮은 컨셉의 가수를 냈다. 우연이라 보긴 어려웠다. 우리를 훼방 놓으려고 작정한 그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인중의 모습이 오늘 뮤직넷에서 보였던 거군.'

우리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멤버들이 모두 자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나와 비원더 다른 멤버들, 그리고 배영웅까지 모두 블론드 머리의 멤버의 소개를 유독 집중해서 들었다. 블론드는 수줍은 듯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머리 기장이 볼 끝까지 내려오는 샤넬컷의 블론드가 백옥처럼 흰 피부에서 반짝거렸다. 날카로운 콧날과, 냉소적인 눈빛이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을 냈다. 눈빛과 달리 말투는 사근사근했다.

MC가 블론드에게 질문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블론드가 대답했다.

"앤젤이라고 해요."

"오. 앤젤… 좋은 이름이네요. 활동명인가 봐요. 팀 내 포지션은?"

"노래도 하고. 곡도 쓰고. 편곡도 하고. 뭐 다 해요."

"와~ 그럼 혹시 방금 만드신 곡도?"

"그래요. 제가 다 썼다고 보시면 돼요."

"와 대단하시네요."

“별 것 아니에요. 팀원들이 도와줬어요."

그러면서 앤젤이 주변 멤버들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뭔가 어색해 보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를 독려했다.

"자.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하죠. 곧 저희 무대에요."

대기실 문을 보던 내가 뭔가를 깨달았다.

"여기. 저희랑 잇츠쇼타임이 함께 쓰는 대기실이네요?"

"그야 신인이니까 같이 대기실을 쓸 때도 있… 앗...."

배영웅도 말을 하던 중 문제를 깨달았다. 하필 소인중의 소속 가수가 우리와 같은 대기실을 쓴다니, 누가 봐도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작진에 말해서 대기실을 옮기겠습니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익숙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옮기죠?"

소인중이었다. 라이더 가죽 재킷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유럽에서 봤던 때보다 더 무서워 보였다. 그 뒤에 검은 정장 차림의 매니저와 4인의 멤버들이 함께 들어왔다.

배영웅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배영웅 매니저 지난번에 잘 봤죠. 유도 실력이 아주 폭력적이시던데."

'지가 먼저 가택침입을 한 주제에.'

나는 최대한 무시하고 나가려 했다. 한 멤버가 내 갈 길을 막았다. 블론드 머리의 앤젤이었다. 앤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예의 바른 문장이었지만, 말투에 가시가 있었다. 내가 대답했다.

"저희 본 적이 있었나요?"

"벌써 저를 까먹었나요?"

"어… 모르겠는데요..."

"뭐 됐습니다. 이제는 필요 없어요. 제게는 새로운 장난감이 있으니까. 나만 떠받들어 줘야 하는 장난감들이."

그러면서 그는 쿡쿡 멤버들을 찔렀다. 카메라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사석에서는 굉장히 남을 짜증 나게 하는 타입이었다. 다른 멤버들이 불쌍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인중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앤젤과 다른 멤버들의 서열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모양이었다.

배영웅이 앤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이제 저희 무대 차례라서."

* * *

대기실을 나가자마자 환희가 투덜댔다.

“쟤네들 뭐해요? 엄청 싸자기 없네요."

"싸자기가 아니라 싸가지겠지."

환희의 한국말 서툰 교포 연기는 가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재호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우리한테 그러는 건 그렇다 치고, 자기들끼리도 썩 친해 보이지는 않구.”

환희가 말했다.

"게다가 기분 나쁜 게. 그러면서 무대는 엄청 팀워크가 좋아 보여써요. 그게 다 연기란 건데."

재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게. 그래도 노래 진짜 잘하더라. 하필 우리보다 먼저 무대를 해버려서 우리가 아류작처럼 보일 거 같기도 하구. 우리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마. 걔네들 보다는 우리가 훨씬 나아."

잇츠쇼타임은 비원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금 본 무대를 분석한 결과가 그랬다.

배영웅 매니저에게 화장실을 가도 되냐 물었다. 시간이 아직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허락을 받고 잽싸게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주머니에 넣어 둔 mp3를 꺼냈다. 그리고는 '잇츠쇼타임'의 멤버들의 스탯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다른 멤버들은 그냥 그랬다. 다만 앤젤의 스탯은 놀라웠다. 테크닉은 S였다. 최하는 톤 부분이었는데, 랭크가 B였다. 나보다는 못 하지만 거의 근접할 정도로 골고루 높은 스탯이었다.

하지만 걱정 없었다. 이유도 여러 개가 있었다.

우선 나도 그사이에 스탯을 많이 올렸다. SSS급이던 발성 말고도, 최근에 드디어 A+ 수준이던 '감정표현' 파트에서 진전이 있었다. S급으로 등급이 오른 것이다. 훈련을 통해 S급으로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

'설마 거기서 오창선 선배의 조언이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

* * *

1주일 전, 오창선 선배가 내게 했던 조언은 매우 뜻밖이었다. 일반적으로 음악에 대한 조언이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일기를 써봐.

일기를 쓰라니, 무슨 방학 숙제 같았다. 노래 실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국 노래는 단순 기능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이게 S급과 A+급의 차이였다. 감동을 압도적으로 줄 수 있어야 했다. 기능으로 접근해서는 S급이 될 수 없었다.

오창선은 일기를 통해 자신의 디테일한 감정을 적어보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겪는 온갖 다양한 감정이 다 활용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소인중이 나를 쫓아올 때 느꼈던 불쾌한 감정부터 동생과 연말에 문루아 선배의 연말 대상 받는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묘한 질투까지 모든 감정이 다 도움이 되었다. 이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매주 1번씩 확인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엮어서 글로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내 감정을 점점 더 세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노래는 결국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내 감정을 자세하게 알게 되니, 이 감정을 더욱 정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내 노래에 감정이 실렸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감정표현 스탯이 S까지 올라가 있었다.

S와 A+는 고작 한 단계지만, 차원이 달랐다. 나 혼자 내 노래를 녹음해서 들어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이전에는 '잘하네'라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내 노래에 나까지 찔끔 눈물이 났다.

이거라면, 비원더의 노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줄 수 있을 듯했다.

* * *

그리고 다시 1주일 후인 지금, 비원더의 첫 데뷔 무대.

어느새 무대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로 바뀌어 있었다. 비원더 3인 멤버가 장미를 하나씩 가지고 걸어 들어왔다.

"꺄아아아~~~ 주환희야~~~”

"재호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노을이 미간이 끼여 죽어버리고 싶다아~~"

팬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다행히, 이전의 '잇츠쇼타임'의 무대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최고로 화제성이 높았던 오디션 프로에 출연했었다. 전 국민이 그 프로를 통해 비원더가 어떻게 팀을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함께 체험했다. 당연히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우리의 실력이 아니었다. 이 기대감을 그대로 만족감으로 만들어 주는 건 우리의 무대가 해야 할 일이었다.

MC가 우리를 열정적인 톤으로 소개했다. '천상의 하모니'니, '최고의 팀워크'니 하는 진부한 수사들 투성이었다. 15년 전 감성이란 게 실감이 났다.

‘하지만 노래는 시간을 초월할 정도로 훌륭할 예정이지.’

잔잔한 전주가 흘렀다. 노래가 시작된 걸 깨달은 청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로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환희의 애드립이 들어갔다. 이윽고 재호가 담담한 저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왜 너를 사랑하냐니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니>

일부러 환희는 살짝 유치하고 귀여운 가사를 붙였다. 미디움 템포의 잔잔한 느낌에 잘 붙었다.

<그런 게 증명될 리 없잖니

너에 대한 나의 맘은 공리>

환희는 여전히 잔잔한 애드립으로 노래를 꾸며 주었다. 나는 '니' '리' 자 라임에 맞춰서 화음을 맞춰 재호를 보좌했다. 노래가 자연스럽게 고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노래가 후렴 파트에 이르렀다. 내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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