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83화 (83/280)

제83화

베네치아 광장.

현지 베이스 연주자 로렌조가 하염없이 광장을 걷고 있었다.

'누나는 언제 오는 거지?'

로렌조의 누나인 조안은 한국의 음악 회사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었다. 누나는 자기 직장에 소속 가수가 버스킹 공연을 한다고 놀러 오라고 초대했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로렌조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하지만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에서 무슨 볼만한 무대가 나올까 싶었다.

"오."

멀리서 산타 복장을 한 아시아인 6명이 걸어왔다. 누나도 경호원들과 함께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안과 눈을 마주쳤다. 로렌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눈으로 인사하고는 바로 업무에 집중했다.

'어디 한번 보실까?'

로렌조는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았다. 밴드들이 악기를 풀고 연습하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연주 좀 하는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가수들 실력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산타 모자를 쓴 여성이 능숙한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는 한국에서 온 가수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를 맞아 노래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첫 곡은…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짝짝짝 박수가 나왔다.

'그렇게 어려운 노래를?'

로렌조는 혀를 찼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매번 울려 퍼지는 유명 캐롤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노래였다. 이 곡은 굉장히 연주가 단순했다. 간단한 코드 진행으로 이루어진 곡이니만큼 노래의 맛을 살리기가 어려웠다. 악기 연주가 심플한 만큼 보컬이 음악의 기승전결을 만들어줘야 했다. 어마어마한 고음도 필수였다. 그만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노래였다. 원곡자 머라이어 캐리도 코러스들과 함께 짱짱하게 부르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걸 라이브로 혼자 부른다니, 어지간한 실력자에게는 무리수였다.

밴드의 한 가운데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동양인 남자였다. 이탈리아식 정장에 애스콧 타이가 제법 멋스럽게 어울렸다. 하지만 로렌조는 경악했다.

‘제정신이야? 여가수도 아닌 남자가 혼자 부르겠다고? 키를 남자키로 바꿔서 부르겠다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기타 연주와 함께 바로 음악이 시작했다. 심지어 원곡과 같은 키였다.

'뭐야?'

로렌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나게 편안한 고음이 들렸다. 눈앞의 가수는 마치 A 파트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고음 파트를 불렀다. 포근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음색이었다.

음악이 갑자기 빨라졌다. 동양인 남자 가수는 빠른 템포의 반주에 산뜻하게 올라가 사뿐사뿐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영어 발음도 완벽하고. 무대 매너도 훌륭했다. 적극적으로 박수를 요청하는 등 다양한 제스쳐로 관객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러면서도 음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완벽하게 노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클라이맥스 부분은 누구도 쉽게 부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드디어 2절이 지나,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다.

<전등이 모든 곳에서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채우고 있어

모두가 노래해 종소리 들리네

산타여 제발 내 소원들 들어줘

내 베이비를 다시 돌려줄 수 있겠어?>

찌르르~ 온몸에 전율이 왔다. 로렌조는 온몸이 들썩거리는 걸 느꼈다. 이런 보컬리스트는 처음이었다.

폭발적인 고음이었다. 야수와 같은 강렬한 진함과, 미녀와 같은 나긋나긋함이 한 목소리에 공존했다. 강렬한 샤우팅이었지만, 가벼운 가성이기도 했다. 듣고 있는 로렌조도 믿을 수 없었다. 원곡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였다. 그전까지 이 절정을 위해 힘을 남겨 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곡이 끝나고 무대가 이어졌다. 이후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아카펠라 버전 등 다양한 무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로렌조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무대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 *

간이 대기실에서 비원더 3인 멤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권노을도 숨을 돌리고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을 했다.

‘휴 정신없네. 다음 무대가 뭐더라?’

확인해보니 마지막 무대는 문루아 선배 차례였다. 구룡도에서 발매해서 메가 히트한 창작 캐롤. '헬로 뉴 이어'를 불렀다. 댄스 가수 시절 문루아가 불렀던 유일한 발라드 히트곡이었다.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재호가 내게 말했다.

"진짜 선배님 대단하다. 댄스 가수가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잘 부르지?"

"앞으로는 좀 더 싱어송라이터 위주로 활동을 하고 싶으시다는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아쉬울 거 같은데. 댄스 무대가 최고잖아."

"보컬도 최고지."

“그건 그래."

"자, 앵콜 준비하자.”

앵콜로는 아카펠라를 하나 더 준비했다. Feliz Navidad였다.

걸어가다 보니 드문드문 카메라가 보였다.

‘다행이네. 재호나 환희가 평소에도 입이 거칠지 않아서.'

노경진 PD는 최대한 우리 눈에 안 띄는 곳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아마 우리가 하는 말도 죄다 편집 대상이 될 터였다. TYB가 제작하는 예능이니만큼 악마의 편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말은 좀 조심해야 했다.

이윽고 문루아의 무대가 끝나고. 고미진이 관객들에게 앵콜을 은근히 요청했다. 관객도 이에 응했다.

“앵콜~ 앵콜~"

이제 마지막 곡을 부를 차례였다. 무대에 나갔다. 모두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레드 컬러로 바꿔 입은 상태였다. 모두가 눈빛으로 하나가 되었다.

재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 소리에 맞춰 모두가 음을 잡았다. 그리고는 바로 준비한 캐롤 아카펠라를 시작했다. 선곡은 Feliz Navidad였다.

'이게 되다니.'

아카펠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분야였다. 원래는 평생을 준비한 사람들만 가능했다. 그럼에도 비원더 3인은 가능했다. 모두 음감이 좋았고 경험이 많았다. 악기처럼 자기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는 재호, 오랜 연습생 기간 자연스레 다른 파트를 돋보이게 하는 코러스 기술을 익힌 환희, 그리고 이전 생에 10년 넘게 코러스를 한 나까지 3인이 모두 아카펠라가 가능했다. 문루아 또한 오랜 가수 생활을 겪고, 최근 두문불출하며 알앤비 가수를 준비하면서 노래 실력이 크게 늘었다. 구멍이 없기에 4인 아카펠라가 바로 가능했던 것이다.

Feliz Navidad 또한 까다로운 노래였다. 사실상 멜로디 두 개만 있는 노래기 때문이었다. 반복만 하기에 금방 지루해질 수 있었다.

이를 재호는 풍성하게 변화하는 편곡으로 극복했다. 문루아가 흔들리지 않게 주 멜로디를 잡았다. 나와 재호가 중음으로 매번 조금씩 다른 화성으로 화음을 쌓았다. 재호는 마치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듯, 현란한 저음으로 묘한 리듬감으로 전체 사운드를 조율했다. 덕분에 아카펠라가 밴드 연주처럼 풍성해졌다.

내 목소리가 서서히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섞여 들어갔다. 목소리가 변질되는 건 아니었다. 내 목소리의 특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보다는 서로의 목소리가 조화를 찾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합보다 더 나은 하나의 소리로 변했다.

서서히, 공기에 소리가 스며들었다. 관객들도, 날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노래 하는 우리 4명의 하모니만 남았다. 다시금 기쁨이 차올랐다.

물론 이번 일은 월드 스타가 되기 위한 길목 중 하나에 불과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해야 그 뮤직비디오를 통해 홍보해서 국내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성적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외에 진출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살짝 그 목적을 잊었다.

'뭐 가끔은 괜찮겠지.'

눈을 감고, 지금의 행복한 기분에 몸을 맡겼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노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화음이 초콜릿처럼 녹았다.

아, 아름답다, 라고 생각할 즈음,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짝짝짝

"부에노~~"

"판타스티코!"

잘은 모르지만, 굉장히 좋다는 뜻일 것 같았다. 휘파람 소리까지 들렸다. 손을 흔들며 감사 표시를 했다.

조안이 상기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다.

"너무 멋져써요 다들!"

내가 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제 동생이 밴드 베이시스튼데요. 팝가수가 와도 별로란 앤데. 이번 공연에는 감동받았데요!"

"아 감사하네요."

재호가 얼른 말했다.

"혹시 베이시스트시면, 뒤풀이에 초대 가능할까요? 이탈리아 밴드 씬 이야기 듣고 싶은데요."

"오~ 정말요? 너무 좋아하겠는데요. 바로 말해볼게요."

재호는 벌써 두근두근한 모양이었다. 역시나 악기 덕후였다. 사실 재호는 우리가 뮤직비디오를 찍는 동안에도 직원들에게 부탁해 오카리나나 만돌린 같은 유럽 전통 악기를 수소문해 하나씩 수집하고 있었다. 악기 연주자라니, 재호가 갑자기 호기심이 생길 만했다.

문루아 선배도, 비원더 멤버들도 모두 상기된 표정이었다. 연주가 만족스러웠는지 미소가 입에 걸렸다. 미도리 또한 문루아와 밝게 뭔가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비원더는 한 차에 탔다. 미도리와 문루아는 조안의 차에 탔다. 우리의 운전사는 배영웅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환희가 반갑게 인사했다.

"매니저님!"

배영웅은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연 너무 멋졌어요. 바로 준비한 뒤풀이 장소로 안내해도 될까요?"

환희가 배가 고픈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배고파여! 뭐 머거여?"

"그러실 것 같아서. 한식당 정식을 준비했죠."

그 말에는 항상 음식에 무관했던 재호마저 눈을 반짝였다. 재호가 말했다.

"대박!"

"그런 반응이실 줄 알았어요. 외국 체류 오래 하면 다들 비슷한 반응이시죠. 그럼 안전벨트 매주세요."

항상 그렇듯, 조수석은 내 차지였다. CD에서는 재즈 아카펠라 그룹 Take6가 화려하게 캐롤을 연주했다. 우리가 오늘 공연에서 추구했던 바로 그 느낌의 음악이었다. 역시나 배영웅, 선곡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속 가수들에게 필요한 음악 지식을 쌓게 해주는 거겠지. 일종의 음악 교육자의 역할도 하고 있는 건가. 대체 이 사람 뭐 하던 사람이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영웅은 Take6의 현란한 화음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처음 뵈었습니다. 여기는 언제 오신 건가요?"

"선생님 지시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소인중의 행동이 너무 심해졌다 느낀 나는, 결국 대놓고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전화했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조치를 취해놓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배영웅 매니저인 모양이었다.

배영웅이 말을 이었다.

"소인중님이 무슨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첩보를 받았거든요. 덕분에 현지 매니저 조안과 함께 전 직원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어요. 도저히 증거가 없어서 함정을 파두었는데 다행히 제대로 걸렸네요."

“함정이라 하시면?"

"운전수 분이 의심스럽더라구요. 그분을 계속 살펴봤죠. 뭔가 실행에 옮기는 순간 바로 뒤를 밟았어요."

"그래서 때마침 오실 수 있던 거군요."

“네 뭐. 하늘이 도운 것 같네요. 이제 다 끝났으니 한숨 푹 놓으셔도 돼요. 잠시 눈이라도 좀 붙이세요."

"그럴까요?"

Take 6의 현란한 화음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뭔가 마음속은 불안했다.

나는 배영웅과는 달리, 소인중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이 정도로 얌전히 손을 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우리를 엿먹일 짓을 하나 정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나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 *

"오늘 쉰다구요?"

배영웅 매니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한식당 앞이었다. 과연, 한식당은 문을 닫아 버렸다.

'소인중 수작이군.'

전 세계에 로비 세력과 인맥이 뻗어 있는 그 녀석이라면, 한식당 하나 하루 휴업시키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환희가 배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미 밤이라 문 연 식당도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어쩌죠."

배영웅이 애써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분명 저희가 예약해두었는데.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다니. 항의 전화라도 해봐야겠어요."

조안이 제지했다.

"아마 그런다고 방법 없을 거예요. 저희 유럽 지부가 빌릴 수 있는 장소가 하나 있어요. 교외에 주택인데 조금 커서 스태프분들까지 다 모실 수 이써요. 여기 어떠세요?"

상당히 넓은 집인 모양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 다 식사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그 많은 요리를 할 수 있을까요?"

조안이 대답했다.

"아! 그건 조큼..."

그때였다. 잠자코 뒤에서 우리들 말을 듣고만 있던 고미진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이 쏠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편에서 계속)

0