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조안이 데려온 곳은 대궐 같은 곳이었다. 다들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저택이 아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물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집을 찾으셨죠?"
"거부의 집인데. 마침 따님이 천신군단 팬이셨어요, 덕분에 유럽 지부랑 친해졌어요. 아티스트가 잘 되는 게 제일 지부에 도움이 돼요. 심지어 한국 대사관도 매번 저희랑 연락하세요."
천신군단 이야기를 들은 아폴로 빈이 싱글벙글 웃었다.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환희는 그런 아폴로 빈을 뚱하니 쳐다봤다.
내가 환희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는 더 큰 존재가 될 거야."
환희가 감동받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횽."
주방에서는 이미 고미진이 스태프와 함께 무언가를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 메뉴는 무려… 묵은지 김치찌개였다.
'설마 고미진 선배가 바로 그 재벌 집 딸일 줄이야."
이전에 내가 mp3로 확인한 미래에서 아폴로 빈과 결혼한 재벌 집 자녀의 정체는 고미진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굴지의 식품회사 YJ 그룹의 막내딸이었다. 전화 한 통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YJ 그룹이 묵은지 김치찌개를 공수해왔다.
고미진 선배가 냄비를 국자로 두드리며 공지했다.
"자 다들~ 오셔서 식사하세요~~~"
고급 저택의, 으리으리한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묵은지 김치찌개가 냄비째 나왔다.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특히 김치 냄새가 강렬했다.
내가 조안에게 물었다.
"이거 냄새 괜찮을까요? 저택에 냄새가 밸 텐데요."
"노우~ 괜찮아요. 한류 드라마 팬이셔서. 한류 배우가 같이 먹는다 그러니 오히려 좋아하시던걸요.”
"김치 냄새랑 마늘 냄새가 외국인에게는 굉장히 독할 텐데요."
"팬이니까 상관없어요."
다행히 괜찮다고 하니 상관 않고 먹었다. 먹으면서 '나도 외국인이 이렇게 한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니 온몸에 힘이 돌았다. 곁들여 먹는 술은 당연히 소주였다. 제일 신난 건 역시 환희였다.
“와 술이 다네요 횽!"
재호가 핀잔을 주었다.
"너 이탈리아에서 와인 엄청 먹었잖아? 이제 와서 갑자기 소주 파냐구."
“와인도 좋긴 한데. 역시 쏘주네요 횽. 저는 한국인인가 봐요."
슬쩍 옆자리를 봤다. 문루아가 고미진, 미도리 등과 함께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테이블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여성 멤버 3인이 같이 자지러지게 이야기 중이었다.
재호가 내게 물었다.
"왜 빤히 봐?"
내가 대답했다.
"기껏 6인 테이블을 잡았는데. 자연스럽게 우리끼리 이야기하게 되는 거 같네."
"그야, 아무래도 6인이 같이 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뭔가 좀 아쉬웠다. 고미진 배우와 미도리는 또 언제 만날지 몰랐으니 말이다. 조금은 더 대화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밥을 먹다 보니 시간이 술술 갔다. 어느새 김치찌개를 다 먹고 슬슬 자연스럽게 자리를 치우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배영웅 매니저가 무언가를 들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잘 드셨나요?"
고미진 배우가 해맑게 대답했다.
"네에~"
배영웅 매니저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장소를 찾아 준 조안과, 음식 준비해주신 고미진 배우님께 정말 감사해요."
고미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유~ 별말씀을 다."
어느새 배영웅 매니저는 자기가 들었던 물건을 책상에 놓으며 말했다.
"자! 일정 마지막이기도 하니. 단합회라도 해볼까요?"
재호가 물었다.
"단합회요?”
"네. 그냥 모이고 잠만 자서는 서로 친해지지 않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다 같이 보드게임을 하는 게 TYB의 전통입니다. 나름대로 프로듀싱 비결이랄까요?"
보드게임이 비결이라니, 제법 그럴듯했다. TYB는 아이돌 팀 전문 회사였다. 팀웍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TYB와 함께 앨범을 만들면서 깨달은 점이 있었다. 생각보다, 팀웍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TYB는 특히 시스템이 철저해서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배려해주었다. 오히려 일만 하면 다른 멤버와 부딪칠 일이 극도로 적었다.
아마, 직접 3명이 함께 프로듀싱하는 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미 오디션을 거쳐 친했던 팀이 아니었다면, 같이 활동한다고 꼭 팀이 친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런 액티비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배영웅이 가져온 것은… 보드게임의 정석 중의 정석, 젠가였다.
* * *
보드게임을 하다 보니, 게임 자체보다는 사람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평소에 잘 몰랐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미진 같은 경우, 굉장히 어설퍼 보였지만 사실은 고단수였다. 못하는 척 실속있게 게임했다.
"아이구~ 또 빼내 버렸네요. 운이 좋았네!"
구수한 말투와 겸손한 제스처로 숨겼지만, 상당한 고수였다.
그에 반해, 의욕은 앞서는데 실력은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의외로 재호였다.
꼼꼼한 재호는 젠가를 잘했다. 하지만 긴장하면 손이 떨리는 타입인지, 자꾸 틀렸다. 자기 기준이 높은 타입이라 그런지, 실패하면 더 심하게 자책을 했다.
우지끈!
또 탑이 무너졌다. 재호가 투덜댔다.
"아 잘 안되네."
내가 위로했다.
"뭐 못 하는 것도 있어야지."
"뭔 말이야?”
"공부 잘해. 옷 잘 입어. 노래 잘해. 작곡 잘해. 내 기억에 너, 농구도 잘 하지 않냐? 가끔 못 하는 것도 있어야지.”
"다 형들보단 못했다구. 그나마 잘했던 게 음악 하나야. 그것도… 좀 아쉽구 요샌. 로렌조 같은 천재에 비하면."
"조안 동생? 그 사람 그렇게 음악 대단해?”
"굉장해. CD 받아왔으니까 나중에 들어봐."
"그래.”
역시 공부를 잘하는 놈이라 그런지, 그 사이 외국인과 척척 말하고 친구가 된 모양이었다. 나야 mp3의 인위적인 도움을 받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재호는 정말 그냥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젠가 판에서는 손 떨리는 놈일 뿐이었다. 또 재호가 잘못 건드려서 탑이 무너졌다. 재호가 탄식했다.
"아~ 왜냐구!"
환희가 까불대며 말했다.
"횽 너무 못하는 거 아니에여?"
재호가 짜증 난다는 듯 쏘아붙였다.
“난 본 게임에 강하다구! 이런 게임이 오히려 떨려."
고미진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우리 뭐라도 걸까요?"
문루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 선배. 돈 거는 건 좀…”
고미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돈은 아니죠!”
“그럼 뭘 걸어요?"
고미진 선배가 뭔가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꼴찌가 여기 뒤풀이 장소 싹 다 치우고 가기! 어때요?"
내가 놀라서 대답했다.
"이걸 다요?"
슬쩍 봐도 스태프까지 포함해 30명은 먹었다. 치울 것도 많아 보였다.
"와~ 까짓거 해요 횽!"
환희가 신나서 분위기를 띄웠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이후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유력한 꼴찌 후보였던 재호가 갑자기 뭔가 걸리니 돌변해서 어려운 조각을 척척 빼냈다.
내가 재호를 슬쩍 말로 건드려봤다.
"너 설마 본 실력 숨긴 거냐?"
재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알려 하지 말라구."
원래 게임을 잘하던 환희, 고미진도 부드럽게 게임을 계속했다. 그전에는 두 바퀴도 못 돌았던 게임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구멍인 재호가 없어지자, 갑자기 치열한 경쟁이 됐다. 뽑아도 뽑아도 아무도 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내 차례가 왔다.
‘이거 더 이상 뽑을 나뭇조각이 남아는 있나?'
젠가탑이 거의 뼈대만 남아 있었다. 젠가에서는 한 층에 3개의 나뭇조각이 있다. 그중에 양옆의 두 개, 혹은 가운데의 한 개만 뺄 수 있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층에서, 가능한 모든 나뭇조각을 뺀 것 같았다.
찬찬히 맨 아래부터 맨 위까지 꼼꼼하게 찾아보니, 맨 위에서 바로 한 층 밑에, 딱 하나 뽑을 수 있는 나뭇조각이 남아 있었다. 왼쪽으로 빼면 되는, 매우 쉬운 조각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나뭇조각을 집었다. 쑥 빼내려는 순간, 내 바로 다음 차례인 문루아와 눈이 마주쳤다.
문루아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고, 얼굴은 빨개졌다.
'뭐지?'
정말, 꼭, 죽어도 꼴찌는 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나무 블록을 빼면, 문루아는 꼴찌 확정이었다. 더 이상 뺄 블록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루아가 눈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제발 실패해라!' 인지 '한 번만 봐줘요!’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간절해 보였다.
3초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이쿠! 떨어졌네!"
몰래 탑을 슬쩍 다른 손으로 툭 쳐서 무너뜨려 버렸다.
환희가 한껏 들떠서 나를 놀렸다.
"에~ 횽. 큰 경기에 약하시네요! 저거 되게 쉬운 건데."
미도리도 같이 놀렸다.
"노으루 군! 의외로 담력이 약해요."
나는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아 그러게 아쉽네. 떨렸나 봐. 뭐 어쩔 수 없지. 내기는 내기니까."
문루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 *
모두가 나가고, 집 정리를 시작했다.
패배했지만 기분은 후련했다. 덕분에 고미진과 미도리랑도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다들 깔깔대며 웃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갔다. 벌써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넘겼다.
냄비와 그릇들은 수거했고, 설거지까지 완료했다. 탁자들과 바닥만 한번 닦으면 될 듯했다. 문이 열리더니 문루아가 들어왔다.
내가 물었다.
"왜 돌아오셨어요?”
"같이 하면 시간 내로 치울 수 있을 거예요.”
문루아가 들어와서는 탁자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시간 내로요?"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요?”
"뮤비 촬영 마지막 날이잖아요."
문루아가 헛웃음을 큭큭 쳤다. 그러다니 내게 핀잔을 줬다.
"진짜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고 버스킹을 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 12월이라 캐롤을 좀 많이 부르긴 했… 아!"
“그래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이역 만리인데. 어디 갈 데라도 있나요?"
"성당은 있잖아요. 저는 성탄 미사는 가야죠."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이 났다. 문루아는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고 했었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성당을 가고 싶을 터였다. 게다가 여기는 카톨릭의 본고장, 이탈리아가 아닌가. 문루아 입장에서는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었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시간이 너무 부족해 보였다.
"먼저 가시죠. 저는 괜찮으니까."
"봐준 사람을 두고 어디 가요. 이거 가져가기나 해요."
둘이 힘을 합치니 순식간에 다 치우고도 시간이 남았다. 바깥을 나가니 문루아의 매니저와 배영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루아가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자 그럼 우리는 갈게요. 푹 쉬어요."
“저도 갈게요."
"왜요? 노을 씨도 성당 다녀요?"
"아뇨. 그래도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성당 미사 어떻게 하는지는 보고 싶네요. 심지어 크리스마스니까."
문루아의 말을 듣다 보니 뭔가 흥미가 동했다. 문루아를 따라 동네의 성당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다 보니 사람들이 북적였다.
문루아는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서 미사에 참여했다. 나는 매니저들과 함께 바깥 복도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는 노래하고, 앉았다 일어나고, 기도했다. 성당은 처음이었는데, 건물이 조용해서 뭔가 집중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미사는 자정이 되자 끝났다. 문루아는 후련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걸어왔다. 내게 말을 걸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선배."
매니저와 함께 4인이 다시 숙소로 걸어갔다. 자동차를 타면 더 빠르겠지만, 그래 봐야 5분도 안 되는 거리고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고 문루아가 말해 함께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문루아에게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어서였다.
“무슨 기도를 하셨어요?"
문루아는 엄청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했었다. 문루아가 대답했다.
"말 안 해줘요."
“하하. 근데 기도빨이 먹히긴 하나요? 아, 이건 실례인가요."
“먹힌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냐고요."
"바아~보. 기도는 빨이 먹히는 게 아니에요. 도와주는 거죠."
“돕는다고요?"
“신이 만약 있다면. 내가 기도로 떼쓴다고 신의 의견이 맨날 바뀌겠어요? 그러면 이미 전능한 신이 아니죠.”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근데 기도가 무슨 도움이 되죠?"
"도움이 돼요. 초월적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 존재의 시야로 나의 상황과 감정을 남의 시선에서 확인하는 거죠. 그러면 내 문제가 한없이 작아져 있어요. 내가 견딜 수 있는 무언가가 돼요.”
"그렇군요..."
사실 내게는 mp3가 있었다. 이건 문루아가 말하는 '기도'와는 달리 정말 ‘빨이 먹히는' 무기였다. 정말로 살을 빼게 해주고, 노래를 잘 부르게 해주고, 미래의 위험을 감지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문루아에게 기도가 왜 필요한지는 이해는 되었다.
"뭐. 그래도 제게는 그런 기도빨조차도 필요할 것 같네요."
"왜요?”
"이제 데뷔하는 신인 가수니까요. 신의 도움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말이 씨가 된 것이었을까? 정말 뮤비 촬영이 끝나자마자, 신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위기가 내게 닥쳤다.
...방송 활동이 아예 막혀버린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